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116.
이래저래 서울의 길을 걸어 봤다. 이제 마무리하는 날이다. 혜화문(동소문)의 길 건너편을 올라서면 성곽이 잘 다듬어진 곳이 있다. 남아 있는 단풍이 성곽과 어우러져 한층 멋을 부린다. 그곳 성곽을 따라 걷는 길은 낙산이라는 낮은 산이다. 구릉이라고 해도 될 낮은 산이다. 하지만 낙산을 만만하게 보지는 마라. 아래에 소개한 많은 글만큼이나 유명세를 가지고 있던 산이 낙산이다. 지금은 주택이 파고 들어와 볼품없지만 명성이 조선시대에는 대단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그래서 낙산에 대한 소개는 아래 다른 글들로 대신하려고 한다.
혜화문부터 낙산공원 놀이광장까지의 순성길은 약1.5km로 주택가와 성곽 사잇길로 중간중간에 의자에서 잠깐 쉴 수도 있고 앉아서 서울시내 곳곳을 내려다 볼 수도 있다.
낙산의 전해오는 이야기
산의 모습이 낙타 등처럼 볼록하게 솟았다고 하여 낙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풍수지리상 서울의 형국의 구성하던 내사산(內四山)의 하나로, 주산인 북악산의 좌청룡에 해당한다.
옛날 도성 5대 명승지에 이름을 올린 낙산은 조선시대 때 문인들이 별장을 짓고 살 만큼 풍광이 아름답기로 널리 알려져 왔다.
조선 명종 때 풍수지리가 남사고의 말도 들어볼 만하다.
남사고는 “서울의 동쪽 낙산( 동숭동 뒤쪽 이화여대 대학병원 쪽으로 흘러내리는 산)과 서쪽의 안산( 인왕산)이 서로 대치하는 형세를 취하고 있다”고 풀이했다.
이로 인해 조정이 당파를 지어 동서로 나뉘는데 동쪽 낙산의 낙(駱)자를 풀면 각마(各馬)가 되므로 동인은 갈라지게 되고 서쪽 안산의 안(鞍)자는 풀면 혁안(革安)이 되므로 서인은 혁명을 일으킨 후에야 안전하게 된다는 것이다.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었고 서인은 인조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이후 비로소 안정됐으니 글자 풀이가 절묘하게 맞은 셈이다.
조선왕조의 적장자 세습을 힘들게 한 <낙산(駱山)>
분명 산은 산이로되 해발 125미터의 낮은 산이라 등산한다고 말하기 민망할 정도이다. 이 산은 그 모양이 낙타와 같이 생겼다 하여 낙타산(駱駝山), 타락산(駝駱山)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리고 낙산성곽 바로 옆에 위치한 마을이름은 마을주민의 65%가 65세 이상이라 '장수마을'로 불린다. 이곳은 일제시대를 거쳐 6.25 전쟁 시기 피난을 다니던 사람들과 농촌을 떠나 도시로 돈을 벌러 왔던 빈민들이 정착하면서 구릉지형이었던 삼선동에 집을 지어 살기 시작한 곳이다. 주민들의 기본 거주기간이 40년 이상이라 마을공동체가 다른 곳보다 잘 발달되어있다고 하니 비탈진 언덕, 좁은 골목길 등이 달동네를 연상시키지만 왠지 정겹게 느껴지는 곳이다.
경복궁은 좌청룡, 우백호로 낙산과 인왕산을 거느리고 있다. 그런데 풍수지리에 따르면 좌청룡은 장남을 상징하며, 우백호는 차남을 상징한다. 하지만 장남에 해당하는 좌청룡 낙산이 낮고, 차남에 해당하는 우백호 인왕산이 높고 험준한 까닭에 조선왕조는 적장자(정실부인이 낳은 맏아들) 세습이 드물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실제적으로 26번 있었던 왕위계승에서 적장자로 순탄하게 계승된 경우는 단 여섯 명에 불과하다. 그 여섯 명은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이다. 고종과 명성황후 사이에서 태어난 27대 임금 순종의 경우도 엄밀한 의미에서 적장자는 아니다. 그 위에 형이 태어난 지 5일 만에 죽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여섯 명의 임금조차도 숙종을 제외하고는 일찍 죽거나 반정으로 폐위되는 등 이들이 임금으로 재위한 기간은 그리 길지 않다.
한양천도를 결정하고 도성을 지으며 무학대사가 인왕산을 주산으로 정할 것을 주장한 것도 이러한 백악주산론의 약점을 걱정했기 때문이란 말이 전한다. 만일 인왕산이 한양도성의 주산이 되었다면 좌청룡이 되는 백악이 우백호가 되는 남산보다 더 높기 때문에 조선왕조의 장자세습이 순탄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역사에서 '가정이란 없다'고 하지만 이런 풍수지리설에 의한 해석을 접하고 있노라면 흥미롭다는 사실을 감출 수 없다.
조선의 명승지<쌍계(雙鷄)>와 신선이 내려온 <삼선평(三仙坪)>
낙산 정상에서 성안으로 바로 아래 동숭동과 이화동이 있는데, 이곳의 옛 지명은 쌍계동(雙鷄洞)으로 기묘한 암석과 울창한 수림에 두 줄기의 맑은 시냇물이 흐르던 곳이다. 그리하여 조선시대 이곳 쌍계(雙鷄)는 삼청(三淸)·인왕(仁王)·백운(白雲)·청학(淸鶴)과 함께 한양의 5대 명승을 이루었다. 그리고 현재 이화동(梨花洞)이란 명칭은 쌍계 이곳에 '이화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던 데서 유래하는 것이다.
