091108. 흐림. 지난주에 들렀다가 다 구경하지 못하고 돌아온것을 후회하면서 다시 한번 들러보다.
창경궁은 성종 14년(1483)에 세조비 정희왕후, 예종비 안순왕후, 덕종비 소혜왕후 세분의 대비를 모시기 위해 옛 수강궁터에 창건한 궁이다. 수강궁이란 1418년에 세종이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의 거처를 위해서 마련한 궁이다.
창경궁은 창덕궁과 연결되어 동궐이라는 하나의 궁역을 형성하면서, 독립적인 궁궐의 역할을 함과 동시에 창덕궁의 모자란 주거공간을 보충해주는 역할을 하였다. 성종대 창건된 창경궁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모든 전각이 소실되었고, 광해군 8년(1616)에 재건되었다. 그러나 인조2년(1624) 이괄의 난과 순조30년(1830) 대화재로 인하여 내전이 소실되었다. 화재에서 살아남은 명정전, 명정문, 홍화문은 17세기 조선시대 건축양식을 보여주며, 정전인 명정전은 조선왕궁 법전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명정문
이 문은 명정전을 둘러싼 월랑 중 명정전과 마주보고 있는 동월랑의 중앙부에 있으며, 창경궁의 외문인 홍화문보다 안쪽에 놓여 중문의 기능을 갖는 평삼문이다. 위치로 보아서 명정전의 동서 중심축선상에 정확히 놓이지 않고 남쪽으로 약 1.2미터 벗어나 있다. 문의 좌우에 연결된 동월랑을 어느 정도 명정문에 맞추어 배치하였기 때문에, 이에 의하여 둘러싸인 명정전의 중정(中庭)은 정확한 방형이 아니고 기울어져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다포계 건물인데, 잘 다듬은 원형 주초석 위에 중앙열의 주열(柱列)에는 각 칸마다 2매씩의 육중한 판문을 달아 안으로 열리게 하였다. 이 건물은 포작(包作)과 건축의 형식으로 보아 명정전과 함께 광해군 때 재건되어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창경궁의 돌담을 배경삼아서
옥천교
옥천교는 명당수가 흐르는 어구(御溝) 위에 설치한 다리다. 조선 왕궁은 모두 명당수 위의 석교를 건너서 정전으로 들어가도록 만들어졌다. 옥천교는 길이가 9.9미터, 폭6.6미터와 두 개의 홍예로 구성되었는데, 홍예가 연결되는 중앙에 귀면(鬼面)이 조각되어 잡귀를 쫓고 있다. 다리 좌우에는 돌난간이 조각되었는데, 난간 가장자리에 법수(法首)를 세우고 네 개의 연잎 동자주(童子柱)를 세워 5칸을 형성하고, 한 장의 돌로 만든 풍혈판이 설치되었으며 돌란대가 얹혀 있다. 교상(橋床)은 장마루 같은 청판돌로 짜고 중앙에는 어도(御道)를 한 단 높게 만들었다. 이 다리는 1483년 조성되었다.
옥천교. 중앙부에 귀면상이 있다.
창경궁 뜰
창경궁에서는 이맘때쯤이면 단풍축제를 연다. 올해는 11.2-11.21까지로 알고 있다. 축제기간에는 여러가지 행사도 하는가본데 내가 간 날에는 하는게 보이지 않는다
사진찍으면 꼭 브이 하는 사람들 있더라
산수유나무. 열매가 빨갛게 익어가는데 누가 수확하려나? 그냥 묵히고 말려나 궁금하네
금천
조선 궁궐에 물이 흐르는 개천이 있는건 창경궁이 유일하다고 한다.
대춘당지 앞의 한가로운 노인과 불게 물든 단풍나무
대춘당지 앞에서 뒤태가 아름다운 여인이 있어서
춘당지는 1909년에 조성된 원지(苑池)이다. 두 개의 연못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위의 것이 1,107평방미터, 아래 것이 6,483평방미터이다. 연못 속의 섬(366평방미터)과 1986년에 조성한 것이다.
