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707. 흐리다 맑음. 28인승산악회.
쉰 개의 우물이 있다해서 쉰움산이 된 산을 다녀왔습니다. 예초에는 두타산을 오르게 되어 있었죠. 하지만 두타산은 서울에서 멀고 산이 높아 당일산행으로 오르기에는 시간이 빠듯합니다. 아니나다를까 영동고속국도가 막히는 구간도 생기고 대관령구간에서는 안개비에 차가 속도를 내지 못해서 더디다보니 일찌감치 두타산은 포기하고 쉰움산으로 해서 무릉계곡을 가기로 급 변경합니다. 쉰움산으로 해서 두타산정상을 다녀올수도 있습니다. 일부 회원은 그곳을 가기로 하고요. 느린 사람은 삼거리에서 하산하면 됩니다.
쉰움산을 오르기 위해 천은사에 도착합니다. 얼추 열두시가 되어버리네요. 서둘러야 귀경해도 지하철이 끊기지 않습니다. 나야 상관없지만요. 쉰움산 천은사에서 산행을 시작하자니 계곡근처에 동안이승휴선생의 사당이 보입니다. 가보고싶으나 건너는 계곡물이 불어 건널수가 없어 포기하고 천은사로 갑니다. 절구경을 간단히 하고 등산로로 직행.
절은 아담하고 좋습니다. 흔히 하는 확장공사도 없고 조용하고 아주 좋네요. 절구경은 공짜가 없다해서 시주를 하려고 하나 마눌이 재촉해서 신발을 벗기 싫어서 그냥 산을 오릅니다. 초입은 편안한 등산로 그대로입니다. 울진, 삼척 특유의 금강송이 사천왕처럼 버티고 서 있는 등산로를 오르자면 힘이 절로 생깁니다. 소나무들이 어찌나 늠름하고 멋지던지 감탄사가 계속 나옵니다. 붉은색 옷을 입은 소나무들이 너무너무 멋집니다. 정말 남자답습니다. 그리고 부럽습니다. 힘이 넘쳐나는 모습들이. 그런 소나무들은 두타산산성삼거리까지 계속 이어집니다. 그리 높지도 길지도 않은 등산로인데 속도는 더디네요. 급경사에 깔딱고개가 있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주변 경치가 좋아서 그런가요. 기암과 노송이 눈을 사로잡습니다. 그렇게 쉰움산 정상까지 한 시간이 넘게 오릅니다. 드디어 쉰움산 정상.
정상은 바위투성이에 작은 구덩이들이 널려있네요. 이게 오십개가 넘어 쉰우물산 그러니까 줄여서 쉰움산이 되었답니다. 웅덩이에는 무당개구리가 많이 있네요. 안개가 없다면 경치가 멋질건데 조금은 아쉽습니다. 정상에서 점심을 먹습니다. 회원 모두 점심시간을 즐겁게 보내네요. 그리고 이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되더군요.
쉰움산정상에서 두타산산성삼거리까지는 한치의 내리막도 없는 급한 경사의 오르막입니다. 한없이 오릅니다. 힘들면서도 지루한 길입니다. 모두들 힘들어합니다. 그래도 걷다보면 오릅니다. 드디어 삼거리에 도착하네요. 이제 하산길입니다. 급경사의 내리막을 내려섭니다. 내려가는 길도 상당합니다. 이 길로 오르는 사람들은 정말 강철체력이어야 할겁니다. 그리고 산성터에 도착하면 정말 그림에서나 볼듯한 소나무 한 그루를 보게 됩니다. 어떤 소나무보다도 더 멋집니다. 바위에 앉아 있는 꿋꿋한 모습에 모두 반하게 됩니다. 그럼 하루의 고생은 거의 다 하나봅니다. 조금 내려가면 무릉계곡에 도착하니까요. 무릉계곡에 도착해서는 물소리 바람소리 그리고 사람소리에 어울려서 발걸음이 가볍습니다. 비온뒤의 무릉계곡엔 물이 넘쳐 흐릅니다. 사방이 폭포로 변하고 녹음짙은 숲은 허파를 깨끗하게 해줍니다. 물살이 세 물놀이를 못하는게 아쉽네요.
삼화사에 도착합니다. 삼화사는 템플스테이에 재미를 들였는지 집 짓는 공사가 한창이네요. 절 구경할 맛이 안납니다. 대충 둘러보고 나옵니다. 무릉반석엔 사람들이 그래도 많이 있네요.