이런 자연경치뿐 아니라 조선은 한양도성을 구축하면서 새 도읍의 동쪽, 즉 해가 뜨면 제일 먼저 햇살이 비치는 아늑한 이 일대에 만년대계의 가르침과 배움의 터전을 잡고자 최고교육기관이었던 성균관을 위치시켰으며 그 주변인 현재의 명륜동과 혜화동일대를 '가르침을 높이 여긴다'라는 뜻으로 '숭교방(崇敎坊)'이라 이름 지었다. 참고로 현재의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을 아우르고 있는 동숭동(東崇洞) 은 '숭교방의 동쪽에 있는 동'이라는 뜻으로 지어진 동명이다.
이러한 조선의 교육철학은 지명에서도 그대로 들어난다. 그리하여 성균관이 자리한 곳으로부터 종로 4가, 5가에 이르는 길가의 지명도 하나같이 충(忠), 효(孝),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을 따서 인의동(仁義洞), 예지동(禮智洞), 충신동(忠信洞), 효제동(孝悌洞)과 같은 이름을 붙임으로써 성균관에 이르는 거리 전체가 학문의 냄새가 물씬 풍기도록 하였다. 이로써 우리는 조선이 교육과 인재양성에 얼마나 역점을 두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성벽을 사이에 두고 동숭동과 맞보고 있는 삼선동(三仙洞)은 조선시대에 혜화문밖의 동소문동, 동선동일대의 평평한 들판을 삼선평(三仙坪)이라고 칭했기 때문에 연유된 이름인데, 앵두밭이 유명했던 삼선동은 남쪽 옥녀봉에서 옥녀가 하늘에서 내려온 세 명의 신선과 놀았다는 전설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성벽을 사이에 두고 성안에는 한양도성 5대 명소가운데 하나인 쌍계(雙鷄)라는 명승지가 위치해 있었으며, 성 밖에는 신선이 셋씩이나 내려와 조선의 처녀와 놀았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아름다운 곳이었을까 상상만 해도 아름답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이 저술된 곳, <비우당(庇雨堂)>
낙산공원 정상 마을버스 정거장에서 동쪽으로 차도를 따라 약 450미터쯤 가면 우측에 작은 초가집이 한 채 있다. 이곳은 광해군 6년(1614) 지봉 이수광이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는 《지봉유설》을 저술한 곳으로 알려진 <비우당>을 복원해 놓은 것이다.
비우당의 자리는 본래 조선 초 세종 때 유관이라는 정승이 살았던 오두막집 <우산각(雨山閣)>이 있었던 자리다. 유관은 태조부터 세종까지 4대에 걸쳐 총 35년간 정승을 지냈지만 울타리도 없는 작은 오두막집에 살았는데, 워낙 허름하여 비만 오면 천정에서 빗물이 떨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그러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비가 올 때마다 아내에게 한 말인 즉 "우산도 없는 집은 이 비를 어지 막을꼬?"이었다는 일화가 있다.
그 후 선조 때 유관의 4대 외손 되는 판서 이희검이 유관의 높은 뜻을 기려 이 집에 살았으며, 이 집을 조금 넓혔다. 하지만 혹여 누가 '소박한 집'이라고 말하면 이희검은 "우산에 비해 너무 사치스럽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처럼 이희검 역시 청빈하게 살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임진왜란을 겪은 뒤 폐허가 된 이 터에 이희검의 아들 이수광이 다시 집을 고쳐 짓고 살았는데, 이때 그는 '비를 근근이 가릴 수 있는 집'이란 의미로 <비우당(庇雨堂)>이란 당호를 달았다고 한다. 이런 일화를 보면 정말 '피는 못 속인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비우당 바로 뒤에는 <紫芝洞泉(자지동천)>란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있지만 건물에 가려져 쉽게 볼 수가 없다. 바로 이것은 단종 비 정순왕후 송 씨의 애련한 삶이 깃든 곳으로 또 다른 유적이다. 비우당은 지봉 이수광의 삶을 기리기 위하여 최근 복원된 것이다. 그것도 비우당의 본래 위치는 이곳 창신동이 아닌 저 아래 숭인동 5번지로 청룡사 남쪽 부근이다. 이곳으로부터 직경 약 300미터쯤 떨어진 곳이다. 그러니 좀 냉혹하게 말하자면 비우당이 복원된 곳은 그 위치도 전혀 다를 뿐만 아니라 '가짜'가 '진짜'를 가리고 있는 꼴이라 할 수 있다.
낙산일대, 단종 비 <정순왕후 송씨>의 수많은 흔적들
이수광의 <비우당>뒤에 정순왕후 송 씨가 염색한 옷을 말렸다는 <자주동샘>이 있듯이 이곳 동대문 밖 숭인동, 창신동일대는 정순왕후의 삶이 남긴 흔적이 꽤 많다. 이런 이유로 정순왕후 송 씨의 흔적을 따라가는 역사기행코스도 개발되어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유적인 생겼는지 알아보자.
