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둘레걷기(완)

북한산둘레길1

돗가비 2010. 9. 12. 21:22

제주도 올레길이 몇 년전 생겨나면서 엄청난 인기를 얻고 파급효과가 전국 단위로 미치기 시작하면서 여기저기 온 나라에 둘레길이다 올레길이 생겨나고 있다. 예전에도 성남시계등산로나 여타 작은 길들이 생겨난적은 있었으나 그건 순전히 산악회 등의 산행기록을 위한 아마추어적인 발상에서 흔적만을 남기고 있었으나 올레길이 생기고 큰 인기를 얻자 지방자치단체들이 공식적인 길을 예산을 들여서 너도나도 만들고 있다. 물론 이건 좋은 현상인것만은 사실이다. 걷기가 건강을 지키는 지름길이라는 인식이 많은 국민들 머릿속에 자리잡은 만큼 이젠 그걸 뒷받칠해줄 소프트웨어가 생겨나야 하는건 주지의 사실이겠다. 최근 북한산에도 둘레길이 개통되었다길래 한번 다녀와야겠다싶어 맛을 봤다. 길은 13구간에 걸쳐 나뉘어져 저마다 테마를 가지고 있으나 구간마다의 거리에 큰 차이가 있고 걷는 속도따라 한번에 한 구간도 가고 여러구간도 하루에 걸쳐 걸을 수 있기에 구간을 나누는 의미는 크지 않을성싶다. 어떤 이들은 무박산행처럼 어둠속에서 시작하여 하룻만에 걸어버리기도 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둘레길을 지리산 무박종주처럼 자랑거리 삼기 위해 걸을거라면 아니함만 못하리라. 둘레길은 그냥 그대로 살방살방 걸으면서 사람도 보고 자연도 볼 일이다. 그렇다고 13번에 걸쳐 볼 수는 없는 거라서 3번에 걸쳐 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우이령길입구에서 평창마을길까지

100912. 오전 내내 흐리다가 오후부터 갬. 혼자서 가다.

우이동 도선사 입구 버스종점에서 시작된다. 350미터 도선사로 오르다 길을 건너 손병희 선생의 묘소가 앞을 지나면서 둘레길은 제자리를 잡는다. 둘레길은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워낙에 안내표지를 잘해서 길을 잃어 버릴 일은 없겠다. 길도 평탄하고 걷기에 편안하다. 서울 변두리를 돌아가는 길이라서 동네마다 처음 가보는 길이고 낯설다. 사람들이 줄지어 서 가는거라 위험하다고 생각되는 구간도 없다. 동네 마실가듯 편하게 가면 된다. 공단에서 고생한 모습이 역력하기도 하고 가는 그날에도 관리공단 직원들이 폭우로 쓸려 내려간 구간을 보수하고 전부 나서서 쓰레기를 줍고 다니는 모습이 눈에 들어 온다.

산을 끼고 돌지만 가파르게 오르는 길이 없어 누구나 가 볼수 있게 만들어져 있어 좋았다. 가족들이 손잡고 산책을 하는 모습도 눈에 많이 들어 온다.

 우이동 버스종점에서 둘레길로 접어들기 전에 가로등에 저런 표지가 되어 있다.

 둘레길 시작점. 둘레길 가는 내내 확인하면서 갈 수 있게 잘 만들어 놓았다.

 천도교3대교주 손병희선생묘소. 입구는 잠겨 있다.

첫 이정표인데 기점을 바꾸니까 별 의미는 없을듯하다. 숫자가 일정한 간격으로 새워져 있는가보다. 

 거의 대부분의 둘레길은 저런 평탄한 길이다.

 가다보니 동네에 저런 체육공원도 만들어져 있다.

 2구간입구인데 구간별 구분은 할 필요가 없겠다.

 4.19국립묘지.

 4.19국립묘지.

 강재 신숙선생묘소.

 

독립운동가 신숙(申肅) 출생 (1885. 12. 29 경기 가평~1967. 11. 22)

 

 

초명은 태련(泰鍊), 개명은 태치(泰癡). 호는 강재(剛齋)·시정(是丁)·치정(癡丁). 군서기(郡書記)로 약 2년간 근무하다가 1903년 12월 1일 동학(東學)에 들어갔다.

