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걷는 인생/팔도명산들어가기

구수산(영광 백수)

돗가비 2016. 4. 23. 08:54

160209. 맑음.

설 명절에 다녀옴. 산은 낮은 편이나 걷자면 종일을 걸어야 하는 능선이 아주 긴 산으로 백수해안도로를 옆에 두고 걸어가는 능선에서 보는 일몰을 유명하다.

법성면소재지와 대덕산이라고 하는 작은 산. 어려서 소풍가던 대덕산에 있는 은선암이라는 작은 암자에서 내려다 보는 전망이 아주 일품이었더랬는데...지금은 법성포구를 다 간척사업으로 메꿔 버리고 법성포항은 외곽으로 밀려나가 있는 형국이라 어떤 모습일지 잘 모르겠다.

구수산 정상. 굴수산이라고 불렀던 기억도...올라가면서는 멧돼지 발자국에 놀라기도 하고, 응달엔 눈이 얼어 미끄럽기도하고 했다. 법성과 백수를 잇는 와탄천을 막은 하구언 근처에 국제마음훈련원이란 곳에 주차를 하고 임도를 따라 올라 갔다. 힘들일 곳은 없고 산책하는 마음으로 가볍게 오르면 된다.

앞에 바위봉우리가 원불교 일원상이 그려져 있는 수정봉이고, 오른쪽으로 멀리 영광읍내가 살짝 모습을 보여주고, 와탄천 물길따라 들판 너머에 내가 태어난 동네가 보인다.

정관평방언조합제명바위

원불교의 성지인 영광 백수 길룡리 앞 바다를 메우고 농지로 만들었다는 내용의 기념비. 원불교를 창시한 박중빈대종사가 주도하여 일으킨 대공사로 당시로서는 주변을 변화시킨 큰 사업이었다.


[원불교와 불교]

원불교는 그 연원을 불법에 두고 있으며, 시대에 맞는 새로운 불교이다. 그러나 외면상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차이는 신앙 대상의 상징이 다르며, 불교와의 역사적 교섭관계가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교단의 운영방식과 제도면에서도 종래의 사찰제도와는 다르게 운영되고 있다.

즉 근본적 진리는 서로 상통하나, 교단은 기존 불교의 분파적 입장이 아니다. 창조·모방·개혁을 시도하는 새로운 교단으로 볼 수 있다. 소태산은 불법을 주체로 삼아 새 종교를 주창하였는데, 그가 깨달은 일원상의 진리, 즉 법신불(法身佛)사상을 주체로 하고, 모든 종교의 장점을 취하여 시대화·생활화·대중화의 개혁을 시도한 것이다.

시대화란 어느 시대에 처하든지 불법을 그 시대에 맞게 구현하자는 것을 말한다. 시대적 변화에 잘 동화하면서도 높은 차원으로 사람들을 지도해나갈 수 있도록 불법을 응용하자는 뜻이다. 생활화란 생활 속에서 불법(佛法)을 찾고 깨달아서 그 불법으로 새 생활을 개척해 나가자는 것이다.

대중화란 민중화, 서민화 또는 시민화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특수한 계층을 위한 불교가 아니라 누구나 다 같이 보람을 찾을 수 있도록 국한 없이 불법을 구현하자는 것이다. 원불교는 정신개벽(精神開闢)을 표방하고 있다. 다른 기성종교와는 달리 우리 나라에서 발생된 종교로서 후천개벽의 이념과 그 맥(脈)을 같이하고 있다.

최제우(崔濟愚)·강일순(姜一淳) 이후 또 하나의 민중종교를 탄생시킨 소태산은, 앞으로의 세계는 동방이 중심이 되어 발전해가며, 특히 우리 나라가 그 중심국가가 될 것을 예견하였다.

‘정신의 지도국’·‘도덕의 부모국’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인류 보편윤리에 입각한 민족정기(民族精氣)를 되살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인정신을 길러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원불교는 다만 불교의 혁신에 그치지 않고 기성종교에 대하여 새종교의 출범이라 말할 수 있다.

[원불교의 창교]

소태산은 그가 태어난 고향을 떠나지 아니하고 구도(求道)하였으며 그곳에서 도를 이루었다. 또한 그가 창교이념을 실현한 곳도 고향이었다.

