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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화성

돗가비 2016. 6. 1. 21:57

160528. 화성을 한 바퀴 돌다.



정조가 그의 아버지의 묘를 수원으로 옮기면서 축조한 성으로 거중기, 녹로 등 신기재를 사용해 만들어졌다. 화성은 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으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있어 동양 성곽의 백미로 평가 받는다. 사적 제3호로 지정되었으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도 등재되었다.

면적 371,145㎡, 성곽 길이 약 5,744m, 높이 약 4.9∼6.2m


축성 당시 원형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수원 화성은 조선 제22대 왕 정조가 뒤주 속에서 불운하게 세상을 떠난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에서 풍수지리학상 명당 자리인 화산으로 이전하고 그 부근 주민들을 팔달산 아래 현재 수원으로 옮기면서 축성되었다.  
또한 화성은 임진왜란을 겪으며 그 필요를 절감한 수도 서울의 남쪽 방어기지로서의 역할뿐 아니라, 당쟁이 극심했던 정세를 쇄신하고 강력한 왕도정치를 실현하려는 정조 자신의 원대한 구상을 위한 새로운 개념의 계획적 신도시로 건설된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극진한 효심을 기반으로 군사, 정치, 행정적 목적까지 모두 충족시켜야 하는 화성의 건설에 당대 동서양의 과학과 기술의 성과가 총결집되었고, 단원 김홍도를 비롯한 예술가들, 번암 채제공과 실학의 거두 정약용을 포함한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 참여했다. 그 결과 화성은 근대 초기 성곽건축의 백미로 평가받고 있다.  
성벽의 외측을 쌓되 내측은 자연의 지세를 이용해 흙을 돋우어 메우는 외축내탁의 축성술, 실학사상의 영향을 받아 화강석과 벽돌을 함께 축성의 재료로 사용한 전석교축, 목재와 벽돌의 조화로운 사용, 거중기·활차()·녹로 등 근대적 기기의 발명과 사용 등 기능성과 과학성, 예술적인 아름다움까지 모두 갖추고 있어 조선 시대 절정의 문화적 역량을 보여주고 있다.

축성의 전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화성성역의궤」에 따라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홍수 등을 거치며 일부 파손되고 손실된 부분을 복원한 화성은 약 6km에 달하는 육중한 성벽을 따라 마흔 개 이상의 시설물을 갖추고 있다.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팔달문()과 화성의 북문이자 정문인 장안문()을 포함한 4대문, 화성행궁의 중심이자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의 회갑연을 치르기도 했던 봉수당(), 방화로 소실되었다 두 번 복원된 서장대(西), 남북으로 흐르는 수원천의 범람을 막아주는 동시에 방어적 기능까지 갖춘 북수문인 화홍문(), 망루와 포루의 역할을 동시에 하는 독특한 시설물인 공심돈(), 군사적 목적의 이름으로는 동북각루이지만 가장 아름다운 건물인 방화수류정(), 자체 방어시설까지 갖춘 봉수대인 봉돈, 샛문인 암문 등이 그 자태를 뽐내고 있다. 수원시는 매년 10월 화성문화제를 개최해 정조의 효심과 화성을 기리고 있다.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3호로 지정되었으며,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도 등재되었다. 2016년 1월 수원화성 일대 약 1.83㎢가 관광특구로 지정되었다.



동장대(연무대).

장대란 성곽 일대를 한눈에 바라보며 화성에 머물던 장용외영 군사들을 지휘하던 지휘소이다. 화성에는 서장대와 동장대 두 곳이 있다. 동장대는 1795년(정조 19) 7월 15일 공사를 시작하여 8월 25일 완공되었다. 무예를 수련하는 공간이었기에 연무대(鍊武臺)라고 하였다.이곳의 지형은 높지 않지만 사방이 트여 있고 등성이가 솟아 있어서 화성의 동쪽에서 성 안을 살펴보기에 가장 좋은 곳이다.

바로 뒤가 동북노대, 더 멀리 동북공심돈.

노대는 성 가운데서 다연발 활인 쇠뇌를 쏘기 위하여 높게 지은 것으로서 화성에는 서노대와 동북노대 두 곳이 있다. 동북노대는 창룡문과 동북공심돈의 중간에 동북향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반달 모양의 담장으로 보호하고 있다.