조선 6대 임금 단종의 정비인 정순왕후 송 씨는 열다섯 살에 혼인해 열여덟에 남편 단종을 잃은 비운의 상징인 여인이다. 그것도 왕비의 신분에서 노비의 신분으로 전락한 채로 말이다. 서대문 김종서의 집터에서 보았듯이 세조의 계유정난으로 그의 남편 단종은 폐위되고 영월로 유배되었다. 이렇게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면서 단종과 정순왕후는 그 뒤 죽을 때까지 만나지 못하는 이별이 된 것이다.
단종과 마지막 헤어진 곳이 청계천의 <영도교>이다. 왕과 왕비의 이별을 지켜 본 백성들이 '영이별 다리', '영영 건넌 다리'라고 불렀고 그 뒤 성종이 나무다리를 헐고 돌다리로 신축한 다음 친히 '영도교(永渡橋)'라는 이름을 짓고 글씨를 써서 새기도록 했다. 하지만 이 다리는 흥선대원군시절 경복궁 중건 때 석재로 쓰여 사라지고 일부 돌만 남아 띄엄띄엄 징검다리처럼 있던 것이 일제강점기 때 콘크리트 다리로 변화되었지만 그것마저 청계천 복개공사로 완전히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그랬던 것이 2005년 청계천 복원공사 때 다시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 지금의 영도교이다.
또 1158년 고려 의종때 희종법사가 창건한 숭인동 청룡사에는 <우화루(雨花樓)>란 건물이 있다. 이곳은 단종과 정순왕후가 헤어지기 전 마지막 밤을 지새우던 곳이다. 여기서 둘이 이별을 앞두고 빗물처럼 쏟아지는 눈물을 흘린 곳이며, 그 눈물을 꽃비(雨花)에 비유하여 지어진 명칭인데 그 이름이 아름답고도 애절하기 그지없다. 그 후 사람들은 단종과 정순왕후가 '영원히 이별한 곳'이라 하여 <영리정(永離亭)>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한다.
이렇게 단종과 이별을 하고 정순왕후는 청룡사 정문 옆에 작은 초가집을 짓고 살았다. 이곳의 이름을 <정업원(淨業院)>이라 짓고 시녀 3명과 함께 살아 간 것이다. 이곳에는 한가할 때면 정순왕후와 세 시녀가 함께 두던 '고누놀이판'이 새겨진 바위가 1960년대까지도 있었지만 지금은 도시개발의 물결 속에 사라지고 없다. 이런 것을 보면 수백 년을 지켜 온 역사도 자본의 논리 속에서는 그야 말로 한 순간일 뿐이라는 생각에 '자본'이라는 것이 괴물처럼 느껴진다.
어쨌든, 원래 세조는 자기 질부 정순왕후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겨 성안에 집을 마련해주려 했지만 남편이 유배된 강원도 영월과 좀더 가까운 동대문밖에 살기를 원했다. 정업원 바로 옆 봉우리를 오르면 단종이 유배된 영월방향으로 동쪽이 훤히 보이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훗날 정순왕후가 죽고 250년이 지난 뒤 영조는 단종와 정순왕후의 애사(愛史)를 후대에 전하기 위해 정순왕후가 살았던 이곳에 '淨業院舊基(정업원구기:정업원 옛터)' 다섯 자를 어필로 써서 비석을 세워 주었다. 또 '동쪽을 바라보던 봉우리'라 하여 '東望峯(동망봉)' 세 자를 써서 정업원 맞은 편 산봉우리 바위에 새기게 하였다. 동망봉은 정순왕후가 매일같이 올라가서 단종이 있는 동쪽을 바라보며 통곡했던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뿐만 아니라 정업원구기의 현판 역시 영조의 어필이다. 현판은 지금도 보존되어 있으며,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前峰後巖於千萬年 - 앞 봉우리와 뒤 바위 천만 년을 가소서
歲辛卯九月六日飮涕書 - 신묘년 9월 6일 눈물을 머금고 쓰노라
하지만 영조의 어필이 새겨진 비석과 동망봉 바위는 일제강점기 때 이 일대가 채석장이 되면서 모두 사라지고 없다.
그리고 앞서 들른 <비우당> 뒤편 <자주동샘>도 사연이 깊다. 당시 정순왕후가 그의 생계를 이어가기 위하여 명주를 짜서 댕기, 저고리 깃, 옷고름, 끝동 등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팔았는데, 어느 날 이곳에 와서 명주를 빨았더니 자주색 물이 들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고 당시 자줏물이 든 명주를 널어 말리던 바위에는 '紫芝洞泉(자지동천)'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자지(紫芝)란 자줏빛을 띠는 풀이름을 말한다.
