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사는 세상/옥당골로 찾아들어

전씨(田氏)의 결조 시조(始祖)

돗가비 2009. 8. 25. 14:46

콩밭에서 태어난 전씨(田氏)의 결조 시조(始祖)(영광)

고려때의 일이다. 당시의 세도가인 회동대감댁에 경사가 났다. 이 집에 수가낭(秀佳娘)을 자기 후궁으로 데려가기로 하였던 것이다. 회동대감댁에서는 물론이려니와 나라에서도 경사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수가랑에게는 청천벽력이었다. 지금까지 아름답게 가꾸어 온 것은 남의 나라 왕의 후궁으로 가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근심과 걱정으로 방안에서 가야금으로 세월을 보내던 어느날 수가랑은 좋은 묘안을 찾아냈다. 그녀는 자기집 종 꺽쇠를 불렀다.
"꺽쇠"
"부르셨습니까?"
"날이 점점 가까이 오는데 어찌하면 좋겠느냐!"
"소인은"
꺽쇠는 더 말을 잊지 못하고 수가랑을 쳐다 보았다. 순박하고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차 있고, 새벽별 같은 그의 눈에는 어느 사이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러나 머슴인 꺽쇠에게 무슨 힘이 있으랴.

"꺽쇠야∼ 소인 하지만 말로 이 수가랑의 마음이 되어서 한번 생각해 보렴."
"하지만 소인이 무슨 …"
"또 소인일세. 그러지 말고 꺽쇠야 우리 멀리 도망가자. 나를 멀리 데려다 주어 응?"
"아가씨 그건 말이어요. 어떻게 감히 아가씨를 모시고 대감마님을 거역할 수가 있겠습니까? 소인은 이 집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아가씨는 소인 등에 업혀 자라서 아가씨에 대한 정도 깊지만, 대감마님의 은혜를 갚을 길이 없습니다."

꺽쇠는 단숨에 말하고는 이내 고개를 떨구었다. 억척스럽게 힘은 세지만 이런 일에는 별 도리가 없는 것이다. 수가랑의 입에선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러면 꺽쇠는 내가 아버님의 분부대로 저 원나라 황제의 후궁으로 가버려도 좋단 말인가"

수가랑의 눈엔 슬픔이 서려 있었다.

"아가씨 그런 것은 절대 아닙니다. 다만…"
"다만 무엇이 어쨌다는 거냐?"
"소인은 그저 어찌할 바를 모를 뿐입니다."
"그렇다면 아무 걱정말고 나를 데리고 어디 먼데로 가주어 응?"
꺽쇠는 말이 없었다. 아니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내가 차라리 죽었으면 죽었지 후궁은 되지 않을 것이다. 꺽쇠는 내가 죽는걸 봐야 좋겠느냐?"
"아니올씨다. 소인은 그저 어찌해야 좋을지 모를 따름입니다."

수가랑은 결심을 하고 품에서 한자루의 장도를 꺼내었다. 깜짝 놀란 꺽쇠는 한발자국 다가서며 외쳤다.

"아, 아가씨 아니되오. 아니됩니다."
"그러니 꺽쇠, 제발 나를 살려주어. 아버님은 꺽쇠도 잘 알잖아. 나라의 영을 어기면서까지 나를 돌봐 주시지 않으시리란 것을… 우리 아무도 모르는 것에 가서 오손 도손 살아."
"그러나 대감마님이 아신다면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더구나 아가씨는 대감마님의 외동딸이므로 설마 아가씨가 죽는다면 그대로 버려 두시지는 않으실거예요."
"소용없는 일이야."

수가랑은 한가지 남았던 희망마저 무너지니 이제 남은 거라곤 절망밖에 없었다. 수가랑은 흐린 눈빛으로 말을 했다.

"꺽쇠는 내가 싫은가 봐. 언젠가 행랑채에서 이야기할 때 나를 좋아한다고 했다면서. 이제 보니 거짓말이었군."
"아니 아가씨께서 그 얘길 어떻게?"
"몸종 항아가 듣고 와서 말해 주었지."
꺽쇠는 당황하여 몸둘 곳을 모르고 주위만 두리번 두리번 살폈다.

"꺽쇠, 내가 싫지 않으면 함께 먼 곳으로 가 응?"
"그렇지만 아가씨 어떻게 사실려구요?"

꺽쇠는 두려운 눈으로 조심스레 수가랑을 쳐다봤다.
"그건 걱정말어. 내가 알아서 준비할테니까 꺽쇠는 나서기만 하면 되는거야."
수가랑은 환히 웃었다. 이젠 원나라로 끌려갈 걱정이 없어졌으니까.
"내일밤 자시에 떠나기로 해. 그동안 내가 알아서 다할테니까. 알았지?"

