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비(石魚)의 유래(영광)
영광 굴비는 칠산어장에서 잡힌 싱싱한 조기를 소금에 절여 높은 건조대에서 말린 것이다.
굴비의 명칭에 있어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나 영광읍지(靈光邑誌)에는 「석수어(石首魚)」라 기록하고 있고, 進貢편에는 「屈非」라는 기록이 보이는데, 일부 근래 발간물들이 「石魚」라 기록하여 이자겸(李自謙)과 관련짓고 있다.
귀양길은 멀기도 했다.
"아직도 멀었으냐?"
"네, 이백여리는 더 가셔야 됩니다."
"영광이란 땅은 멀기도 하구나."
이자겸은 귀양길이 지루하고 피곤하기만 했다.
이자겸은 한때 王位를 넘겨다 보던 당대의 세도가였다. 그가 이제 심복이었던 척준경(拓俊京)의 배신으로 왕권을 눈앞에 두고 잡혀 인종(仁宗)의 명으로 전라도 영광으로 귀양을 가고 있는 것이다.
仁宗은 원래 이자겸의 외손자가 되는 동시에 사위이기도 한 것이다.
그는 고려 6대왕인 예종(睿宗)에게 딸을 바쳐 국구가 되자 득세를 하였고, 예종이 죽은 후 어린 인종이 대통을 이어 등극하자 나라의 대권을 손아귀에 넣고 휘두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후 이자겸은 또 다른 딸을 인종의 妃로 삼아 예종, 인종 두 대에 걸쳐 국구가 되었다. 그러자 이자겸은 은근히 왕위를 넘겨다 보는 욕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를 눈치챈 금찬(金粲), 안보린(安甫麟), 지록연(智祿延) 등이 상장군 최탁(崔卓), 오탁(吳卓), 권수(權秀), 고석(高碩) 등과 함께 이자겸 타도 거사를 일으켜 대궐로 쳐들어갔으나 오히려 이자겸의 심복인 척준경에게 모두 피살당하고 말았다. 이자겸과 척준경은 대궐을 불사르고 임금을 감금하여 꼼짝도 못하게 했다.
이자겸은 더욱 야심을 노골적으로 나타내서 인종을 독살하려고 했다. 이에 인종은 겁을 먹고 왕위를 이자겸에게 넘겨 준다는 칙서를 내렸으나 이자겸은 주위가 두려워서 감히 받지를 못했다. 그러나 이자겸이 야심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때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할 즈음, 이자겸의 무모한 행패를 보다 못한 군기소감인 최사전(崔思全)이 이자겸의 왼팔인 척준경을 매수하여 이자겸을 치게 한 것이다. 자기의 심복이 배신을 하자 이자겸은 마침내 각오를 하고 소복을 입고 대궐로 들어왔다. 척준경은 곧 이자겸을 포박하여 역적죄로 문초를 했다. 그러나 왕은 외조부요, 장인인지라 차마 죽이지 못하고 전라도 영광으로 유배를 명한 것이다. 이리하여 당대의 세도가인 이자겸을 일시에 죄인이 되어 영광땅에서 외롭게 세월을 보내야 했던 것이다.
아지겸이 영광에 당도해 보니 어촌이라서 각종 생선이 풍족했다. 그중에서는 앞바다에서 잡히는 조기는 특히 맛이 좋았다. 그런 영광에선 조기를 잡아 간을 해서 돌에 지질러서 물기를 뺀 후 말려 두었다가 일년내내 먹는 것이었다.
이자겸은 왕이 부럽지 않은 호화스런 생활을 했으나, 조기말린 것은 처음 먹어 보았다.
"허어, 그거 맛이 좋다. 돌에 저질러서 말리니 석어(石魚)라고 부르는 것이 좋겠노라. 과연 영광의 굴비 는 일미로다."
하고, 왕에게 진상을 했다.
굴비를 처음 먹어보는 인종은 매우 좋아하며,
"영광굴비는 과연 별미로다. 매년 진상토록 하게 하라."
고 분부를 했다.
이로부터 영광굴비는 일약 유명해졌으며, 이후 고려 조정에서는 또한 굴비를 멀리 원나라에 진상을 했으며 그후 이조때에 이르러서도 명나라와 청나라에 매년 보내게 되었던 것이다.
중국에서는 영광 굴비를 별미로 여겼으며, 고려 조정에서 보낼 때 한문으로 고기 이름대로 石魚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이후 영광 굴비는 상감께 진상되는 고기라 하여 유명했던 것이다.(광주일보 1976. 7.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