또 동대문 쪽으로 내려가 동묘에 가면 그 옆에 위치한 숭신초등학교 담장에 <여인시장> 터임을 알리는 표석이 있다. 이곳에서 여인들이 정순왕후를 돕기 위하여 채소시장을 연 것이라고 한다. 이것에 대하여 《한경지략》에 "영도교 인근에 정순왕후를 돕기 위해 마을 여인들이 금남(禁男)의 채소시장을 열었던 곳"이라고 전하고 있다. 끼니조차 제대로 이을 수 없었던 정순왕후에게 푸성귀 같은 먹을거리라도 전하기 위해 동네여인들이 시장을 만든 것이다. 지난 조선시대 여인들로 이루어진 장터가 이제는 주로 노인들이 찾는 '동묘벼룩시장'이 열리고 있어 그 느낌은 다르지만 여전히 장터로 남아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이렇듯 정순왕후는 단종에 대한 그리움과 힘겨운 생계를 이어가며 살아갔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가 죽기 얼마 전 중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의 묘를 찾아 봉분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라는 명을 내렸다. 하지만 정순왕후는 안타깝게도 남편 단종과 함께 묻히지는 못했다. 정순왕후의 무덤은 단종의 무덤과 떨어진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에 있다. 그래서 그의 무덤은 평생 남편을 생각하고(思) 그리워한 그녀의 일생에 맞게 사릉(思陵)이라 지어진 것이다.
죽어서도 만나지 못한 이처럼 애틋한 그리움으로 인하여 이곳 사릉에 심어진 소나무들은 하나같이 가지가 단종의 묘가 있는 동쪽으로 향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에 1999년 사릉에 심어져 있던 소나무 한 그루를 단종의 묘 장릉으로 옮겨 심고 이를 정령송(精靈松)이라 명명하였다. 사후 478년 만에 이렇게 소나무 한 그루를 통하여 단종과 정순왕후는 함께 있게 된 것이다.
위와 같은 역사적 사실은 흔히 드라마 소재로 적합하여 많이 애용되고 있다. 하지만 남편과 일찍 이별했다는 사실을 빼고 그녀를 바라본다면 또 다른 상상이 펼쳐진다. 정순왕후는 무척 장수해서 82세의 나이로 중종 16년 사망했다. 남편 단종은 요절했지만, 아내인 그는 묘하게도 조선 역대 왕후가운데 신정왕후 조 씨 다음으로 두 번째 장수한 왕후이다. 따라서 그녀는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 중종의 치세를 직접 보고 죽었다. 그리고 사망 직전, 당시 세자로 있던 인종은 정순왕후에게 먼 증손자뻘이 되니 만약 정순왕후가 노비로 전락하지 않고 왕비로 계속 있었다면 막후실세로 그녀 힘은 어마 어마했을 것이라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 말고도 또 다른 상상도 펼쳐진다. 우리가 앞서 인왕산 성곽을 넘어오며 보았던 '연산군을 폐위하고 중종을 왕위에 올린 중종반정'도 그녀는 직접 목격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그로 인하여 쫓겨난 중종의 첫 번째 부인 단경왕후 신 씨의 치마가 인왕산 치마바위에 걸리는 것도 보았을 것이다. 도성의 좌청룡 낙산에서는 단종 비 정순왕후가 동망봉에 올라 단종을 그리워했을 것이고, 우백호 인왕산 기슭에는 중종 비 단경왕후가 치마를 바위에 내걸고 경복궁에 있는 중종이 자신을 부르길 기다렸을 것이다. 그때 정순왕후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무척 궁금하다.
참고로 정순왕후는 역대 왕비 중 처음으로 '세자'가 아닌 '국왕'과 혼인한 왕비이기도 했다. 태조~세종까지는 잠저 시절에 혼인했다가 남편이 왕으로 즉위한 이후 왕비로 격상된 형태이며, 문종비 현덕왕후는 세자빈 때 사망하고 문종이 즉위한 이후 추증된 형태이기 때문이다.
혜화문에서 낙산으로 가는 길의 성곽과 단풍.
이화동 벽화마을.
낙산공원을 내려서면서 이화동 벽화마을로 들어서게 되는데 의외로 놀라게 된다. 우선은 외국관광객이 굉장히 많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이곳을 알고 지나가는 게 아니라서 뭐라 말할 수는 없다만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이곳도 서서히 상술에 젖어 들어가고 있다는 것이 눈에 보이더라는 것에 놀랍다. 어디간들 안 그러리요마는.
이화마을의 재활용쓰레기통.
그래도 재활용쓰레기통을 보면서 기분이 좋아지고 이 동네를 참 잘왔다하는 생각을 하게된다. 동네가 참 깨끗하고 조용해서 좋다는 생각이 든다. 일부에선 관광객들이 시끄럽게 해서 조용히 지나가 달라는 글을 써 붙여 놓기도 했지만.
이화동 벽화마을에서 나래를 펴다.
이런 저런 벽화와 작은 공방들이 많이 있더라는...
이화장.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살았다는 이화장. 홍수피해를 입어 복굴중이라는 안내글과 함께 문이 굳게 닫혀 있다. 이승만대통령에 대한 평은 나의 식견이 좁아서 글로 적기는 어줍짢아서 생략하련다.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사람중에 한 사람이라고 봐야하지 않을까?
흥인지문(동대문)
한성부의 동쪽을 지키던 큰 대문
보물 제1호 흥인지문(興仁之門)은 옛날 중요한 국가 시설이 있던 한성부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서울 성곽의 여덟 성문 가운데 동쪽의 큰 대문에 해당한다. 동대문이라는 이름도 거기서 기인했다.
'흥인(興仁)'은 어진 마음을 북돋운다는 뜻으로 유교사상의 첫 번째 덕목인 인(仁)을 뜻한다. 다른 4대문과 달리 네 글자의 현판이 독특한데 도성의 동쪽 방면이 텅 비어 있어 ‘의’에 해당하는 지(之)자를 넣어 무게감을 주었다고 한다.