공심돈은 성곽 주위와 비상시에 적의 동향을 살피기 위한 망루와 같은 것으로 화성에서 처음 등장하였다. 화성에는 서북공심돈·남공심돈·동북공심돈이 있다. 동북공심돈은 1796년(정조 20) 7월 19일 완성되었다. 형태는 커다란 둥근 원의 모습으로 화성 성곽내에서 가장 특징이 있는 건물의 하나이다. 동북공심돈 내부는 소라처럼 생긴 나선형의 벽돌 계단을 통해서 꼭대기에 오르게 되어 있어 일명 ‘소라각’이라고도 불린다.

창룡문.

창룡문은 화성의 4대문 중 동쪽 문으로 1795년(정조19) 5월 8일 공사를 시작하여 10월 17일 마쳤다. 창룡은 곧 청룡으로 풍수지리상 좌청룡이며 동쪽을 의미한다.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옹성을 반달모양으로 쌓았는데 장안문, 팔달문과 달리 한쪽을 열어놓았다. 옹성 안 홍예문 좌측 석벽에는 공사를 담당하였던 사람과 책임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창룡문의 건물 내부에 박혀 있는 쇠못. 대체 이 쇠못의 용도는 뭘까?

동포루.

동포루는 화성의 5개 포루(砲樓) 중 동쪽 동일치와 동이치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1796년(정조 20) 7월 16일 완공되었다. 포루는 성벽의 일부를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만든 치성 위에 3층의 내부를 비워두고 그 안에서 화포공격을 할 수 있도록 만든 시설물이다.

봉돈.

봉돈에서는 밤에는 불을 피워 소식을 전했고, 낮에는 연기로 위급한 소식을 알렸어요. 불이나 연기의 숫자에 따라 위급한 정도와 내용이 달랐습니다. 봉돈 하나에서 연기가 나면 이상이 없다는 것이고, 2개는 적군이 나타났다는 것을 뜻. 3개는 적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뜻하고, 4개는 적이 안으로 들어온 것을 뜻하고, 5개 모두에서 연기가 나면 전투가 벌어졌다는 뜻이라네요.


동이포루.

포루(舖樓)는 성곽을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만든 치성 위에 지은 목조건물이며 군사들이 망을 보면서 대기하는 곳이다. 동이포루는 화성의 5개 포루 중 동쪽에 위치하며 1796년(정조 20) 7월 3일에 완공되었다. 평탄하고 넓은 지형에 위치하고 있으며 봉돈을 방어하기 위하여 설치하였다.


동남각루.

각루는 성곽의 비교적 높은 위치에 세워져 주변을 감시하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건물이다. 비상시 각 방면의 군사지휘소 역할도 하였다. 동남각루는 화성의 4개 각루 중 성 안팎의 시야가 가장 넓은 곳이다. 남수문 방면의 방어를 위하여 남공심돈과 마주보며 군사를 지휘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남수문.

남수문은 수원천이 화홍문에서 남쪽으로 흘러 내려와 성곽과 다시 만나는 지점에 만든 수문이다. 수원천 하류 수량증가에 대비하여 9개의 홍예수문으로 되어 있으며 수문 위에는 성밖 적들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한 포사가 세워져 있어 비상시에는 군사들이 대기하거나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남수문 복원을 위해 지난 2004년 남수문터에 대한 발굴조사에 나섰고, 2012년 6월 복원을 완료하였다.


팔달문 앞을 지나가는 행차 대열.

팔달문.

팔달문은 화성의 4대문 중 남쪽 문으로 남쪽에서 수원으로 진입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정조대왕과 당대 국왕들이 현륭원을 가기 위해 이곳을 통과했다고 한다. 1794년(정조 18) 2월 28일 공사를 시작하여 9월 15일에 완공하였다. 팔달문은 모든 곳으로 통한다는 '사통팔달'에서 비롯한 이름이며 축성 당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보물 제402호로 지정되었다. 성문의 바깥에는 반달모양의 옹성을 쌓았는데 이것은 항아리를 반으로 쪼갠 것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성문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서장대에서 내려다 보이는 화성

화성장대(서장대).

장대란 성곽 일대를 한눈에 바라보며 화성에 주둔했던 장용외영 군사들을 지휘하던 지휘소이다. 화성에는 서장대와 동장대 두 곳이 있다. 서장대는 팔달산 정상에 있으며 ‘화성장대(華城將臺)’란 편액은 정조가 친히 쓴 것이다. 1794년(정조 18) 8월 11일 공사를 시작하여 9월 29일 완성되었다. 정조는 1795년(정조 19) 윤2월 12일 현륭원(융릉) 참배를 마치고 서장대에 올라 성을 수비하고 공격하는 주간훈련과 야간훈련을 직접 지휘하였다.

