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019. 맑음. 둘이서.
서울성곽은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10호로 지정되어 있다. 1395년 태조는 수도를 보호할 성곽(도성)을 축조하고자 도성축조도감이라는 기관을 설치하고, 1396년 수도의 내사산인 백악산, 인왕상, 목멱산(남산), 낙산의 정상을 연결하여 약18km에 달하는 성곽을 완성하였다. 서울성곽은 높이와 험난한 정도에 따라 높고 험한 곳은 석성으로 낮고 평탄한 곳은 토성으로 축조하였는데 남산은 높이가 높고 험난한 지역에 해당하여 석성으로 축조되었다.
서울성곽의 설치와 더불어 4대문과 4소문을 만들어 도성의 출입을 관리하였는데 4대문은 동쪽의 흥인지문, 서쪽의 돈의문, 남쪽의 숭례문, 북쪽의 숙청문이며, 4소문은 동북의 홍화문, 동남의 광희문, 서북의 창의문, 서남의 소덕문이다.
1910년 일제 강점기 일본은 도시계획이 시급하다는 명목으로 서울성곽을 파괴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동대문, 서대문, 남대문 일대의 성곽이 멸실되었다. 1913년 남소문 일대가 훼손되었고(460m), 1918년에서 1925년 회현자락 내 중앙광장 위치에 조선신궁과 도로, 시설물들이 설치되면서 성곽이 훼손되었다.
서울특별시는 1970년대 도성복원위원회를 설치하여 훼손되었던 성곽복원사업을 추진하였으며, 1977년 광희지구(30m), 장충체육관 북쪽에서 남산 동쪽까지 이르는 장충지구(1,053m), 남산 동쪽에서 남산 서쪽에 이르는 남산지구(1,607m)로 나누어 복원사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일부구간은 아직도 미복원 상태로 남겨져 있다.
사적 제10호
- 시 대 : 조선 태조 5년(1396)
- 규모·양식 : 467,922.6㎡(둘레 약 18km)
- 재 료 : 석조
서울성곽은 서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조선시대의 도성(都城)이다. 태조는 한양 천도 후 일차적으로 궁궐과 종묘를 먼저 지은 다음 태조 4년(1395) 9월 도성축조도감(都城築造都監)을 설치하고 정도전(鄭道傳)에게 명하여 성터를 살피게 하였다.
정도전은 백악(白岳)·인왕(仁王)·목멱(木覓)·낙산(駱山)에 올라 실측하여 네 산을 연결하는 5만 9,500척의 성터를 결정하였다. 이듬해 정월부터 전국에 걸쳐 무려 11만 8,000여명이 동원되어 600척을 한 단위씩으로, 축성구역을 97지구로 나누어 정하였다.
구역마다 천자문의 글자를 표시하여 백악 동쪽에서부터 천(天)자로 시작하여 낙산·남산·인왕산을 거쳐 백악 서쪽에 이르러 조(弔)자까지 구획하여 공사를 하였다. 공사는 구역마다 책임자를 두어 책임진 부분에 해당하는 성벽에 관직과 축성한 고을의 이름을 새겨넣어 책임을 분명하게 하도록 하였는데,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높고 험한 산에는 15척 높이의 돌로 쌓게 하였는데, 돌로 쌓은 성벽의 길이는 1만 9,200척이었다.
평지는 아래 부분이 25척, 윗 부분이 18척 되는 너비로 높이 25척의 규모로 흙을 쌓았는데, 그 성벽의 길이는 4만 3,000척이었다. 동대문 부근 청계천에 있는 수구(水口)에는 구름다리를 쌓고 그 좌우에는 돌로 성을 축조하였다. 홍예의 높이는 16척, 석성 등을 포함한 길이는 1,050척이었다.
이해 가을에도 8만명의 정부(丁夫)를 동원하여 흙으로 쌓은 부분을 돌로 고치고, 4대문과 4소문을 완성하였다.
4대문이란 동쪽의 흥인문(興仁門), 서쪽의 돈의문(敦義門), 남쪽의 숭례문(崇禮門), 북쪽의 숙청문(肅淸門)을 말하고,
4소문이란 동북의 홍화문(弘化門), 동남의 광희문(光熙門), 서북의 창의문(彰義門), 서남의 소덕문(昭德門)을 가르킨다.