흥인지문은 남쪽의 큰 대문인 숭례문과 마찬가지로 조선 초기에 창건했다. 조선 태조 7년(1398)에 완성됐고 50여 년이 지난 문종 원년(1451년)과 단종 원년(1453년)에는 일부 보수 작업을 진행했다. 그 후 400여 년이 지난 고종 5년(1868)에 동대문 전체가 썩어 지탱하기 어려워지자 전면적으로 개수 공사를 시작했다. 문루가 매우 낮아 문지를 8척 돋우고 그 위에 새로 홍예(虹霓)를 쌓고 초루(譙樓)를 중건했다. 공사는 1년 동안 진행돼 고종 6년(1869)에 완공됐다.
그 후 일제강점기(1934년)를 거치면서 일본에 의해 '동대문'이라는 이름으로 문화재 지정이 됐고 오랫동안 그리 불려왔다. 그러다 1996년 역사 바로 세우기 사업의 일환으로 재평가 작업을 통해 본래의 이름인 흥인지문을 회복했다.
섬세하고 화려한 조선 후기의 건축 양식
흥인지문은 중앙에 홍예문을 두고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문루를 세워 지은 2층 건물이다. 지붕은 앞에서 볼 때 사다리꼴 모양을 한 우진각으로 되어 있다. 사래 끝에는 토수를, 추녀 마루에는 잡상과 용두를, 용마루 양끝에는 취두를 올려 왕성의 대문으로 손색이 없다. 기둥 위의 공포는 다포양식이다. 모양새가 가늘고 연약해 보이며 장식이 강조된 것이 조선 후기 양식을 잘 드러낸다.
흥인지문은 다른 문과 달리 옹성이 있는 것도 큰 특징이다. 옹성은 '곡성(曲城)' 또는 '치성(雉城)'이라고 하는데 밖에서 성문이 보이지 않도록 성문을 둘러쌓은 작은 성을 말한다. 형세가 낮고 평탄해 적으로부터 공격을 받을 수 있는 지형적 약점을 보완하고, 반대로 적을 공격하기에 용이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흥인지문은 조선 후기의 섬세하고 화려한 아름다움을 지닌 문화재로 현재는 좌우의 성벽이 모두 헐러져 나가 도로 가운데 성문만 남았다. 하지만 숭례문 화재 이후에 그 소중함이 한층 더해진 우리네 문화재다.
창신동을 지나서 동대문에 도착하게 된다. 외부성곽 공사중이다. 남대문복원공사처럼 날림공사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이번엔 제대로 된 문화재복원공사이기를 빌어 본다. 동대문 주변은 남대문시장과 함께 큰 시장이 형성된 동대문시장이 있어 언제라도 사람들로 붐빈다. 동대문 앞에 있는 동대문홍두깨손칼국수 식당에 들어가 칼국수와 수제비를 시켜 먹었다. 공히 한 그릇에 단돈 3천원이다. 이 가격에 서울시내 한복판에서 칼국수를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신비롭기까지 하다. 그럼 가격에 비해 맛은 어떨까. 맛 또한 훌륭하다. 추천하고 싶은 식당이다.
오간수교에서 본 청계천.
2층버스.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저게 뭐하는 건물이지? 나 같은 문외한에겐 흉물스럽기까지 하도다. 얼마나 비효율적인가. 예전처럼 소상공인들의 자리로 그냥 두지. 차라리 공원을 만들던지.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와요.
광희문.
광희문은 태조 5년인 1396년에 세웠다.
남소문이 장충단공원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에 있었기 때문에 광희문은 실질적인 도성의 남소문으로 서소문과 함께 성 내의 시신을 내보내던 문으로 수구문(水口門) 혹은 시구문(屍軀門)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임진왜란 이후 파괴된 광희문도 파괴 되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이후 숙종 37년인 1711년에 중건에 착수 하여 수구문을 다시 쌓고 아울러 문루도 조성하게 한 후 광희문으로 다시 불리게 되었다 한다.
저 길 어디엔가에 남소문이 서 있었다.
반얀트리호텔이 있어 성곽을 복원하지 못하지만 남산의 남은 성곽과 호텔의 어딘가로 연결된 성곽이 있고 그 고갯길에는 남소문이 서 있었을 것이다.
흥인지문(興仁之門 : 東大門)과 숭례문(崇禮門 : 南大門) 사이에 있는 광희문(속칭 水口門)을 남소문이라 오인한 예도 있으나 별도로 남소문이 있었다.
남소문을 설치한 것은 1457년(세조 3)이며, 새로 이 문을 설치하게 된 것은 한강 나루를 통하여 남쪽으로 가려면 광희문을 통과하게 되는데, 그것은 거리가 멀고 불편하므로 한강 나루터를 도성에서 곧바로 통과하여 나갈 수 있는 문을 하나 새로 설치하는 것이 좋겠다는 건의가 있었고, 세조도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여 새로 이 문을 설치하게 되었다.