그는 1917년 고향에서 뜻 있는 동지들을 모아 저축조합을 조직하여, 근검절약과 허례폐지, 금주·금연과 숯장사라는 제1차 시련으로 경제적 기초를 세우고, 1918년 3월에는 조상 대대로 버려 둔 해변의 갯벌에 자력으로 방언공사(防堰工事)를 시작하여 제2차 시련을 감행하여 1년만에 2만 6,000평의 옥답을 개간하였다.

그 당시 쓰러져 가는 한민족 국가 사회에 생산기반을 조성하는 역할을 하였다. 원불교의 창립정신은 공익의 길로 나아가고자 함이었으며, 사람들을 모아서 일심합력으로 나아가면 장차 어떠한 큰 일이라도 이룰 수 있다는 신념을 기르기 위한 것이었다.

3·1운동이 한창이던 1919년 3월 소태산은 제2차 시련을 거친 제자들을 이끌고 새로운 회상(會上) 창립을 위하여 제3차 시련에 들어갔다. 소태산은 8인의 제자들을 이끌고 산상기도에 들어갔다. 그 해 8월 21일 마침내 백지혈인(白指血印)의 이적(異蹟)이 나타났다. 기도를 마칠 무렵, 흰 종이에 맨손으로 인장을 찍자 혈인이 나타난 사건이다.

소태산은 “무아봉공(無我奉公)의 참뜻이 법계(法界)의 인증을 받았으니 만사는 이로부터 비롯되었도다”라고 말하며, 이 백지혈인의 기적은 진리로부터 새 회상의 창립을 인가 받은 것으로 해석하였다.

소태산은 방언공사와 산상기도를 통하여 교단창립의 기초를 다진 것이었으며, 소태산과 그의 제자들은 그의 탄생지인 길룡리를 토대로 또 다시 회상 공개의 준비에 들어갔다. 도와 학이 겸비된 수제자 송규(宋奎)를 얻은 후 교법의 틀을 짜 갔다.

한편 1924년 4월 전북 익산군 북일면 신룡리(지금의 원불교중앙총부)에 총부를 건설하려고, 「불법연구회」라는 임시 명칭으로 교문(敎門)을 열었다. 여기에서도 그는 제자들과 6만여 평의 황무지를 개간하는 한편, 주경야독의 생활로 오늘의 원불교 터전을 닦아나갔다. 이 과정이야말로 원불교 창립의 제4차 시련이었다.

소태산은 당시 모여든 인재들을 정기훈련법과 상시훈련법을 제정하여 훈련, 육성시켰다. 낮에는 농업부에서 개간과 생산의욕에 불타게 하고, 밤에는 소태산의 직접 설교와 훈도로 새 회상 건설의 희망에 부풀게 하였다. 여기에서 바로 소태산이 실현하려고 한 ‘진리적 종교의 신앙과 사실적 도덕의 훈련’이 된 것이다.

동정일여(動靜一如)·영육쌍전(靈肉雙全)·이사병행(理事竝行)의 실천이기도 하였다. 원불교의 이러한 개척정신과 훈련방식은, 여기에 참여한 사람이면 그 누구나 근면하고 성실한 지도자가 되도록 한 것이었다.

1926년에는 민중의 생활의식을 개혁할 방침으로 신정의례준칙(新定儀禮準則)을 발표하고, 종래의 생활의식에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는 사상을 널리 선양하였다. 1935년에는 산업기관으로 약업사 보화당(普和堂)을 개설하고, 교역자의 손으로 이를 운영하게 함으로써 생산성 있는 종교, 자력생활하는 종교의 터전을 닦아나갔다.

1940년에는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면 수계리에 대농장을 건설하였다. 이는 원불교 창립의 제5차 시련 작업이었다. 과수원과 축산업을 겸한 새로운 영농방식에 착수하여, 명실공히 산업종교의 면모를 갖춘 것이다.

소태산은 교단의 사업목표를 교화·교육·자선에 두고, 차츰 이를 추진해나갈 기관을 확장해나간 것이다. 「원불교」란 교명은 해방을 맞이하고 소태산의 유시에 의하여 제2대 종법사인 정산 송규가 개칭한 것이었으며, 1947년 4월에 재단법인 원불교의 등록을 필한 후 공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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