 

1905년 한성대동전문학교 법학과를 수료했다. 1906년 순검(巡檢)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고 〈국민신보〉 기자로 6개월간 일을 한 뒤 약 4년 동안 탁지부 인쇄국 교정원으로 있었다.

 

1907년 김남수(金南壽)·김남로(金南老)와 함께 문창학교(文昌學校)를 설립하여 교장을 지냈다.

 

1910년 천도교 가평 교구장, 1912년 천도교 종학강습소 간사, 1914년 대구 대교구장, 1919년 중앙대종사 종법원 겸 외사원을 지냈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김영륜(金永倫)과 〈기미독립선언서〉를 교정·인쇄하는 데 참여하여 각 지방에 배포했다.

 

1920년 4월 임시정부의 요청에 따라 천도교 대표로서 상하이[上海]에 망명하여 천도교 상하이 전도실을 설치하고 〈천도교의 실사(實事)〉를 간행하여 천도교 선전에 노력했다. 한편 박재혁(朴在赫)을 국내에 파견하여 부산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게 했다.

 

1920년 12월 상하이 대한인거류민단의사회의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임시정부의 외교노선에 반대하고 무장투쟁노선을 주장하여, 1921년 9월 신채호(申采浩)·박용만(朴容萬) 등과 함께 베이징[北京]에서 군사통일회를 조직, 국내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항일운동단체·독립군을 총망라하여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고 이 회의에서 장차 전개될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략을 모색할 것을 주장했다.

 

같은 해 11월 반(反)임정계 요인들에 의해 조선공화정부가 수립되자 국무총리로 임명되었다. 1922년 5월 국민대표회의 준비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했으며, 1923년 1월부터 상하이에서 약 5개월 동안 계속된 국민대표회의에서 창조파의 주요이론가로서 활동했다. 그러나 독립운동방략을 둘러싸고 개조파·창조파·중도파·임정유지파 등이 대립하여 국민대표회의가 진척이 없고, 더욱이 1923년 5월 김동삼(金東三) 등이 국민대표회의에서 탈퇴하자, 부의장으로서 창조파를 중심으로 헌법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김구(金九)를 중심으로 하여 국민대표회의의 무효가 선언되자 다시 만주로 갔다.

 

1924년 만주 교하(蛟河)의 농촌에 정착하여 천도교 납법구종리원(拉法溝宗理院)을 설립하고 학생지도와 농촌계몽 및 교리전파에 힘썼다. 1926년 10월 중동선(中東線) 빈현(賓縣) 이도하자(二道河子)의 삼청궁농장(三淸宮農場)으로 옮기고, 1927년 2월에는 송봉산 개간농장으로 이주하여 신창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이 되었다. 그리고 빈현·쌍성현 지방의 한인농장을 연합하여 쌍빈지방자치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이 되었다.

 

1927년 이우석(李雨錫)·심만호(沈萬湖) 등과 더불어 지린 성[吉林省] 아성 현[阿城縣] 대석하(大石河)에서 농장을 경영하던 중 신민부가 군정위원회와 민정위원회로 나뉘어 대립하자, 그는 민정위원회의 입장으로 3부 통합운동에 참가했다. 1930년 7월 북만주에서 홍진(洪震)·이청천(李靑天)·정신(鄭信)·남대관(南大觀) 등과 함께 한족총연합회를 모체로 하여 한국독립당과 그 산하 무장부대인 한국독립군을 조직하고 한국독립당의 총무위원장·문화부장으로 활동했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제가 괴뢰정부인 만주국을 수립하자 한국독립당은 1931년 11월 긴급중앙회의를 개최, 모든 역량을 항일전에 집중시키기로 하고 중국군과의 연합작전을 전개할 것을 결정하고 신숙을 중국호로군연합군총부(中國護路軍聯合軍總部)에 파견했다.

 

교섭 결과 한중연합군을 편성했는데, 그는 1932년 솽싱푸[雙星堡] 전투에 한국독립군의 참모장으로 참전했다. 1933년 상하이·난징[南京]에 파견되어 중국 국민당정부와 군사협력을 강구했다.

 

1935년 만주로 돌아오던 도중 잉커우[營口]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었으나, 1936년 3월 보석으로 석방되었다.

