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사는 세상/옥당골로 찾아들어

구호동(九虎洞)

돗가비 2009. 8. 21. 11:19

구호동(九虎洞)(백수읍 길용리)

원불교(圓佛敎)에서 대종사(大宗師)라 부르는 교조(敎
祖) 박중빈(朴重彬)은 1891년 5월 5일 백수읍(白岫邑) 길용리(吉龍里)에서 박회경(朴晦傾)과 유정천(劉定天)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26세 나던 1916년 이곳 노루목에서 도를 깨쳐 1924년 전북(全北) 익산군(益山郡) 북일면(北一面) 신용리(新龍里)로 옮겨 본부(本部)를 정하고 포교를 하다가 광복직전인 1943년 6월 1일에 53세로 죽었다.

길용리(吉龍里)는 보통 구호동(九虎洞)이라 하거니와
이같은 지명은 구수산(九岫山)(375m)에서 뻗어내린 9개 지맥이 호랑이 형국으로, 중빈(重彬)이 대각(大覺)을 했다는 노루목의 노루 한 마리를 잡아 먹기 위해 아홉 마리나 달려가고 있는 골짜기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인걸은 그가 태어난 자연경관(自然景觀)의 영향을 받
는다 하거니와 길용리(吉龍里)는 명산다운 산은 없지만, 옥녀봉(玉女奉)이란 기이한 봉(奉)이 있어서 영택

(靈宅)으로는 명지(名地)로 알려진 곳이다. 원래 길용리(吉龍里)는 7개 자연부락을 합해 부르는 행정구역 지명으로 이 옥녀봉(玉女峰)은 영촌(靈村)이란 마을 뒤에 있는 해발 1백 40m 내외의 작은 산봉우리다.

이 옥녀봉(玉女峰)에 오르면 멀리 법성(法聖)이 북쪽
으로 보이고 이 법성(法聖) 앞바다가 마치 거울처럼 보여서 옛부터 천상(天上)의 옥녀(玉女)가 이 바다를 거울로 머리를 빗는 형국이라 말했다 하거니와 이 옥녀봉(玉女峰)은 마치 여자의 낭자처럼 보인다.

중빈(重彬)은 옥녀봉(玉女峰) 밑 1백m 거리에 있는 영
촌(靈村) 출신인데 그의 선대에는 밭 4천여평, 논 1천여평을 벌어 중농(中農)에 속했다고 할 수 있겠다. 이 영촌(靈村)은 중빈(重彬)이 열살나던 해인 1900년 큰 홍수가 져 떠내려가 버렸지만 지금은 다시 16호가 산다. 중빈(重彬)은 이때 이곳에서 3백m 가량 위에 있는 마을인 구호동(九虎洞)으로 이사 가 살았다. 열한살 나던 해 10월 그는 아버지를 따라 군서면(郡西面) 마읍리(馬邑里) 북종산(北鍾山)(111m)에 있는 선산의 시향제에 따라 갔다. 선영의 묘에 젯상을 차리기전 묘에서 좀 떨어진 곳에 상을 차리고 산신제를 지내는 것을 보고 "왜 산신제를 먼저 지내느냐"고 물었다. 그의 아버지가 "산신은 이 산을 주재하는 신으로 할아버지 보다 더 능력이 잇는 신이므로 그런다."는 대답을 해 주자 그는 山에는 능력있는 산신(山神)이 있는 것으로 믿었다.

옛부터 삼두구미(三頭九尾)에 만인가활지지(萬人可活
之地)가 있다는 말이 전해왔다고 한다. 이상하게 백수(白岫)에는 용머리 등 머리라는 어귀가 든 지명이 세 개 있고, 구미(해안지명(海岸地名)의 고어(古語))라는 지명(地名)이 아홉 있었는데 오늘날의 구수리(九岫里)는 구시미고 그 옆이 모래미, 대신리(大新里)는 대치미가 변한 지명이며 이 부락(部落)곁에 백미가 있고, 백암리(栢岩里)는 동백구미가 변한 지명이다.

어려서부터 모든 사물에 의문을 품고 깊이 따지는 습
성이 있던 중빈(重彬)은 산신(山神)이 능력이 있다는 말을 들은 뒤 九수동에서 마을 서당을 다니다 팽개치고 그의 집에서 3km거리에 있는 개미절터라는 곳(일명 삼밭제)의 10여평 남짓한 마당바위를 찾아가 매일처럼 "산신님이여 나타나사 내게 가르침을 주소서"하고 빌기를 5년이나 계속했다. 그러나 산신령이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20세때 부터는 집을 다시 귀영바위로 옮겨 기도하다가 24세때 노루목이란 곳으로 옮겼다.

노루목이라는 곳은 길용리(吉龍里) 당산(堂山)으로,
그 뒷산의 생김새가 마치 노루가 엎드려 있는 형국이고 堂山이 머리에 속하는데 이 당산과 뒷산 사이가 목처럼 가느다랗게 생겨 사람들이 넘어 다니는 길목이다. 이 노루목은 중빈(重彬)의 대각(大覺)터다. 중빈(重彬)은 마을사람들로부터 "도통(道通)한다고 미쳐버렸다."는 비웃음을 받으며 이곳에 초막을 짓고 2년을 지내다 그이 나이 26세 나던 1916년 4월 28일 스스로 즉심시불(卽心是佛)의 원리를 터득했다고 한다. 道를 깨치고 그는 "물질(物質)이 개벽되니 정신(精神)을 개벽하자"고 외치며 동지를 규합, 그가 탄생했던 집에서 70여m 거리의 옥녀봉(玉女峰) 밑에 구문도실(九問道室)을 짓고 수도하면서 마을 밑 瓦탄川가에 간척사업을 벌였다.

동지 9명과 함께 1년만에 2만 6천여평의 간척지를 완
성하고, 1923년 지금 원불교령산(圓佛敎靈山)출장소가 있는 범현동으로 옮겨 영산원(靈山院)을 지었다.

이듬해에 그는 全北 익산군(益山郡)으로 옮겨 엿 행상과 척식회사 논을 소작하며 포교하다 1943년에 죽은 것이다. 이곳 영촌(靈村)을 중심으로 원불교(圓佛敎) 교조(敎祖) 박중빈(朴重彬)의 어린시절과 大 전후에 얽힌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다. 사람들은 중빈(重彬)은 옥녀봉(玉女峰)의 지기(地氣)를 받은 인물이고, 이곳을 만인(萬人)이 살 땅으로 만든 전설의 인물이라고 말하고 있다.

'함께 사는 세상 > 옥당골로 찾아들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동리  (0) 2009.08.21
왕자용 명당  (0) 2009.08.21
방고개  (0) 2009.08.21
헐루게재  (0) 2009.08.21
각시섬  (0) 2009.0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