수가랑은 말을 마치자 총총히 안채로 들어갔다. 얼떨결에 대답은 하였지만, 꼭 무엇에 흘린 듯이 멍하니 서 있던 꺽쇠는 수가랑이 사라지자 이내 묘한 웃음을 띄며, 어디론지 가버렸다.

이미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수가랑의 방엔 밤이 이슥하도록 불이 켜져 있었다. 내일밤 집을 떠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패물을 싸서 그것을 허리에 두르기 편하게 만들었다. 짐을 다 꾸리고 나니 새삼 슬픔이 복받쳐 올라왔다. 막상 집을 떠날 생각을 하니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고 알 까닭이 없는 초생달은 나무가지에 걸려서 창으로 비춰 들어오고 있었다. 수가랑은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가야금을 무릎에 올려 놓고 타기시작했다. 어떻게 나를 길러준 부모인가. 그런데 이제 부모를 떨치고 가야 한다니 만일 부모님이 아신다면 얼마나 비통해 하실까? 적막하고 고요한 밤에 가야금 소리만이 텅빈 수가랑의 마음과 방안을 메웠다. 촛불은 미풍에 한들거리고 지금까지 살아온 온갖 추억은 하나하나 되살아나고, 밤은 더욱 고요하기만 하였다.

문득, 가야금 소리가 멎었을 때 파르르 장지문이 떨고 촛불이 흔들거렸다. 미닫이 문이 열리지도 않았는데 한 어린 중이 수가랑 앞에 나타났다. 깜짝 놀란 수가랑은 그저 떨고만 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동승이 수가랑을 내려다보며 말하는 것이었다.

"수가랑은 들으시오."

그저 놀랍고 괴이한 일을 당한 수가랑은 두려움으로 가슴이 마구 뛰었다.

"내일, 아니면 몇일내로 그대에게 목숨이 위태로운 변이 닥칠 것이요. 변을 당하거든 곧 한입(一口)에 쌀뿔받침( )하고 열(十)이 모인 곳(田)으로 피하시오. 그리고 이것은 天豆라는 콩인데 심으시오 자! 어서 이 콩을 받아 먹으시오."

수가랑은 제 정신이 아니었다. 동승이 내미는 콩을 받아먹었다. 향기가 입안에 가득차고 전신에 기운이 퍼지는 것 같았다. 수가랑은 꿈인지 생시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동승은 움직이지도 않고 수가랑이 받아 먹은 것을 보고 이내 사라져 버렸다. 문득 정신을 차린 수가랑이 주위를 둘러봤지만 동승은 이미 온데 간데없고 동승이 서 있던 자리엔 콩 한 알이 있을 뿐이었다. 수가랑은 조금전에 일어났던 괴이한 일을 생각해봤다. 「변을 당하거든 한 입에 쌀뿔하고 열이 모인 곳으로 가라고? 그 고이 어딜까?」수가랑은 동승이 주고간 콩알을 손에 쥔채 이내 깊은 잠속에 빠지고 말았다.

동창이 환히 밝아 올 무렵에 잠이 깬 수가랑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기 배가 아이 밴 여자처럼 둥글게 불러 있었다. 그리고 손에 쥔 콩알에서는 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수가랑은 이상하고 어처구니 없는 일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수가랑은 황급히 일어나 마당 한 귀퉁이에 싹이 돋고 있는 콩알을 심었다.

마침 찬연히 비쳐오는 아침 햇살에 싹이 빛나고 있었다. 그러더니 새싹은 금새 자라서 가지를 뻗고 잎사귀가 무성해 지더니 사람의 키만큼 자라나 있는 것이다.

또 한번 놀란 수가랑은 움직일 줄 모르고 한동안 콩나무 앞에 서 있었다. 밤새 없었던 콩나무가 마당 한 귀퉁이에 자라는 것도 이상한 일이려니와 그 나무가 금방 자라서 사람 키만한 것에 집안 사람들도 놀랐다. 그러나 더욱 놀란 것은 수가랑의 배가 불러서 곧 아기를 낳을 것 같은 일이었다.

수가랑의 아버지 회동대감은 땅을 치며 대성통곡을 했다. 양가의 규수가 아기를 밴것도 변이지만 머지않아 원나라로 가게 될 몸이 이꼴이 되었으니, 이것은 회동대감 집안의 일 뿐만 아니라 곧 나라의 일이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회동대감은 한동안 넋을 잃고 앉았다가 수가랑을 불렀다.

"너 이것아 어찌하여 이꼴이 되었느냐? 사실대로 말하여라."

화가 난 아버지 앞에 수가랑은 고개도 들지 못하였다. 그러나 몰야대는 성화에 흐느끼며 모든 얘기를 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믿을 리가 없었다. 어찌 인간의 세상에 그런 괴이한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뭐라고? 이 애비를 놀리는 거냐? 말도 되지도 않는 소리다. 도대체 뱃속의 아이 애비는 누구냐 말이다."

