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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릉

돗가비 2013. 8. 24. 19:26

130824.

광릉 홈페이지의 힘을 빌려 알아 본다. 

 

능호 : 광릉(조선 제 7대 임금 세조의 능)

위치 : 경기도 남양주시 진전읍 부평리 산100-1

지정번호 : 사적 제197호

조성시기 : 1468년(예종 1)

능의구성

광릉은 같은 산줄기에 좌우 언덕을 달리하여 왕과 왕비를 각각 따로 봉안하고 두 능의 중간 지점에 하나의 정자각을 세우는 형식인 동원이강(同原異岡)릉으로서, 이러한 형태의 능으로는 최초로 조영되었다. 좌측 능선의 봉분이 세조의 능이며 오른쪽의 봉분이 정희왕후의 능이다. 광릉은 다른 왕릉에 비해 간소하게 조영되었다.

세조는 “내가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석실과 석곽을 사용하지 말 것이며, 병풍석을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세조의 유언에 따라 이전까지 석실로 되어 있던 능을 회격(灰隔)으로 바꾸어 부역 인원을 반으로 줄이고 비용을 절감하였다. 또한 봉분 주위에 둘렀던 병풍석을 없애면서 병풍석에 새겼던 십이지신상은 난간의 동자석주에 옮겨 새기는 등의 상설 제도를 개혁하였다. 능하구역에는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르는 참도가 생략되어 있다. 이렇게 간소하게 개혁된 상설제도는 이후의 왕릉 조성에 모범이 되었다.

능의역사

세조의 능은 서울로부터 다소 떨어지고 골이 깊은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에 있다. 광릉자리는 원래 다른 이의 묘자리였으나 풍수상 길지라 하여 묘자리의 주인이 세조에게 바쳤다고 전해지며 일부 풍수가들은 세조의 광릉 자리가 좋아 조선 500여 년을 세조의 후손들이 통치하였다고 전하기도 한다.

1468년(예종 즉위) 11월 28일 주엽산 아래 세조를 예장하고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1483년(성종 14) 3월 30일 정희왕후가 승하하자 같은 해 6월 12일 광릉 동쪽 언덕에 예장하였다.

 

7대 세조(世祖)는 누구인가?

생몰년도 : 1417년 ~ 1468년

재위기간 : 1455년 ~ 1468년

생애이야기

세조는 세종과 소헌왕후 사이에서 1417년(태종 17) 9월 29일 태어났다. 타고난 자질이 영특하고 명민하여 학문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무예에도 뛰어났다고 전한다. 대군 시절, 세종의 명을 받아 불교 서적 번역을 관장하고, 향악의 악보 정리에도 힘을 쏟았으며, 1452년(문종 2) 관습도감 도제조에 임명되어 국가의 실무를 맡아보기도 했다.

문종이 승하하고 나이어린 조카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그는 측근인 권람, 한명회 등과 결탁하여 1453년(단종 1) 10월 계유정난을 일으켜 조선 7대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왕권의 강화를 위하여 의정부 서사제를 폐지하고 전제왕권제에 가까운 육조직계제를 단행했으며, 집현전을 폐지하고 경연을 없앴다. 왕명 출납 기능이 있는 승정원을 강화시키고, 호패법을 복원하였으며, 군제 정비에도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세조는 이와 같은 많은 치적을 세워 조선 초기 왕권 확립에 크게 공헌했다. 그러나 사육신으로 불리는 집현전 학사 출신 관료들이 단종 복위를 계획한 사건이 발각되자 이들을 모두 살해하였을 뿐 아니라 선왕이자 조카인 단종을 유배지에서 죽이는 등 수많은 정적의 피를 보았다.