이 가운데 흥인문에만 옹성(甕城)을 쌓았다. 대략의 공사는 이렇게 끝났지만 숭례문은 1396년에, 흥인지문의 옹성은 이듬해 4월에야 완성되었다.
세종 4년(1422)에 이 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하여 흙으로 쌓은 부분을 모두 돌로 바꾸면서 더 높게 쌓고, 석재를 약 2 : 1 길이 비율의 장방형으로 많이 다듬어 쌓았다. 또한 여장(女墻)도 쌓았고 수문도 2개 더 만들었다. 전국에서 약 32만 2, 000명의 인부가 동원된 이때의 개축으로 도성은 둘레 8만 9,610척, 높이 40척 2촌, 여장 4,664첩(堞), 치성(雉城) 6군데로 되었으며, 곡성(曲城) 1군데, 성랑(城廊) 15군데를 갖추게 되었다.
그 뒤 1426년 수성금화도감(修城禁火都監)을 두고 관리를 전담케 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광해군 때 수축이 있었고, 숙종(肅宗) 30년(1704) 3월부터 약 5년간에 걸쳐 3군영(三軍營)에 분담하여 둘레 9, 975보, 성첩(城堞) 7, 081개로 만드는 대대적인 수축을 하였다. 또한, 영조 19년(1743)에도 부분적인 보수를 하였고, 성첩도 회분(灰粉)으로 단장하였으며, 고종 6년(1869) 동대문의 개축이 있었다.
이처럼 서울성곽은 태조 때 처음 축조되어 세종 때 개축되고 숙종 때의 수축이 있었는데, 세 차례의 축조는 축조 방법과 돌의 모양이 각기 달라, 세 시기의 성벽이 쉽게 구분된다. 즉 태조 때의 것은 1척 정도의 다듬지 않은 네모꼴의 작은 돌을 불규칙하게 쌓았으나 벽면은 수직이다.
세종 때는 2×3척의 긴 네모꼴의 다듬은 돌을 아래 부분은 비교적 큰돌로, 윗 부분은 작은 돌로 쌓았으며, 성벽의 중앙부가 밖으로 약간 튀어나왔으나, 철과 석회를 사용하여 축성 기술이 향상되었음을 보여준다. 숙종 때의 것은 가로와 세로가 2척 규모의 정방형 돌을 정연하게 쌓아 간격도 일정하고 벽면도 수직이다. 이러한 축조술의 변화는 조선시대 축성술의 전반적인 변화와 관계된 것으로, 지방의 읍성(邑城)과 산성(山城)에도 적용되어진 모범이었다. 1915년 일제는 근대 도시로의 발전을 방해한다고 하여 성문과 성벽을 무너뜨렸고, 그 결과 현재 삼청동·장충동 일대의 성벽과 숭례문·흥인지문·숙청문ㆍ창의문ㆍ광희문 등이 전체 또는 일부 남게 되었다. 광복 후 1963년에 인왕산 방면과 북악산의 돌로 된 성벽을 보수하였으며, 1972년과 1976년에 부분 보수와 개축을 하였다. 이후 혜화문이 복원되고 숙청문ㆍ광희문의 문루가 복원되는 등 계속적인 복원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서울 한양도성 관광안내지도.
서울성곽길을 둘러보는데 유용하게 필요한 지도이다. 물론 성곽길을 걸으면서 돌담만 따라 걷다보면 그야말로 종주의 의미 그 이상은 없을 것이다. 그러하므로 성곽길을 돌면서는 도성 주변의 관광지도 둘러 볼 일이다. 덕수궁이나 창덕궁 같은 궁궐을 봐도 좋을 것이다. 도성 그 자체가 궁궐을 보호하기 위해 쌓은 성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경교장이나 독립운동가 들의 삶을 들여다 볼 기회가 있다면 이 또한 값진 일이다. 아니면 기념관이나 박물관 등등을 섭렵한다고 한들 누가 나무라겠는가. 성곽이 서울시의 노력으로 대부분은 복원 내지는 흉내를 내고 있는데 도심화가 많이 진행해버린 일부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없는 게 아쉬웁지만 그래도 지금 보존해 있는 이마저도 제대로 관리가 되었으면 하도다.
서울에 외곽으로 산줄기를 타는 외산종주를 옛적에 마치고 지내다 북한산둘레길도 둘러보고 다시 서울둘레길이 생겼다해서 얼마전에 마치고 뭘할까하다 이제 성곽길을 둘러보면서 서울에 길을 마치기로 한다.