서장대에서 보는 화성행궁.

서노대.

노대는 성 가운데서 다연발 활인 쇠뇌를 쏘기 위하여 높게 지은 시설이다. 화성에는 서노대와 동북노대가 두 곳이 있다. 서노대는 팔달산 정상에 위치하여 사방을 볼 수 있으며 정팔각형 평면이며 기와 벽돌로 쌓았다.


화성을 돌면서...

화서문.

화서문은 화성의 4대문 중 서쪽 대문이다. 1795년(정조 19) 7월 21일 공사를 시작하여 1796년(정조 20) 1월 8일 마쳤다. 화성 서쪽의 남양만과 서해안 방면으로 연결되는 통로 역할을 하였다.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보물 제403호로 지정되었다. 편액은 초대 화성유수였던 채제공(蔡濟恭)이 썼으며 옹성 안 홍예문 좌측 석벽에는 성문공사를 담당하였던 사람과 책임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북서포루.

북서포루는 화성의 5개 포루(砲樓) 중 하나이다. 화서문과 장안문 사이에 위치하며 1794년(정조 18) 9월 24일 완공되었다. 포루는 성벽의 일부를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만든 치성 위에 3층의 내부를 비워두고 그 안에서 화포공격을 할 수 있도록 만든 시설물이다.




장안문.

장안문은 화성의 4대문 중 북쪽 문으로 수원화성의 정문이다. 1794년(정조 18) 2월 28일 공사를 시작하여 9월 5일 마쳤다. 장안이라는 말은 수도를 상징하는 말이자 백성들의 안녕을 의미한다. 장안문은 우진각 지붕(지붕면이 사방으로 경사지게 되어있는 형태)으로 규모가 웅장하다. 성문의 바깥에는 반달모양의 옹성을 쌓았는데 이것은 항아리를 반으로 쪼갠 것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성문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북동적대에 거치된 홍이포.

홍이포는 명나라 말부터 청나라 때까지 사용된 유럽식 화포로 포구쪽에서 화약과 포탄을 장전하여 발사하는 포구장전식 화포이며 사정거리가 700m에 달하는 위력적인 화기로써 성곽 또는 포루 등에 배치하거나 성곽 공격용으로 사용하였다.



북동적대.

적대는 성문을 공격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성문 좌우 옆에 있는 치성 위에 세운 시설이다. 4대문 중 장안문과 팔달문 양쪽에만 설치하였다. 장안문의 동쪽에 위치한 북동적대의 높이는 성벽과 같다. 치성 밖 아래쪽에 3개의 현안(위아래로 길게 낸 구멍)을 만들어 성 아래 가까이 다가온 적들의 동태를 살피고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북동포루.

화홍문(북수문).

화성을 남북으로 가로질러 흐르는 수원천 위에는 북수문과 남수문 두 개의 수문이 있다. 북수문은 1794년(정조 18) 2월 28일 공사를 시작하여 1795년(정조 19) 1월 13일에 완성되었다. 별칭은 화홍문으로 화(華)자는 화성을 의미하고, 홍(虹)자는 무지개를 뜻한다. 장쾌한 물보라가 수문으로 넘쳐나는 모습이 아름다운 곳이다. 

북암문.

암문은 성곽의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적이 알지 못하도록 만든 출입구이다. 사람이나 가축이 통과하고 군수품을 조달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화성의 5개의 암문 중에서 북암문은 방화수류정과 동북포루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화성에서 유일하게 벽돌로 좌우 성벽을 쌓았으며 1796년(정조 20) 3월 27일 완공되었다.

동북각루(방화수류정).

방화수류정은 1794년(정조 18) 10월 19일 완공되었다. 주변을 감시하고 군사를 지휘하는 지휘소와 주변 자연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정자의 기능을 함께 지니고 있다.“꽃을 찾고 버들을 따라 노닌다(訪花隨柳)”라는 뜻을 지닌 방화수류정은 독특한 평면과 지붕형태때문에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화성에서 가장 뛰어나며 다른 성곽에서는 볼 수 없는 독창적인 건축물로 평가되고 있다. 

방화수류정과 성곽.

동북포루.

포루(舖樓)는 성벽의 일부를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만든 치성 위에 지은 목조건물이며 군사들이 망을 보면서 대기하는 곳이다. 동북포루는 화성의 5개 포루 중 하나로 1796년(정조 20) 5월 15일 완공되었다. 이곳의 지형은 주변보다 높아서 동암문과 동장대, 북암문과 방화수류정까지 바라볼 수 있다.

동장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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