 

1945년 하얼빈[哈爾濱]에서 한하인(韓荷仁)·한형권(韓馨權)·오광선(吳光鮮) 등과 재만동지회를 결성, 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광복군 본영과 연합작전을 계획하다가 8·15해방을 맞았다. 같은 해 8월 26일 조직된 지린 한국인회의 위원장에 선임되어 교민들의 귀국을 위해 노력했다.

 

귀국한 뒤 1947년 4월 16일 입법의회 의원에 피임되었고, 1948년 4월 남북협상을 위하여 김구·김규식(金圭植) 등과 함께 평양에 다녀왔다. 1949년 1월 천도교 도사에 선임되었으며 만화회(萬化會)를 조직하여 위원장이 되었다. 1956년 11월 15일 이동화(李東華)·장건상(張建相)·최익환(崔益煥)·고정훈(高政勳)·김성숙(金星淑) 등과 함께 민주혁신당을 조직하고 중앙위원에 취임했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았다.  

 둘레길 주변에는 이런 체육공원이 많이 들어서 있다. 둘레길이 마을을 지나고 사유지를 돌면서 생기는 마찰을 줄이기 위해 예산으로 만들어 준 선물인듯하다.

 최근에 내린 폭우로 북한산 계곡에는 물이 넘쳐 흐른다.

 독립운동가 묘소인데 이름을 잊었다.

 이시영선생 묘소 가기 전 다리.

 이시영선생묘와 같이 있는 광복군합동묘소.

 광복군합동묘.

 성재 이시영선생 묘소.

 

이시영선생 년보

개요(1869.12.3 ~ 1953.4.17) 서울에서 태어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였다.

김홍집의 사위. 본관 경주(慶州) 자 성흡(聖翕) 호 성재(省齋) ·시림산인 (始林山人) 활동분야 독립운동, 정치

출생지 서울 주요수상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962) 1885년 1885년 관직에 나아가 10년간 형조좌랑·홍문관 교리·승정원 부승지·궁내부 수석 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1885년 사마시(司馬試)에 급제

1886년 가주서(假注書) 1887년 형조좌랑(刑曹佐郞)

1888년 세자익위사익위(世子翊衛司翊衛)로서 서연관(書筵官)이 되었다

1891년 (고종28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부승지(副承旨)에 이어 우승지(右承旨)에 올라 내의원(內醫院) ·상의원(尙衣院)의 부제조(副提調)를 겸하고, 다시 참의내무부사(參議內務府事) ·궁내부(宮內部) 수석참의(首席參議)를 역임.

1896년 장인인 김홍집(金弘集)이 살해되자 사직하였다.

1905년 외부교섭국장(外部交涉局長)에 재등용.

1906년 평남 관찰사 1908년 한성(漢城)재판소장 ·법부 민사국장(民事局長) ·고등법원 판사 등을 역임하였다.

1910년 1910년 한일합방으로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자 집안 가솔들을 이끌고 만주 서간도로 망명하여, 교육진흥 및 독립군 양성을 위하여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 설립을 주도하여 항일 독립군의 핵심간부를 양성하였으며, 청산리 대첩의 주역으로 활동하였다.

1915년 류허현[柳河縣]에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신흥 무관 학교, 신흥군관학교)를 설립, 민족 해방을 위한 청년장교 육성에 전력을 기울였다.

 독립군양성에 힘썼다. 1919년 (3·1운동시) 이동녕·조완구 등과 함께 상해에 가서 임시정부를 조직 4월 상하이 임시 정부 수립 후에는 법무와 재무 총장으로 활약하였다

1929년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창당에 참가, 초대 감찰위원장에 피선. 1933년 임시정부 직제개정 때 국무위원 겸 법무위원이 되어 독립운동을 계속.

1945년 8 ·15광복과 더불어 귀국하였다.

그 후 대한독립촉성회(大韓獨立促成會) 위원장으로 활약 1948년 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부통령에 당선. 1951년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의 비민주적 통치에 반대하고,

국정 혼란과 사회 부패상의 책임에 대한 대국민 성명서를 발표하고 부통령을 사임

1952년 제2대 대통령선거에 민주국민당 후보로 입후보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53년 피난지인 부산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국민장으로 정릉(貞陵) 남쪽에 안장되었다. 1964년 묘소를 현 수유리로 이장.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대한 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이 추서되었다.