그러나 남소문은 설치된 지 12년만인 1469년(예종 1)에 임원준(任元濬) 등의 건의에 의하여 폐지되는데, 그 이유는 실용에 있어서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음양가(陰陽家)에서 손방(巽方 : 正東南方)을 꺼려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문을 설치한 뒤에 의경세자(懿敬世子 : 世祖의 世子)가 사망하여 음양가의 주장이 맞았다는 것이었다. 그 뒤 명종·숙종 때에 다시 남소문을 개통하자는 의견이 다시 제기되었으나 풍수금기설(風水禁忌說)에 의한 반대론에 부딪혀 끝내 개통을 보지 못하였다. 남소문이 언제 없어졌는지 확실한 시기는 알 수 없으며, 지금은 그 흔적조차도 찾아볼 수 없다.
장충단비 奬忠壇碑
지정번호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호
장충단은 고종 32년(1895) 경복궁에서 일어난 명성왕후(明成王后, 1851∼1895) 시해사건인 을미사변 때 일본인을 물리치다 장렬하게 순사(殉死)한 시위대(侍衛隊) 연대장 홍계훈(洪啓薰, ?∼1895)과 궁내부(宮內府) 대신 이경직(李耕稙, 1841∼1895)을 비롯한 여러 장졸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광무 4년(1900) 9월 고종 황제가 남소영(南小營) 자리에 세운 사당이다.
사당건립 후 매년 이곳에서 봄ㆍ가을로 제사를 지냈으나 1910년 일제강점 이후 폐사되었다. 1920년대 후반부터 일제는 이곳 일대를 '장충단공원'이라 이름하여 벚꽃을 심고 공원시설을 설치했으며, 상해사변(上海事變) 때 일본군 결사대로 전사한 육탄삼용사(肉彈三勇士)의 동상과 안중근(安重根) 의사에 의해 살해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혼을 달래기 위한 박문사(博文寺)를 세웠다. 광복 후 육탄삼용사 동상과 박문사는 철거되었으나, 6·25전쟁으로 장충단의 사당과 부속건물이 파괴되면서 장충단비만 남게 되었다.
장충단비는 장충단을 세우게 된 내력을 새긴 비로 1900년 11월에 세워졌다.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석을 얹은 간략한 형식이다. 앞면에 새긴 "奬忠壇"이란 전서(篆書) 제목은 뒤에 순종(재위 1907∼1910)이 된 황태자의 예필(睿筆)이며, 뒷면에 새긴 비문은 당시 육군부장(陸軍副將)이던 민영환(閔泳煥, 1861∼1905)이 짓고 썼다. 1910년 이후 일제가 뽑아버렸던 비신을 광복 이후 찾아서 영빈관(현 신라호텔 자리) 안에 세웠고, 1969년 지금의 자리인 수표교(水標橋,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8호) 서쪽으로 옮겼다.
비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대황제 폐하께서는 자질이 상성(上聖)처럼 빼어나고 운수는 중흥을 만나시어 태산의 반석과 같은 왕업을 세우고 위험의 조짐을 경계하셨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가끔 주춤하기도 하셨는데 마침내 갑오·을미사변이 일어나 무신으로서 난국에 뛰어들어 죽음으로 몸바친 사람이 많았다. 아! 그 의열(毅烈)은 서리와 눈발보다 늠름하고 명절(名節)은 해와 별처럼 빛나니, 길이 제향(祭享)을 누리고 기록으로 남겨야 마땅하다. 그래서 황제께서 특별히 충성을 기리는 뜻을 표하고 이에 슬퍼하는 조서(詔書)를 내려 제단을 쌓고 비를 세워 표창하며, 또 계속 봄가을로 제사드릴 것을 정하여 높이 보답하는 뜻을 보이고 풍속으로 삼으시니, 이는 참으로 백세(百世)에 보기 드문 가르침이다. 사기(士氣)를 북돋우고 군심(軍心)을 분발시킴이 진실로 여기에 있으니 아! 성대하다. 아! 성대하다."
와룡묘
지정번호 :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5호
와룡묘는 중국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정치가이며 군사지략가인 제갈량(諸葛亮)을 받드는 사당이다. 제갈량의 성은 제갈, 이름은 양, 자는 공명(孔明)이며 호(號)는 와룡이다. 그의 호를 따서 와룡묘라 한 것이다.
이 묘사는 고종의 계비(繼妃)인 엄귀비(嚴貴妃)가 세웠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치 않다. 일설에는 묘사 뒷면 암벽에 조각된 제갈공명의 영정(影幀)을 받들어오다가 철종 13년(1862)에 제갈공명을 추모하는 인사들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하며, 1924년에 화재로 소실된 뒤 1934년에 중건한 것으로 전해지며, 1976년에 보수하였다.
경내에는 와룡묘 외에 단군성전(檀君聖殿), 제석전(帝釋殿), 약사전(藥師殿), 삼성각(三聖閣), 문신각(文臣閣), 요사(寮舍) 등이 있다.
이 묘사는 3칸의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된 건물로, 왼쪽 처마에 연이어서 정4각형 지붕의 종각(鐘閣)이 있다.