춘당지는 현재 큰 연못과 작은 연못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아래쪽의 큰 연못은 원래 내농포(內農圃)라고 부르던, 왕이 직접농사를 지으며 농정을 살피던 논이었다. 1909년 일본인들이 이곳을 파서 연못을 만들었고 이후 1986년에 한국식 연못으로 재조성한 것이다. 춘당지 북쪽에 인접한 작은 연못이 조선시대 춘당지라 부르던 원래의 연못이다.
내전터의 엄청난 고목 한 그루. 옛날 저 나무는 궁녀들의 놀이친구 노릇도 하였을것이고, 시원한 그늘을 제공하면서 궁궐내의 희로애락을 다 지켜봤을것이다.
내전터. 지금은 휴게소가 있어 과자와 음료는 팔고 있다.
풍기대 옆의 요상한 모양의 돌인데 용도는 모르겠다. 천문을 관측하는데 사용하였을까? 그냥 보기 좋아서 보물옆에 세워놓았을리는 만무한데 궁금했다.
풍기대
이 풍기대는 영조 8년(1732)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풍기대 위의 구멍에 깃대를 꽂고 그 깃대에 기를 달아 바람의 방향과 속도를 재던 것으로, 방향은 24방향으로 측정하였다.
전체 높이는 228.1센티미터인데, 하부대석 높이는 92.4센티미터, 상부 팔각주의 높이는 135.7센티미터이다. 돌기둥에 새겨진 무늬가 너무 아름다웠다. 조각 솜씨가 너무 빼어나지 않은가...
자경전터
혜경궁홍씨를 위해 정조가 지었다는 전각으로 경복궁에는 고종의 어머니를 위해 지은 자경전이 있다고 하니 옛날에는 임금들이 어머니를 기리기 위해 자경전을 지었나보다. 창경궁의 자경전은 일제에 의해 헐리고 그자리에 도서관이 들어섰다가 90년대에 헐어내고 소나무를 심어놓았다.
자경전을 돌아가면서 통명전과 연지를 담아 본다
아직은 단풍이 약간 덜 들었다. 이게 한꺼번에 단풍이 물들어버린다면 온 세상이 빨갛게 보일건데...
통명전 연지는 통명전 뒤뜰에 보이는 열천(‘맵도록 차다’하여 영조 33년 이름을 열천이라 지었음)의 물이 흘러가는 낮은 지형을 이용하여 연지를 만들고 왕비의 휴식공간으로 이용하였던 곳입니다.
통명전
통명전은 창경궁의 연조 공간으로 명정전 서북쪽에 있으며, 왕과 왕비가 생활하던 침전의 중심 건물이다. 창경궁 창건 때 세워졌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재건이 되고, 다시 이괄의 난과 정조 때 화재를 입었다.
지금의 건물은 순조 34년에 중건된 것이다. 남향한 전면에는 월대를 두고 양모서리에는 청동제 드므를 놓고 그 북쪽에 외벌대 기단 한 단을 두어 건물을 세웠다.
정면은 7칸이고 측면이 4칸인 이익공계(二翼工系) 건물로 겹처마에 팔작지붕을 하였다. 지붕 위에는 용마루가 없는 것이 특징이고, 전후퇴칸을 두었다.
북서쪽 일부의 방을 제외하고는 건물 내부 바닥에 모두 우물마루를 깔았는데, 정면으로 보아 양측에 2칸씩 방을 꾸몄음이, 1984년의 발굴조사에서 연도지(煙道址)가 노출됨으로써 확인되었다.
통명전과 양화당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파천하였던 인조가 환궁하면서 이곳에 거처한 일이 있으며, 고종 15년(1878) 철종비 철인왕후가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현판은 순조의 어필이다.
정면 6칸, 측면 4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겹처마이며, 세벌대의 장대석 기단 위에 네모기둥을 세우고 초익공계 포작(包作)을 짰다. 기둥사이에는 화반(花盤)없이 굴도리 밑에 장여를 받고 있는 소로만을 끼워 간결한 장식을 하였다.
건물의 내부에는 좌우엔 온돌방과 중앙3칸은 마루를 깔았고, 전면 중앙의 2칸에만 툇마루를 창 없이 개방하였다. 외진평주와 내진고주 사이에는 툇보〔退梁〕를 걸었고, 그 위로는 연등천장을 하고, 안쪽으로는 우물천정을 하였다. 대들보는 내진고주 사이에 걸었다.
