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둘레걷기(완)

북한산둘레길2

돗가비 2010. 9. 25. 22:23

100925. 맑음. 혼자서 생각없이 걷다.

평창동마을에서 가마골입구까지

평창동마을에서 가마골입구까지 다리가 아프게 걸었다. 가던 길에 진관사 입구까지 갔고 되돌아 나와서 삼천사를 가기 위해 다리를 건너다 그만 두고 되돌아 왔다. 이래저래 25KM는 걸었을듯하다. 우리나라의 부자동네의 대명사인 평창동 마을길은 주변에서 보기 어려운 여러가지 형태의 고급주택들이 들어서 있었다. 길거리에는 외제차가 늘어서 있고 사람은 구경하기 힘들다. 오로지 둘레길을 걷는 사람들만이 보일뿐이다. 은평구로 들어서면서 아파트가 즐비하고 사람들이 북적이는게 보인다. 사람사는 동네처럼 움직임이 늘어나지만 여기도 온통 개발붐으로 시멘트뿐이다. 둘레길이라지만 어디를 가야 하는지 방향을 상실하고 만다. 어느 동네에는 묘목농장이 즐비하고 어디는 묘역을 지나게 된다. 그렇게 둘레길에는 사람들로 붐비면서 길을 걸어 간다. 한국사람 특유의 떼거리문화가 둘레길에도 들어섰다. 남들 하는거 하지 않으면 낙오되는것 같은 분위기. 그래서 깊은 속내도 알아보지 않고 무작정 집을 나서고 길을 따라 걷는 이 나라 사람들. 북한산성입구의 등산로 진입로에는 남대문시장통을 온듯한 착각에 빠진다. 온갖 음식을 파는 좌판에 식당에 길거리에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등산객들이 그리 많은것이다. 사람많고 산이 많은 나라의 특징이라고 편하게 생각하자. 그리고 걷자. 앞만 보고 걷자. 여기서 뭘 건져 올리겠는가. 

 평창동 마을길.

 고급주택들이 즐비한 평창동길.

 경사진 바위와 어우러지게 지은 주택.

 

 

 

 청련사.

 족두리봉.

 좌로부터 향로봉, 비봉, 사모바위, 승가봉으로 이어지는 능선.

 

 탕춘대성암문.

 맨 좌측의 족두리봉, 그 다음 솓은 향로봉 그리고 비봉, 잘 찾아야 보이는 사모바위 그리고 승가봉, 나한봉, 나월봉, 문수봉, 보현봉으로 이어진다. 

 은평시가지.

 여기는 어딘고? 숲인지 아파트숲인지 모르겠다. 은평구. 

 북한산은 온통 바위덩이이다.

 북한산을 걷다보면 족두리봉이 멀어졌다 가까워졌다를 반복한다.

 북한산의 봉우리들. 이름은 잘 모르것다.

 잘 꾸며진 묘소. 이곳이 내시묘역은 아닐듯싶은데. 주변에도 잘 만들어진 묘들이 많았다.

 보호수. 이 근처에도 온통 공사판이 벌어지고 있는데 무슨 생태공원이 들어선다던가하더라. 그냥 그대로 두는게 생태공원아닌가?

 진관사 일주문. 천년의 역사가 있는 사찰이라는데 안으로 절구경가기엔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온통 돈으로 발라놓은듯한 건물과 공사장이 맘에 들지 않아서이다.

 삼천사 들어가는 입구. 삼천사를 가기 위해 걷다가 하도 산속으로 들어가기에 포기하고 되돌아 나왔다.

경천군송금물침비. 경천군에게 하사한 땅의 경계안으로 들어가서 소나무를 벌채하면 엄벌에 처하니 침범하지 말라는 경계비이다.

李海龍 (이해룡)

조선 중기 서예가. 자는 해수, 호는 북악(北嶽). 본관은 광주(廣州). 1588년(선조 21) 사자관(寫字官)으로 통신사 황윤길(黃允吉)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많은 필적(筆蹟)을 남겼다. 임진왜란 때는 역관(譯官)으로 일본과의 화의교섭에 힘썼다. 95년 동지중추부사, 1602년 사섬시 주부(司贍寺主簿)에 이르렀고 경천군(慶川君)에 봉해졌다. 해서(楷書)에 뛰어났으며, 당시의 대가들로부터 한석봉(韓石峰)에 필적하는 명필이라는 격찬을 받았다. 금석문으로 사현(沙峴)의 양호묘비(楊鎬墓碑)를 썼다.

 

경천군 이해룡의 고가

경기도의 제일 남쪽 끝인 차령산맥 줄기의 산간 마을에 자리잡고 있는 조선후기 주택이다.

마을은 서운산의 남쪽 계곡에 계곡 물을 앞에 두고 약간 경사진 곳에 작은 규모로 이루어져 있으며 마을의 제일 뒷쪽 약간 높은 곳에 집이 놓여 있고 집 뒤로는 경사진 언덕이 시작된다.

집은 'ㄱ'자형의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로 구성되어 소위 튼 'ㅁ'자를 이루고 있으며 사랑채 앞으로 약간의 빈 터가 있고 집뒤 한 단 높은 대지에는 전에 후원을 꾸민 흔적이 남아 있다. 안채 마루도리에 적힌 상량문에 가경(嘉慶)2년 즉 정조21(1797)년에 집을 지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안채나 사랑채는 처음 지어진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안채는 2칸의 대청을 중심으로 우측에 안방 2칸이 옆으로 이어지고 그 앞으로 부엌 2칸이 이어져 소위 곱은자집을 이루며 대청 좌측에는 건너방 1칸이 있다. 건너방 앞의 툇마루는 대청보다 한 단 높게 꾸미고 그 아래로 방에 불을 지필 수 있는 아궁이를 내었다. 사랑채는 건너방과 이어져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1칸반의 ㅡ자형을 이룬다. 우측으로 2칸은 방이고 나머지 끝에 1칸이 마루가 되어 이 마루에서 뒤로 간채 건너방이 연결되며 앞에는 툇마루가 방과 마루를 이어준다. 방의 창문은 머름을 댄 띠살창으로 가공이 정교하다. 사랑채 우측으로 중문이 옆으로 이어지면서 행랑채가 되어 집의 앞쪽을 감싸도록 되어 있으나 행랑채 부분은 근래 벽돌조로 개조되었다. 집 뒤 언덕의 후원에는 자연석이 군데군데 놓이고 약간의 평지를 이루어 자연스런 맛을 남기고 있다. 2000년에 완전 멸실되었으나, 2006년 11월에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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