관광단지 식당에서 산채비빔밥과 막걸리 한 잔으로 피로를 풉니다. 오늘은 서울가는 길이 늦어집니다.
쉰움산 천은사 입구에 있는 동안사. 사찰이 아니고 동안 이승휴선생의 사당이다.
이승휴의 자는 休休, 경산부 가리현(지금의 성주군) 사람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힘써 공부하였다. 고려 고종조에 급제하여 두타산 구동에 들어가서 몸소 농사지어 어머니를 모시고 십여 년을 살았다. 安集使 李深敦의 권유로 서울에 나와 李藏用. 柳璥의 천거로 경흥부 서기가 되었다. 들어와서는 都兵馬錄事가 되었더니, 삼별초 항쟁의 와중에 포로가 되었다가 왕이 있는 곳으로 도망하여 왔다. 원종이 크게 기뻐하였다. 승휴가 이에 계책을 올려 말하기를 '그들이 물목을 반쯤 지나기를 기다렸다가 정예를 파견하여 선단을 가로 끊어버린 뒤에 강도를 굳게 지키면 끊어진 앞의 선단의 형세는 외롭고 뒤 선단은 거점을 잃어 전후가 서로 호응할 수 없게 하면 그들을 가히 쳐부술 수가 있사옵니다' 라고 하였다. 왕이 양부로 하여금 의논케 했으나 주저하여 행하지 아니하였다. 이때에 군수 물자가 보급이 안되고 안팎에서는 착취가 횡행하며, 토목 사업이 크게 일어 백성들이 대단히 괴로웠다. 승휴가 상서하여 그 폐간을 극언한 끝에 죄없이 파면되었다.
1252년 문과에 급제한 후 합문지후, 감찰어사 등을 거쳐 우정언, 우사간 등의 벼슬을 거쳤다. 장리 7명의 죄를 물어 재산을 몰수한 후 그들의 원한을 사 동주부사로 좌천된 후에는 스스로를 동안거사라 부르기도 하였다.
그는 곧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였는데, 때마침 왕이 順安公 悰을 元에 보내어 황후와 태자 책봉을 하례할 때에, 양부에서 승휴를 추천하여 서장관으로 삼았으나 늙었다는 이유로써 사양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경오년에 그대의 성명을 벼룻집에 적은 것이 아직도 책상 위에 있거늘 그대는 힘을 내게" 라고 하고는 백금 서근을 그에게 하사하였다. 황제가 하례를 받고는 잔치를 베풀고 옷을 내리었다. 승휴의 진표사문은 문장이 아주 훌륭하였다. 매일 관반인 한림학사 후우현과 창화하였다. 우현은 5세에 오경에 통하였으므로 황제가 불러 학사로 삼았고 신동이라고 일컬었다. 그가 승휴의 시를 보고는 탄복하고 문득 그를 읊었다. 그가 돌아오자 왕이 크게 기뻐하여 쌀 300석을 내리고, 지었던 시문을 가져오게 하여 보시고 매우 칭찬하셨다.
왕이 돌아가시자 또 서장관이 되어 원에 가서 고애하고, 남기신 말씀을 세자에게 전하였다. 승휴가 생각하기를 세자는 부마의 융복을 한 지가 이미 오래되어 그 옷과 예장을 스스로 버리기가 어려운 형세이기 때문에 마침내 세자를 풍간하고 황제에게 본국의 의관과 전례에 대한 시말을 말씀드렸다. 황제가 승상에게 명하여 칙서하기를 경은 전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으니, 본국에 돌아가서 그대의 조종의 제도에 조금이라도 어긋나지 말게 할 것이며 예과 같이 행하라고 하였다.
그는 돌아와 합문지후를 제수받았으며, 監察御史와 右正言을 지내었다. 시정의 득실에 대한 왕의 물음에 승휴는 15개 조목을 올렸다. 그는 계속하여 右司諫에까지 올랐으며 양광, 충청 두 도의 안찰사가 되어 부정한 관리 7명의 죄를 묻고 그의 재산을 몰수했다. 이로 말미암아 원한을 많이 사서 東州副使로 폄출되었으며 스스로 동안거사라고 호하였다. 얼마 뒤에 불려 殿中侍史를 제수받고 열 가지 일을 아뢰었으며, 또 상소하여 이와 해 될 일을 극론하다가 왕의 뜻에 거슬려 파면되고, 구동 옛 집에 돌아왔다. 그곳에 따로 容安堂을 꾸며 불서를 읽었으며, 帝王韻紀와 內典錄을 저술하면서 10년을 살았다.