환경전
이 건물은 성종 15년에 건립되었으며,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광해군 8년에 중건하였다. 그 후 순조 30년(1830)의 큰 불로 소실되었던 것을 그 34년에 중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이곳은 창경궁의 한 내전으로 왕이 늘 거처하던 곳이며, 중종이 이곳에서 승하했고, 효명세자(익종으로 추존)가 승하했을 때는 빈궁(殯宮)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정면 7칸, 측면 4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겹처마이며 기둥 위에는 이익공의 공포를 짜고 기둥사이에는 두세 개씩의 화반을 놓았다. 건물의 내부에는 모두 우물마루로 변형되었다. 외진평주(外陳平柱)와 내진고주(內陣高柱)를 배열하여 퇴량을 걸고 . 대들보(大樑)은 내진고주 사이에 걸었다.
경춘전
이 전각은 창경궁의 내전으로 성종 14년에 건립되었다. 그후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8년에 재건하였으나, 순조 30년에 불탄 것을 그 34년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른다. 이 경춘전은 정조와 헌종이 탄생한 곳이며, 현판은 순조의 어필이다.
정면 7칸, 전후툇간을 포함해서 측면 4칸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겹처마이며, 네모기둥 위에는 이익공의 공포를 짜고, 기둥사이에는 두세 개씩의 화반을 놓았다. 네면에는 모두 세살문을 달았고 그 위에 교살창을 하였다. 좌우엔 온돌방과 중앙3칸은 마루를 깔았고 천정은 우물천정으로 하였다.
좌측처마가 경춘전이고 우측처마는 환경전 그리고 가운데 멀리 통명전이다
숭문당과 좌측문이 빈양문
이 건물은 조선 경종 때 건립되었으며, 순조 30년에 큰 불로 소실된 것을 그해 가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崇文堂'의 현판과 '日監在玆'라 쓴 게판은 영조의 어필이다. 영조는 특히 학문을 숭상하고 영재를 양성하였는데, 이곳에서 친히 태학생을 접견하여 시험하기도 하고 때로는 주연(酒宴)를 베풀어 그들을 격려하기도 하였다.
정면 4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홑처마이며, 지형에 따라 앞면에만 방형의 장초석을 사용하여 누각처럼 세웠다. 기둥 위에는 간단한 초익공의 공포를 짜았고, 기둥 사이에는 화반 없이 굴도리 밑에 장여를 받고 있는 소로만을 끼워 장식하였다.
평면으로 보아 전후와 남쪽에 퇴간을 두고 마루를 깔았으며, 가운데칸의 마루와 동선을 연결시켰고 그 좌우에 방을 놓았다.
빈양문
숭문당 북쪽에 연접되어 있는 이 문은 치조공간(외전)과 연조공간(내전)을 연결하는 통로의 개폐 기능을 갖는 문으로 명정전의 뒷면 중앙 어칸 앞으로 설치된 복도를 따라가다 이 문을 나서면 바로 내전으로 들어서게 되어 북쪽으로 함인정, 경춘전, 환경전이 눈에 들어온다. 이 문은 빈양문의《궁궐지(宮闕志)》에 간단한 규모가 기록되어 있고 1986년 중건공사 때 발굴 조사를 토대로 재건하였다
함인정
이곳에는 원래 성종 15년에 지은 인양전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뒤 인조 11년(1633)에 인경궁의 함인당을 이건하여 함인정이라 한 것이다. 이곳은 특히 영조가 문무과거에서 장원급제한 사람들을 접견하는 곳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겹처마이며, 기둥 위에는 이익공의 공포를 짰고, 주칸에는 화반 두 개씩을 놓았다. 내부에는 모두 우물마루를 깔았는데, 내진주(內陳柱)로 구획된 마루는 한 단 높게 처리하여 그 위로는 우물천정을 하고 사방둘레의 툇간(退間)에는 연등천정을 하였다.
숭문당앞의 주목
창경궁에선 종묘로 넘어갈수 있는 다리가 만들어져 있다. 관람도 물론 무료이다. 기왕에 멀리까지 왔는데 보지않을수 없기에 종묘로 넘어갔다. 종묘는 조선 역대 왕들의 신주가 모셔져 있어 내부 관람은 안되고 밖에 건물만 보게 되어 있었다. 세계문화유산으로도 등재된걸로 알고 있다.