지하철4호선 회현역에서 내려 남대문시장을 가로질러 남대문으로 향한다. 남대문시장이 개장 600주년을 맞아서 축제가 열리나보다. 남대문시장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인다. 북적이는 사람들의 국적이 주로 중국인이나 일본인으로 바뀐게 바뀐것이랄까. 그래도 왁자지껄하니 시장통의 분위기는 아침나절부터 살아 있어 좋다.
남대문시장에서 남대문을 구경하기 위해 가기 전에 간식용으로 찐빵과 꽈배기를 사서 배낭에 넣고 남대문으로 갔다. 남대문에도 중국인 관광객 일색이다.
지금의 남대문은 몇 년전에 화재로 전소되고 다시 지었는데 부실공사로 시끄럽기도 하다. 나무며 단청이며 모든 게 부실덩어리로 공사를 했다고 야단들이다. 화재를 내게 만든 것도 부실인데 복원도 부실이니 나라꼴이 말이 아니로다. 국보1호 문화재 복원에 문제가 많다니 나원 참. 문제가 한두가지가 아니고 이제와서 어찌 해볼도리가 없을 것이다.
남대문시장.
국보1호 남대문.
남대문.
대한상공회의소 담벽.
남대문을 나서서 대로를 건너 대한상공회의소 건물 옆길로 간다. 상공회의소 빌딩의 담벼락에는 성벽의 일부가 남아 있고 일부는 복원공사를 하였다. 그 길을 수백미터 따라가다 보면 소의문터(서소문)를 보게 된다. 지금은 큰 길로 변하여 차가 쌩쌩 달릴 뿐이다.
서소문터.
이곳에서 방향을 틀어 오른쪽으로 향해 길을 건너 배재학당터로 향한다.
배재학당터 앞에 보도에 만들어진 타일그림. 이런 풍속화 그림이 여러 점이 놓여 있다.
정동제일교회.
교회를 지나 서울시립미술관을 거쳐 덕수궁에 도착하였다. 물론 여기는 성곽길에는 조금 빗나간 길이다. 하지만 성곽길이라는 게 옛적 문화재를 걷는 길이니 덕수궁을 둘러 보기로 하였다. 덕수궁안에 들어가서 둘러보고 나와 덕수궁돌담길을 따라 성곽길을 이어간다.
서울시청사.
세월호를 기리자는 리본이 수없이 걸려 있다. 하지만 사람들의 기억속에서는 차츰 잊어질 것이다. 삼백여명의 목숨을 앗아 간 대형참사이지만 인간은 간사한지라...
덕수궁 정문옆에는 쌍용자동차관련 집회가 정말 오랫동안 이어지고 있다.
덕수궁돌담길.
덕수궁돌담길에도 변화가 생겼다. 돌담길을 따라 직접 만든 수공예품을 가지고 와서 파는 가게가 열리더라. 아무나 와서 하는 잡상인 수준은 아니고 자기가 직접 만든 수공예품이라던가 작은 미술작품 등을 가지고 와서 판매하고 있다. 서울시에서 관리를 하는가보다.
작곡가 이영훈님의 기념비.
어서각터.
돈의문터(서대문)
덕수궁돌담길을 지나고 정동극장을 지나 어서각터를 지난 후에 돈의문터에 도착하였다. 서대문도 일제가 길을 내면서 헐어버려 지금은 대로로 변했다. 대로를 건너 강북삼성병원에 도착하면 김구선생기념관(경교장)이 있다. 병원의 일부로 사용되다가 얼마전 기념관으로 고쳐 개관하였다한다.
경교장 내부는 최대한 그때의 모습을 재현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지나게 되면 한번은 들러볼만한 곳이다. 경교장 안에는 김구선생의 발자취를 조금이나마 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성곽길을 걷는다면 반드시 들러봐야한다.
경교장.
예전엔 병원으로 사용하다 지금은 복원하였지만 뒷편은 아직도 병원 건물이다.
홍난파생가.
경교장을 나와 걸으면 서울시교육청이 나오고 성벽의 일부도 볼 수가 있다. 교육청 담으로 일부가 사용되고 있더라.
홍난파생가를 지나면서 작은 공원에는 길고양이를 위한 멋진 집이 있다.
홍난파생가를 지나면서 곧바로 주택가를 지나게 되면서 보면 성곽의 일부가 지금은 주택의 담벼락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될까. 세월의 무상함이여.
