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1031. 흐리다가 비가 내림. 부부가 서울나들이.
오늘은 수도권산 이어가기로 진행하던 길을 가려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비가 온다는 소식이 있어 포기하고 뭘할까 망설이고 있었다. 마누라는 관악산에 가자고 하는데 비가 오면 관악산을 가나 백두산을 가나 마찬가지인거고해서 그냥 고궁이나 구경가자고 꼬드겼다. 실은 내일 친척집에 결혼식에 참석하고 시간이 남은 오후에 근처에 창경궁을 가려고 했었다.
(((문화재청 창경궁관리소(소장 이만희)는 오는 11월 2일(월)부터 3주 동안 창경궁의 단풍과 낙엽, 창경궁의 어제와 오늘을 주제로 ‘고궁에서의 가을감상’ 행사를 개최한다. 이 행사는 작년에 이어 매년 시행하는 행사로서 창덕궁, 창경궁 후원의 상림십경(上林十景)중의 하나이며, 조선의 임금들이 극찬했던 관덕풍림과 춘당지의 아름다운 단풍을 감상할 수 있다.
또한, 궁궐 중에서 유일하게 물이 흐르는 창경궁 어구에 조성된 금천길을 낙엽길로 만들어서 거닐 수 있게 했다.)))
그런데 오늘 비가 오는 관계로 오전에 일찍 서둘러서 창경궁을 봐도 되겟다싶어 가자고 해봤는데 순순히 따라 나선다. 요즘 재수하는 아들놈이 속을 썩여 마누라도 신경이 곤두 서 있는 참이고 하여 잘되었다 싶은 맘이다. 시내 구경이야 비오면 중간에 작파하고 집에 와버리면 그만인거고해서 공부하러 가는 큰 애를 태우고 가다 지하철에서 내려주고 창경궁으로 갔다. 입구 주차장에 주차(2시간에 2천원, 이후 시간당 1천원)하고 입장료1일 1천원)를 끊어 들어갔다.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 창덕궁 돈화문이 5칸인데 비해 홍화문은 3칸의 작은 규모지만 아담하면서도 날렵하고 경쾌한 느낌을 준다(보물 제384호)
창경궁의 정문으로 명정전과 마찬가지로 동향하였다. 조선 성종 15년에 창건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광해군 8년에 재건되어 오늘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우진각지붕의 건물로, 기둥 위에는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이 놓이고, 다포계 양식(樣式)의 공포를 짰는데, 견실한 구조와 공포의 짜임은 조선 초기 형식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정면의 3칸에는 각각 판문을 달고 그 위로는 홍살을 하였으며, 북쪽에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마련돼 있다. 이층은 우물마루에 연등천장을 꾸몄다. 홍화문의 좌우로는 궁장(宮墻)이 남북십자각을 지나 궁역을 형성하였다.
정전인 명정전으로 들어가기 위해 연결된 전각과 앞에 도랑이 금천이다
명정문과 금천. 명당수인 금천에는 옥천교(보물 제386호)가 놓여 있다. 다리 난간 아래 홍예(무지개모양)사이에는 궁궐에 들어오는 나쁜 기운을 쫒기 위해 도깨비 상을 조각하여 놓았다.
홍화문
금천길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관리하고 있다
느티나무와 회화나무가 서로 꽈리를 틀고 있는 고목. 사람과 비교해봐도 엄청나게 큰 나무인걸 알 수 있다
창경궁 뜰의 고요함
아름다운 단풍나무가 화살나무라는 기이한 이름일줄은 오늘 알았다
관덕정. 이 정자는 춘당지 동북쪽 야산 기슭에 있는 사정(射亭)으로 인조 20년(1642)에 취미정(翠微亭)이란 이름으로 창건되었으나 현종 5년(1664)에 지금의 이름으로 개명하였다 한다.
예기(禮記)》에 "활쏘는 것으로 덕을 본다. 쏘아서 정곡을 맞추지 못하면 남을 원망치 않고 제몸을 반성한다."라는 것에서 이름한 것으로 풀이된다. 정면 1칸, 측면 1칸에 초익공계 양식이며 팔작지붕으로 된 정자 건물로 화강석 기단 위에 각
초석을 놓고 각주를 세웠으며 내부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다. 구조상 특이한 것은 측면에 비해 정면이 2배 정도 넓으나 같은 한 칸씩으로 구성되어 정면 중앙부에 수장폭 크기의 간주를 세우고 좌우 4분의 1지점에 각각 대들보를 올려 놓았다.
대들보머리는 외부로 빠져나오지 않고 내부에서 창방 위에 얹혀 있는 상태이고 네귀의 기둥 위에서만 창방의 뺄목을 익공으로 조각하였다.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에서는 "창덕궁, 창경궁 후원에 상림십경(上林十景)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관덕풍림(觀德風林)이다"하였다.
식물원. 앞에 두 그루 반송이 일품이다
1909년에 준공된 우리나라 최초의 식물원이다. 건축 당시 한국 최대의 목조구조 식물원이었으며,열대지방의 관상식물을 비롯한 희귀한 식물을 전시하였다. 1986년 창경궁 복원공사를 계기로 자생목본류를 중심으로 야생화와 함께 전시하고 있다. 현재 대온실은 2004년 2월 6일에 등록문화재 제83호로 지정되었다.
춘당지 오솔길
소춘당지
소춘당지. 낙엽이 물위를 덮고 있다
소춘당지. 춘당지에는 큰연못과 작은 연못 두 개가 있다.
대춘당지
춘당지는 1909년에 조성된 원지(苑池)이다. 두 개의 연못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위의 것이 1,107평방미터, 아래 것이 6,483평방미터이다. 연못 속의 섬(366평방미터)과 1986년에 조성한 것이다.
춘당지는 현재 큰 연못과 작은 연못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아래쪽의 큰 연못은 원래 내농포(內農圃)라고 부르던, 왕이 직접농사를 지으며 농정을 살피던 논이었다. 1909년 일본인들이 이곳을 파서 연못을 만들었고 이후 1986년에 한국식 연못으로 재조성한 것이다. 춘당지 북쪽에 인접한 작은 연못이 조선시대 춘당지라 부르던 원래의 연못이다.
대춘당지
팔각칠층석탑 - 보물1119호
춘당지 옆에 세운 탑이다. 일제 강점기 이왕가박물관을 만들 때 만주(滿洲)에서 가지고 온 상인으로부터 매입하여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몸돌에 “遼陽重/ 開山都/ 綱挺玉/ 巖壽塔”의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으며, “大明成化六年庚寅歲秋七月上澣吉日造”라고 기록되어 있어 1470년(성종원년)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8각의 평면 위에 7층의 탑신을 세운 석탑으로 전체 모습은 라마탑의 형태와 비슷하다.
대춘당지
홍화문을 지나 금천길로 해서 식물원을 구경하고 나와 소춘당지와 대춘당지를 지나는 순간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성종태실과 내전터를 구경하면서 지날때부터는 비가 제법 내리기 시작한다. 우린 어쩔수 없이 비를 피해 양화당과 통명전을 구경하면서 처마밑에서 비를 피하였다. 카메라바테리도 방전되어 사진도 찍을수 없고 비는 더 굵어지는 느낌에 그만 집으로 발길을 돌리기로 하고 나왔다. 창경궁의 절반만 구경하고 다른 전각들을 보지 못하고 나와 안타까움에 조만간에 다시 한번 들러볼 참이다. 내일이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