여긴 종묘 넘어가는 길의 담벼락
영녕전 처마와 담벼락
종묘 영녕전
영녕전 앞마당
영녕전. 평소엔 문을 걸어 잠그고 있는데 지금은 청소시간이라서 열어 놓고 있다는 감시원의 말이다. 감시원이 뒷짐지고 서 있으며 단위에도 못 올라가게 한다.
영녕전은 신실 하나하나의 구성은 정전과 크게 다름이 없지만 부재의 크기가 정전보다 약간 작고 전체 건물 규모도 정전보다 작기 때문에 정전에서와 같은 장대함을 느끼기에는 뒤지는 감이 있으나 오히려 그 때문에 공간이 한눈에 쉽게 들어와 친근감을 더해 준다.
네모난 아랫부분에 원형 주좌를 둔 주춧돌에 둥근 기둥과 간단한 초각을 한 익공을 짜고, 툇간 안에 두 짝 판문을 달고 뒤는 화방벽으로 쌓고 서까래는 부연 없는 홑처마로 꾸미는 등 세부 구성은 정전과 거의 같으며 역시 부재 표면도 단청 없이 간단히 주칠로 마감하였다.
정전과 좌우 익실 앞으로 동·서월랑이 뻗어 나와 ㄷ자 형태를 이루고 있고 박석을 덮은 상·하월대가 울타리를 가득 메우는 점도 동일하다. 이곳은 부재의 처리나 건물의 규모가 전체적으로 종묘 정전보다는 작지만 건축 공간 자체의 장엄한 공간 구성은 여기서도 잘 나타나고 있으며 질박하면서도 친근감 있는 장인들의 솜씨는 이곳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종묘 정전
종묘 정전은 매칸마다 신위를 모신 신실인 감실 열아홉 칸, 신실 양 옆으로 각각 두 칸의 협실, 그리고 협실 양 끝에서 직각으로 앞으로 꺾여 나와 마치 신실을 좌·우에서 보위하는 듯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 동·서월랑 다섯 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남문인 신문에서 보면 동서 109미터, 남북 69미터나 되는 묘정 월대가 넓게 펼쳐있고, 월대 가운데에는 신실로 통하는 긴 신로가 남북으로 나 있으며, 그 북쪽 끝에 상월대와 기단이 설치되어있다. 종묘 건축이 다른 건물과 다른 점은 건물 내부에 모실 신위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몇 차례에 걸쳐 건물을 옆으로 증축하여 길게 늘린 점에 있다.
종묘 출입문에 있는데 뭐라 부르는지는 모르겠다.
종묘는 특별히 볼건 없어 다시 창경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궁궐 담을 따라 돌게 만들어진 길로 걷다보면 관천대가 보인다.
관천대
이 관천대는 소간의(小簡儀)를 설치하여 천문을 관측하던 곳으로, 관천대 - ≪서운관지(書雲觀志)≫에 보면 숙종 14년(1688)에 조성된 것이다. 계동 현대건설 본부 건물 앞뜰에 남아 있는 15세기 초의 관천대와 함께 조선시대의 천문대 양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이다.
높이는 2.2미터, 넓이는 2.4*2.3미터이며, 주위에는 돌난간을 돌렸다. 대의 중앙에는 높이 99센티미터의 관측기를 설치하는 작은 대가 있고, 그 위에 넓이 73.4*52.6센티미터, 두께 24.5센티미터의 또하나의 판석이 있다. 여기에 남북방향으로 관측기를 고정했던 5개의 구멍이 파여 있다.
명정전으로 들어서는 광정문
명정전과 품계석
조선 성종 15년(1484)에 창경궁이 조성되고, 그 정전으로서 명정전이 세워졌다. 이때 명정전은 경복궁이나 창덕궁의 정전과는 달리 남향이 아닌 동향이었다. 이는 창경궁의 지세에 따른 것이다. 그후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8년(1616)에 복원되어 오늘에 이른다. 다른 궁의 정전과 같이 이중의 월대를 두어 그 위에 건물 기단을 마련하고, 큰 사각 주초 위에 원형의 운두 높은 주좌(柱座)를 조각하여 초석을 배열하였다.