묘사 중앙에는 석고로 된 와룡선생상이 봉안되어 있다. 머리에는 와룡관(臥龍冠)을 쓰고 녹색도포를 입었으며, 오른손은 우선(羽扇)을 들고 가슴 쪽에 대고 있으며, 왼손은 무릎 위에 놓고 좌정한 자세이다. 오른쪽 관성제군(關聖帝君, 관우)상도 석고로 되었는데 황색도포를 입고 긴 수염을 달았으며 오른손은 책을 펼치고 왼손은 책 쪽으로 향해 있으며 다리 사이에는 긴칼을 세워 왼쪽 무릎에 기대어 놓고 있다. 단군성전의 단군상은 석고상이며 복식은 상(像) 위에 물감으로 칠해져 있고, 양손은 소매 안에 넣고 앉아 있으며, 도포를 입고 긴 수염을 달았다. 삼성각에는 산신님이 중앙에, 오른쪽에는 칠성(七星)님, 왼쪽에는 독성(獨聖)님이 각각 모셔져 있다. 산신님은 석고를 벽면에 붙여 양각 형식으로 만들었으며, 머리에는 복건(?巾)같은 것을 쓰고 수염을 길게 늘였으며, 겉에는 붉은 도포를 입고 아래에는 녹색 옷을 입고 왼쪽 무릎은 세웠으며, 오른손에는 우선(羽扇)을 들고 있다. 좌정한 산신 뒤에는 호랑이가 있다. 칠성님은 부처님형상이고, 독성님은 민머리에 붉은 도포를 입고 오른손에 단장(短杖)을 잡고있으며 왼손에는 염주를 쥐고 있다.
도구는 일산(日傘)과 청룡도(靑龍刀) 2자루, 삼지창(三枝槍) 한 자루와 그 외 향로ㆍ촛대ㆍ제기(祭器) 등이 갖추어져 있다.
음력 6월 24일 와룡선생ㆍ관성제군 두 분을 위해 제사를 지내며, 평상시에도 신도들이 치성을 드리기도 한다. 옛날에는 와룡선생 탄신일과 기일(忌日)과 명절에 제사를 지냈으나 근래에 간소화된 것으로 보인다.
제의(祭儀)는 시봉인(侍奉人)이 독축(讀祝)·배례(拜禮) 순으로 진행한다.
제비(祭費)는 시봉인인 관리자가 준비하며 제물은 떡·제육·채소·과실 등이며, 제주(祭酒)는 소주를 쓰며, 현재 민간신앙화되어 유지해 오고 있다.
남산의 서울성곽 일부.
한국인의 미소와 서울타워.
남산 정상이다. 이곳에도 관광객들로 넘쳐 난다. 나한테는 별 흥미를 끌지 못하는 곳이라서 그냥 지나친다.
남산이 '남산(南山)'이라는 이름을 얻고 역사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조선왕조가 건국되면서부터이다. 이전에 인경산(引慶山)이라 불렸던 이 산은 1394년 태조 이성계가 풍수지리설에 의해 도읍을 서울로 옮기고 북악산 기슭에 궁궐을 세우고 바라보니 남쪽에 솟아 있는 산이라 하여 남산이 되었다. 이후 1395년(태조 4년)부터 남산에서 목멱대왕(木覓大王)을 모시고 산신, 기우제를 지내고 1397년 국사당을 건립하는 등 나라를 지키는 신과 스승을 모시는 영적인 산의 구실을 하였다. 또 내사산(內四山) 중 안산(案山, 주작에 해당)인 이곳에 도성(都城)을 축조하고 5개의 봉수대를 설치하여 도성방어의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도록 하였다.
한편 남산은 내사산 중에서도 주위의 풍경이 아름답고, 다른 산들이 암산인데 비해 토산으로 이루어져 산록이 푸르고 계곡이 깊어 수려한 자연경관을 가지고 있었다. 문헌에 따르면 남산은 계곡과 산록 등이 명승지여서 사람들의 휴식처로 이용되고 계절과 절기에 따라 씨름, 순성(巡城)놀이, 관등(觀燈)놀이 등을 즐겼고, 안산으로의 위상에 따라 자연경관을 관리하려는 다양한 노력도 있었다고 한다.
남산 국사당터.
조선시대 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한양의 수호신사(守護神祠)로 북악신사(北岳神祠)와 함께 남산 꼭대기에 두었던 목멱신사(木覓神祠)의 사당.
'國祀堂'이라고도 쓰며 후에 무당(巫堂)으로 변하여 일반의 기도장으로 사용되었다. 1925년 일본인들이 남산에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지을 때 건물을 헐어 편액(扁額)과 사당의 일부를 인왕산으로 옮겼다. 현재 그 자리에는 남산 팔각정이 있다.
일제의 잔재인 팔각정을 없애고 하루 빨리 국사당을 복원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종교적인 의미보다는 역사를 되살리고 민족혼을 불어넣기 위해서라도...
남산봉수대. 지정번호 :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14호
남산봉수대지는 남산 정상에 있던 목멱산(木覓山) 봉수대터이다.
남산봉수대는 서울에 있다 하여 일명 경봉수(京烽燧)라고 하며, 조선시대 전국 각지의 봉수를 매일 받아 병조(兵曹)에 보고하는 중앙 봉수소였다.
봉수제는 처음 중국에서는 25~27년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때에 이미 상당히 정비된 봉수제도가 있었고, 우리 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있어온 것으로 짐작되나 확실한 것은 고려 의종(毅宗) 3년(1149)부터이다.