주택가를 거쳐 오르다보면 인왕산입구에 도착하게 된다. 여기서부터 인왕산정상까지는 무작정 오르막길이다. 그래서 하루를 마감하고자 한다. 이곳에서 성곽길은 접고 집으로 향한다. 내리막길을 내려서면서 단군성전이 자리잡고 있더라. 사직단의 일부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통하는 길은 있다.
단군성전.
지금은 흔하지 않은 단군성전이 깨끗하게 단장되어 있어 정말 반가운 마음이다.
단군성전에 분향을 한다. 성금도 조금 내고.
사직단(社稷壇)
국토의 주인인 사(社)와 오곡의 우두머리인 직(稷)의 두 신위(神位)에 제사드리는 곳.
사적 제121호. 이곳에 단을 쌓고 제사를 지냈으므로 사직단이라고 한다. 보통 도성의 서쪽에 위치한다. 사단(社壇)은 동쪽, 직단(稷壇)을 서쪽에 설치한다. 국토와 오곡은 국가와 민생의 근본이 되므로 고대에는 국가와 민생의 안정을 기원하고 보호해주는 데 대한 보답의 의미에서 사직을 설치하고 제사를 지냈다. 따라서 사직은 왕실의 조상들을 제사 지내는 종묘와 함께 국가적 차원에서 중요시되어, 국가를 가리키는 뜻으로도 사용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사직단이 설치된 것은 삼국시대부터인 것으로 기록에서 확인되고 있다. 고려 시대에도 991년(성종 10)에 사직을 세웠는데, 1014년에 강감찬의 건의에 따라 수축되었다. 조선 왕조가 들어선 1393년(태조 2)에는 한양 천도와 관련된 종묘·사직의 지형도를 만들었다. 그 이듬해에 사직의 터를 잡았는데, 경복궁 서쪽의 인달방(仁達坊)으로 정했다. 1395년 사직단의 축조공사가 시작되어 단의 설치가 완성된 이후 담장을 둘렀으며, 담장 안에는 신실(神室)과 신문(神門)을 세웠다. 1474년에 간행된 〈국조오례의〉에 의하면 사직단은 정4각형의 평면으로서 한 변의 길이는 2장 5척 즉 25척, 높이는 3척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 단의 사방 중앙에는 3층의 섬돌이 설치되어 있으며, 사단과 직단 사이의 간격은 5척으로 되어 있다.
사직단에서는 중춘(仲春)·중추(仲秋)·납일(臘日:동지 뒤의 셋째 成日)이 되면 국가와 민생의 안전을 기원하는 대향사(大享祀)를 지냈으며, 정월에는 기곡제(祈穀祭)를, 가뭄 때에는 기우제(祈雨祭)를 각각 행했다. 이러한 각종의 제례와 관리를 위해 1426년(세종 8)에는 사직서(社稷署)를 담장 밖 북쪽에 설치했다. 그리하여 1908년 칙령에 의해서 폐지될 때까지 사직단에서 국가제사가 계속되었다.
그런데 임진왜란의 병화로 인하여 사직단은 담만 남고 나머지 부속물은 거의 파괴되어 사직과 종묘의 신주를 함께 옮기기도 했다. 병자호란 때는 강화도로 옮겨진 바 있다. 1897년 10월 조선왕조는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원구단(圜丘壇)에서 천지제를 행한 후 황제위(皇帝位)로 나아간 고종은 사직단의 지위도 올려 태사(太祀)·태직(太稷)으로 고쳤다. 그러나 사직단은 대한제국이 일제에 의하여 강점됨에 따라 그 기능을 상실해버리고 말았다. 대신 일제는 사직단 일원을 공원으로 만들었는데, 그와 관련된 부속건물들을 철거했을 뿐 아니라 일부는 학교부지로도 분할되었다. 1960년대에는 도시계획사업으로 인하여 그 부지의 축소를 가져왔을 뿐 아니라 1970년대에는 도서관·수영장·동사무소·파출소 등이 건립되었다.
사직단 내.
'서울둘레걷기(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울성곽길3 (0) | 2014.11.16 |
---|---|
서울성곽길2 (0) | 2014.10.29 |
서울둘레길 열나흗날 (0) | 2014.10.11 |
서울둘레길 열사흗날 (0) | 2014.10.07 |
서울둘레길 열이튿날 (0) | 2014.09.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