월대의 형식은 다른 궁의 것과 달리 지형에 맞추어 전면 동쪽과 북쪽 일부만을 이중단으로 하고, 건물 좌우와 뒷편에서는 1단으로 하였다. 평면으로 보아 정면 5칸, 측면 3칸에 후퇴(後退)를 한 단층 팔작기와지붕으로 겹처마이다.
평주 위에는 모서리를 많이 굴린 창방이 놓이고 운두가 낮은 평방 위에 다포계 양식의 외삼출목, 내사출목의 공포를 짜았다. 건물 사면은 모두 꽃살창으로 돌려져 있는데, 그 위로는 교살창이 있다. 내부 바닥에는 전(塼)을 깔았고, 뒤편 중앙부에는 어좌인 용상이 있는데 그 뒤로 일월도의 병풍이 놓였다.
그 위로는 닫집으로 짠 보개(寶蓋)가 있고 천정의 중앙부에는 한층을 접어올린 쌍봉문(雙鳳紋)이 있는 보개천정을 장식했으며, 그 주위는 우물반자를 하였다. 단청은 모로단청을 하고, 특히 천정판에는 화려한 연화문의 반자초 단청(丹靑)을 시문했다.
월대의 전면에는 명정전 어간에 맞추어 중앙에 삼도의 이중계단이 놓였다. 가운데 어계의 폭은 2.4미터이고, 양측 협계(挾階)의 폭은 각 1.3미터이다. 상하 계단은 모두 6단씩으로, 어간의 답도(踏道) 석판 중앙에 사분심엽형(四分心葉形) 윤곽을 양각(陽刻)한 후 그 안에 날개를 활짝 편 한쌍의 봉황을 조각해 장식했고, 챌판에도 당초(唐草)와 보상화(寶相華), 운문(雲紋) 등을 정교하게 조각하였다. 하층 계단 앞에는 명정문과 연결되는 어도가 있고 좌우에 24개의 품계석(品階石)이 있다.
명정전으로 연결되는 누각
정전인 명정전과 좌측으로 보이는 건물이 문정전
문정전은 창경궁 창건 때 편전으로 건립되었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명정전과 함께 중건하였다. 1930년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에 실린 명정전 정면 사진에 동측면의 일부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그때까지 이 전각이 존속했던 것으로 알 수 있으나, 그후의 자세한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
1984년부터 시행한 복원을 위한 발굴조사에서 건물의 기단과 동쪽에 두 곳, 서쪽 한 곳의 계단이 확인되었는데, 기단의 규모는 남북 20미터, 동서 18미터였다.
1986년 창경궁 중창공사 때 중건되었는데, 발굴조사와 문헌 고증에 의하여 네모기둥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 내삼출목, 외이출목, 단층 팔작집(38평)으로 겹처마이며 남향하여 세웠다.
이 건물의 서쪽에서, 숭문당 남쪽면으로는 경사진 자연지세를 이용하여 남북 방향으로 아름다운 2단의 화계(花階)를 꾸몄고 동쪽행각사이에는 문정문이 있다.
명정전으로 연결되는 좌측누각.
누각은 지금 길다란 복도처럼 되있으나 정조대왕 시절엔 장용영이라는 친위부대가 머물렀다고 한다. 전각 안에 진을 치고 있는 최정예부대를 생각한다면 명정전 품계석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앉아 있는 신하들이 누군들 고개를 들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어디 둑이 무너지는게 중장비로만 무너뜨리겠는가? 작은 개미들이 뚫는 구멍에도 둑은 무너지는것이다. 아무리 용감하고 날쌘 용사들로 사방에 진을 치고 지키면 무엇하리오. 적은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있는데... 野話처럼 정조가 독살되었다면 늘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에 의해 서서히 죽어갔으니 말이다. 세상사는게 그런것이다. 서서히 밀려오는 작은 실수에 사업이 망하고 건강도 망치는 법이다. 항상 경계하고 또 경계할 일이다.
다시 명정문을 지나 홍화문을 나오면서 창경궁 구경은 마치게 된다. 날씨는 비 온 뒤라 쌀쌀하였지만 구경 한번 잘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