왕위를 이어받은 忠宣王이 하서하기를 '과인이 듣기로는 임금이 된 자는 어진이 구하기에 부지런해야 하고, 사람 얻기에 뛰어나야 한다고 한다. 이런 까닭에 대체로 한 가지 능력과 재간 있는 이가 있으면 반드시 그를 부르고자 하는데, 하물며 경과 같은 사람은 문재에만 그친 것이 아니고, 벼슬할 당시에 비할 데 없이 충성하고 절개 굳어 능히 군심의 잘못을 바로잡았던 것이다. 때를 잘못 만나 대각에서 벗어져 나가 헛되이 산골에서 늙어가니, 과인은 일찍부터 안타까이 생각하였다. 지금 박덕의 몸으로 외람되게 왕위를 이었으니, 옛 사람과 더불어 만가지 일을 다스리고자 하오.' 라고 하였다. 그리고 按察副使 유자우를 시켜 돈돈히 타이르기를 그대의 그 몸을 나의 옆자리에 두고자 하니, 나이가 많다고 사양을 하지 말라고 하였다. 또 그의 아들인 權知校書郞 林宗에게 명하기를 어른을 모시고 서울로 오라고 하였다. 승휴가 글을 올려 늙고 병 있음을 이유로 이를 사양하였다. 왕이 다시 하서하기를 '과인은 평소 경의 이름을 듣고는 같이 다스리고자 생각하여 지금 경에게 詞林侍讀 左諫議大夫 充史館修撰官 知制誥의 벼슬을 주노라. 뭇 백성을 한 번 일으켜 주기 바라오.' 라고 하였다. 승휴가 이르니 왕이 더불어 이양기하고 크게 기뻐하였다. 그래서 백성들의 이되고 해될 일, 시정의 좋고 나쁜 점을 묻고 조용히 들으셨다.
그 뒤 수일에 승휴가 전하께 말씀을 드리기를 '전하가 노신을 부르신 까닭은 신기한 계책을 내어 큰 공을 세우라 하심이 아니고, 다만 직언으로써 무엇이든 말하라 하셨을 따름이오니 신이 어찌 남은 목숨을 아끼어 홀로 상은을 입겠사옵니까' 라고 하였다.
이때 마침 元의 사자가 와서 따져 물었던 것이다. 왕이 일러 말하기를 '선생이 당한다면 이런 일을 어떻게 하겠소.' 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난리로 인한 이치는 옛부터 그러하옵니다. 하늘이 그런 일을 전하로 하여금 앞으로 거울삼게 하여 길이 태평을 누리시게 할 것이오니 너무 근심하지 마옵소서. 아까 判秘書事 進同僉資政院事가 상서하기를 우리나라의 제도에 70이 넘은 이를 높은 벼슬에 있게 함은 예가 없는 일이라고 하였사옵니다. 못난 신하로 말미암아 선왕의 제도를 고쳤으니 신의 죄가 크옵니다. 바라옵건대 은명을 거두시오소서.' 라고 하였다. 왕이 웃으며 '선생은 타인과 비교할 일이 아니니 거듭 더 잘 해 주오. 승휴여, 힘차게 직분을 맡아 주게나.' 라고 하였다. 겨우 십 수일에 또 상서하여 물러가겠다고 빌기를 심히 절실하게 하니, 왕이 할 수 없이 이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로써 그는 밀직부사 감찰대부 시림학사 승지로서 벼슬을 그만두었다.
26년에 세상을 뜨니 나이 77세였다. 성품이 정직하여 세상에 욕심이 없고 불법을 아주 좋아했다. 林宗. 衍宗 두 아들이 있었다.
산이 멋집니다.
쉰움산의 금강송들.
쉰움산 정상.
쉰움산 정상.
쉰움산의 기암과 노송.
십이폭포. 열두개의 폭포가 이어져 십이폭포라고 한다네요.
관음암과 관음폭포.
무릉계곡의 기암과 노송.
두타산성에 있는 명품소나무. 전국 명산의 소나무중에 가장 으뜸일것 같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보는 듯하다.
학소대.
무릉계곡.
그 유명한 무릉반석.
호암소.
전설이 깃든곳. 옛적 두타산 호랑이는 스님과 이 소를 건너뛰는 내기를 하게되어 스님은 성공하고 호랑이는 실패하여 소에 떨어져 죽었다. 호랑이가 성공하면 스님은 잡아 먹히게 될 것이기 때문에 두타산 신령이 스님을 구해 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