그러나 수가랑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수가랑 자신도 도무지 믿기 어려운 사실인데 하물며 보지 않는 남이야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그녀는 쓰러져 흐느껴 울 뿐이었다. 이제 그녀에게는 어젯밤의 일들이 악몽같이 여겨지고 자기를 이렇게 만든 그 동승이 저주스러울 뿐 이었다. 그러나 숙명으로 도릴고 죽기에는 너무나 젊고 아름다웠다. 방안은 한숨소리와 수가랑의 울음소리로 가득차 있을 뿐 사람들은 감히 그 앞을 얼씬도 못하였다. 아버지에게 문득 한 생각이 떠올랐다.

「죽여 버리자. 집안의 망신이고 나라의 명을 거역하지 않는 길이란 그것 밖에 없다. 오늘밤 자객으로 하여금 수가랑의 방에 들게하여 죽이도록 하리라.」처녀의 몸으로 이미 아이를 배었으니 마땅히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썩 물러가거라. 네 방에 가 있어. 그리고 네 방에서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가서는 안된다. 알았으냐?"

수가랑은 자기 방으로 건너왔다. 마당 한 귀퉁이에 탐스럽게 서 있는 콩나무를 바라보며 시름없이 가야금을 튕겼다. 눈물이 흘러서 볼을 적시고 가슴까지도 적셨다.

어느덧 해는 기울고 어둠이 찾아왔다. 어둠은 차라리 모든 시름을 감춰주는 것 같았다. 촛불을 밝힐 생각도 하지 않고 하염없이 콩나무만 바라보며 가야금을 타고 있었다. 가야금의 가락을 따라서 콩나무가 너울너울 춤추는 것 같기도 하고 손짓하며 부르는 것 같기도 하였다. 수가랑은 가야금을 내려놓고 사뿐히 마당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콩나무 앞으로 다가갔다. 콩나무는 어둠속에서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짓고 있는 것 같았다. 수가랑은 손을 뻗혀 열매를 만져 봤다. 그러자 그 어떤 알지 못하는 힘이 그녀를 이끌어 콩나무 그늘 속으로 들어가게 했다.

그때였다. 콩나무 뒷담을 뛰어 넘어오는 괴한이 비수를 번뜩이며 수가랑의 방앞에서 잠시 귀를 기울이더니 곧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러자 다시 되돌아 나온 괴한은 회동대감의 사랑방으로 사라져 갔다. 이내 회동대감의 대노한 목소리가 집안에 쩡쩡 울리고 하인들은 관솔에 불을 붙여 집안을 샅샅이 찾았다. 그러나 수가랑이 있을 리가 없었다. 수가랑은 콩나무 밑에서 이 일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인들은 모조리 집안을 뒤졌으나 수가랑을 찾지 못하자 회동대감은 다시 하인들을 시켜서 수가랑을 뒤쫓게 했다. 수가랑은 하인들이 찾으러 멀리 나가고 집안이 조용해지자 콩나무 밑에서 나왔다. 밖에 나오자 이 일을 알고 있던 꺽쇠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지켜보고 있었다.

"아가씨! 제가 데려다 드릴께요."
"아, 꺽쇠 고마워"

수가랑은 자기도 모르게 꺽쇠의 손을 덥썩 잡았다. 꺽쇠는 수가랑을 업고 쪽문을 지나 뒷문으로 나가 남쪽을 향하여 뛰었다.

이윽고 냇물을 건널 무렵, 두사람을 쫓는 한떼의 人馬가 소리를 지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수가랑과 꺽쇠는 엉겁결에 부근에 있는 콩밭으로 뛰어 들어가서 엎드렸다. 뒤쫓던 무리들이 개울을 건너 콩밭에 이르자, 말들은 앞발을 높이 치켜들고 소리내어 울었다. 그리고 콩잎을 먹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아무리 채찍질을 하고 소리를 질러도 더 앞으로 나아가지를 못했다. 군사와 하인들은 말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그틈에 수가랑과 꺽쇠는 멀리 영광땅으로 달아날 수가 있었다. 그들은 콩밭에서 콩밭으로 달아났다. 어디만큼 갔을까? 한참을 달려간 그들은 멀리 동쪽에서 동이 터오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이 무렵에 수가랑은 콩밭에서 사내아이를 낳았다.

수가랑이 아이를 밭에서 낳았다 하여 밭전子 전대두(田大豆)가 전씨의 시조(始祖)가 되었다고 하며, 이분은 장성하여 훗날 고려를 위태로움에서 건진 장군이 되었다고 한다.(광주일보 1976. 7.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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