조선 세종 때에 이르러 봉수제는 크게 정비되고 발전된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조선의 봉수는 그 시설상 전국의 모든 봉수가 집결하는 중앙 봉수인 서울 목멱산(남산)의 경봉수 해륙ㆍ변경의 제l선에 위치하여 연대라고 호칭된 연변봉수(沿邊烽燧), 경봉수와 연변봉수를 연결하는 내지봉수(內地烽燧)로 구분되며, 이밖에 기간 선로상의 직봉과 그 보조선상의 간봉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봉수는 중앙의 경우는 병조의 무비사(武備司)가, 지방의 경우는 관찰사ㆍ수령과 병사(兵使)ㆍ수사(水使)ㆍ도절제사ㆍ순찰사 등의 군사책임자가 그 임무를 맡았다. 봉수는 동서남북의 어느 변경에 위치한 봉수대에서 올린 봉화이든지 약 12시간이면 서울에 도착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봉수군의 태만, 봉수대의 관리 소홀로 불거(不擧)ㆍ불통되거나 전달 소요시간이 너무 지연되는 경우도 많았다.
봉수대에서는 올리는 횃불의 수로 정세의 느리고 급함을 나타냈는데, 평상시에는 1거(炬), 왜적이 해상에 나타나거나 적이 국경에 나타나면 2거, 왜적이 해안에 가까이 오거나 적이 변경에 가까이 오면 3거, 우리 병선(兵船)과 접전하거나 국경을 침범하면 4거, 왜적이 상륙하거나 국경에 침범한 적과 접전하면 5거를 올리도록 하였다.
만약 적의 침입이 있을 때 안개ㆍ구름ㆍ비ㆍ바람 등으로 봉수에 의해 전달이 불가능할 때 봉수대는 포성(砲聲, 信砲ㆍ發火 등)과 각성(角聲, 角吹)으로 주위의 주민과 수비군인에게 급보를 알리고, 봉수군이 다음 봉수대까지 달려가서 알리기도 하였다. 남산의 경봉수에는 봉수군과 오장을 오원(五員)이라 하여 배치하는 외에, 금군(禁軍) 중에서 고액 녹봉자(祿俸者)를 봉수군장에 임명, 번갈아 근무하면서 변방으로부터 올라온 정보를 병조에 보고하게 했다.
경봉수는 정원 20명에 5개소의 봉수마다 4명씩 상ㆍ하양번(上下兩番)으로 나누었고, 봉수군은 출ㆍ퇴번(出退番)의 편의를 위하여 반드시 부근의 주민을 중심으로 차출하였다.
서울 남산에 있는 5개의 봉대는 전국 각지에서 올라오는 정보를 병조에 종합 보고하는 종점이 되었다. 병조에서는 매일 새벽 승정원에 보고하여 임금에게 알리고, 변란이 있으면 밤중이라도 즉시 승정원에 보고하였다.
목멱산봉수대는 동쪽에서 서쪽 방향으로 제1봉으로부터 제5봉에 이르는 5개가 있었다.
제1봉은 함경도ㆍ강원도ㆍ경기도를 거쳐오는 봉수, 제2봉은 경상도ㆍ충청도ㆍ경기도를 거쳐오는 봉수, 제3봉은 평안도ㆍ황해도ㆍ경기도의 내륙을 거쳐오는 봉수, 제4봉은 평안도와 황해도의 바닷길과 경기도의 육로를 통해오는 봉수, 제5봉은 전라도의 해안과 충청도 내륙 경기도 해안을 거쳐오는 봉수를 받았다.
목멱산봉수대는 한양으로 천도한 후부터 고종 32년(1895)까지 500여년간 존속되었다.
이 봉수대에는 15명이었던 봉수군을 세종 28년(1446)에 20명으로 늘려 상·하 2번(番)으로 나누어 소(所)마다 2명씩 근무하게 하였다. 남산봉수대 5개소의 현재 정확한 위치는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14호로 지정된 이 봉수대는 [청구도(靑邱圖)]등의 관련자료를 참조하여 현 위치에 복원한 것이다.
남산케이블카에서 보이는 한옥마을
남산 봉수대 근처에 케이블카 탑승장으로 향한다. 이곳에서 성곽을 따라 내려서면 남대문에 도착하게 되는 데 우리 부부는 뜬금없이 성곽길을 걷다가 케이블카를 타기로 했다. 왜냐면 아래와 같은 뉴스를 접했기 때문이다. 이번 기회가 아니면 케이블카를 타 볼 기회는 없어지지 않을까 싶어 걷는 길도 좋지만 케이블카를 선택했던 것이다. 성곽길을 약간 벗어나 내려가는 길이라서 별반 차이가 있으랴싶어 내려갔는데 길을 약간은 벗어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케이블카는 남산3호터널입구에서 내려서더라는.
3호터널에서 길을 따라 걸어 남대문시장으로 들어 섰다. 그리고 우리 부부가 출발했던 그곳에 도착하면서 성곽길도 마무리를 하게 되었다. 역사와 사람 그리고 삶이 이렇게 흘러가듯이.
남산케이블카 역사 속으로...
남산케이블카는 1962년 5월 첫 운행을 시작했다. 그동안 누적 이용객은 1700만여명. 첫해 요금은 어른 40원, 어린이 25원이었다. 당시 버스 요금이 5원이었던 것을 보면 비싼 금액이다. 현재는 어른 기준으로 왕복 8500원이다.
오랜 추억이 켜켜이 쌓인 이 케이블카는 50여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질 전망이다. 서울시는 이르면 2017년 남산 자락에 곤돌라(소형 케이블카)를 설치할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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