 

‘능 수호군’으로 이속된 광릉 인근 마을 주민

『예종실록』 1469년(예종 1) 8월 13일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호조(戶曹)에서 아뢰기를,

“일찍이 경기의 광주, 지평, 양근, 가평, 포천, 영평, 양주, 적성, 마전, 삭녕, 장단 등 여러 고을에서 유이(流移)한 백성들을 본 고을로 돌려보낸 뒤에 복호(復戶)하되, 포천현(抱川縣)의 백성은 광릉(光陵)의 수호군(守護軍)으로 이속시키고 경작하는 땅에 대한 공부(貢賦)를 감해 줄 것을 의논하여 아뢰라고 명하셨습니다.

청컨대, 제도 관찰사로 하여금 쇄환(刷還)하고 계문(啓聞)하게 한 뒤에 3년 동안 복호하고, 그 전지(田地)는 연한(年限)에 구애하지 말고 도로 주어서 생업에 안정되게 하소서. 포천 백성으로서 지금 광릉의 수호군으로 소속된 자 28인에게는, 청컨대 경작하는 땅의 공부(貢賦)를 감해 주소서. 양주 백성으로서 수호군으로 소속된 자 42인의 공부도 포천의 예(例)에 따라 견감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위의 기록처럼 조선시대 왕릉 인근 마을의 사람들에게는 왕릉을 관리하는 책무가 부여되었다. 적게는 수십 명에서 많게는 수백 명에 이르는 주민들이 왕릉의 수호군이 되어 매일 조를 짜서 왕릉 주위를 순찰하였다. 왕릉을 둘러싼 산림의 병충해 피해가 심각하면 인근 주민들이 능 부근의 20리 까지 직접 손으로 벌레를 잡아 없앴다. 이들을 총괄 감독하는 것은 종9품 관리인 능참봉이었다.

 

능, 원, 묘의 차이

조선 왕릉은 크게 세 종류로 구분된다.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된 왕과 왕비의 무덤을 능(陵)이라 하고,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 : 종실로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임금의 생가 어버이)의 무덤을 원(園)이라 하며,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궁의 자식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와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의 무덤을 묘(墓)라 일컫는다. 광릉이 자리 잡고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에는 세조의 능인 광릉 이외에 2기의 원이 더 있다. 휘경원과 순강원이 그것이다.

 

너무나 복잡해서 이해하는데 힘이 든다.

재실 출입문.

재실.

광릉 입구의 하마비. 누구라도 저 곳에 말을 타고 갈 염두가 없었겠죠.

정자각. 제사를 행하던 곳이겠죠.

비각.

세조릉

정희왕후릉.

제향일에 제사 지낼때의 제수진설도.

정희왕후릉

광릉은 홀수일에는 세조릉, 짝수일에는 정후왕후릉을 관람할 수 있다.

무인석과 문인석.

 

 

정희왕후릉에서 바라다 본 전경.

신위평상. 제사 지낼때 혼이 머무는 자리라네요.

사뭇 아쉬워서 줌을 최대한 당겨 본 세조릉.

정자각 옆의 수라간. 저곳에서 제사 음식을 만들었겠죠.

광릉을 오르는 길에는 몇 년전의 곤파스 태풍의 피해를 고스란히 입어 엄청난 크기의 나무들이 쓰러졌다네요.

고목 그루터기.

세상은 한순간도 제자리에 머무는 순간이 없답니다. 돌고도는 게 세상. 아름드리 나무가 넘어지고 그 나무덕분에 버섯이 자라고 풀이 자라고 벌레가 숨을 집을 만들어주겠죠. 그리고 다시 그 거름을 먹고 나무는 자라고 고목이 되고 다시 쓰러지고 이래서 윤회설이 있는거죠. 지금 이 순간을 잘 살아라.

정말 엄청난 크기의 나무들었겠다 싶어요.

쓰러지고 베어진 나무들이 너무 멋있어요.

구경을 마치고 내려오는 길에 광릉관리사무소 직원분이 약수터에 가면 두꺼비가 있다고 보고 가라고 하는 데 그냥 내려왔네요.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꼭 봐야겠습니다. 기왕이면 재물을 모이게 해준다는 금두꺼비라면 더 좋겠네요.

천하의 명당이라는 광릉에 두꺼비라 왠지 보기만 해도 복을 받을것 같은 기분인데 아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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