 이시영선생 묘.

 이준열사 묘소 입구.

이준열사 년보

 

이준 열사는 1859년 12월 18일(음) 함경남도 북청군에서 先親 李秉權, 慈堂 淸州 李氏 사이에서 독자로 출생하였다. 세 살 되던 해에 부모님이 모두 작고하여 이준은 할아버지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열사는 17세 때 고향을 떠나 상경하였다. 한말(韓末)의 어지럽던 시절 약관의 나이에 국운을 걱정하며 정객들과 접촉하던 열사는 대원군(大院君)을 만나게 되고, 열사의 비범함에 매료된 대원군은 열사를 형조판서 김병시(金炳始) 대감에게 소개하였다.

김대감도 열사의 영준한 탁견을 높이 사 자신의 사저에서 수학토록 권유하고 늘 가까이 대하였다.


1884년 열사의 나이 26세 때 함경도시(咸鏡道試)에 장원급제하였다.


1888년 30세 때 고향 북청에 인재양성을 위해 經學院을 설립하였다. 경학원은 후에 북청공립농업학교가 되었다.


1895년 37세 때 우리나라 최초의 법관양성소를 졸업(제1회)한 후 한성재판소 검사보가 되었는데 강직한 성품과 비리척결의지가 강했던 이준 열사는 고위층의 압력을 단호하게 거절하면서 탐관오리들과 마찰을 빚다가 모함을 받아 33일 만에 면관 당했다.

미관말직에서는 나라의 질서를 바로잡을 수 없음을 통감한 이준 열사는 서재필(32세), 박영효(35세), 이상재(46세) 등과 함께 나라와 겨레를 좀먹는 악질적 탐관오리를 규탄하는 한편, 일제의 침략에 맞서 격렬한 저항운동을 펴 나갔다. 이 운동은 우리나라 민주시민운동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1896년 38세 때 상동교회 청년회장직을 맡았고, 이 후 을사보호조약 반대투쟁 때에는 상동교회에서 전덕기(全德基 22세) 목사와 상소문을 작성하는 등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신앙심은 열사의 희생정신과 불굴의 용기 그리고 공사생활에서의 공정함을 유지하는데 큰 버팀목이 되었다.


같은 해에 이준 열사는 「독립협회」평의장 직을 맡아 서재필, 이승만(22세)과 함께 독립신문을 발간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면서 가두연설을 통해 국민계몽을 해 나가다가 반대파의 모략이 거세지자 신변의 위협을 느껴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 대학 법과에 입학하였다.


1898년 40세 때 와세다 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독립협회」에 다시 가담하여 독립협회를 「만민공동회」로 개칭하고, 배일(排日)저항운동을 본격화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준 열사는 비정(秕政) 탄핵 가두연설로 이승만, 이동녕(26세) 등 17인과 함께 투옥 당하였다.


1902년 44세 때 민영환(42세), 이상재(53세), 이용익(45세), 이동휘(30세) 등과 함께 비밀결사 개혁당을 조직하여 일본의 침략야욕을 폭로하면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04년 46세 때 일본이 우리나라의 황무지 개간권을 얻으려 하자 이를 막기 위해 「대한보안회」를 조직, 민중운동을 전개하였고, 대한보안회가 칙령으로 해산 당하자 이를「대한협동회」를 다시 만들어 회장직을 맡아 집요한 투쟁을 전개하여 결국 일본공사로부터 황지문권을 탈환, 황제께 드리는 쾌거를 이루기도 하였다.

이 때 이준을 시기하는 소인배의 무고로 투옥되었다가 황제의 성은으로 특사 출옥되어 「적십자회」 회장을 맡기도 하였다.


같은 해, 일본에 붙어서 한몫 보려는 매국집단인 일진회(一進會)의 집요한 방해공작에 맞서 「공진회(共進會)」를 조직하여 회장직을 맡아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민권확립, 자유신장을 내세우며 친일파 대신들이 일삼는 가혹한 징세. 재물약취 등의 비리를 서슴없이 탄핵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항일투쟁과정에서 간신들의 모함에 빠져 검거된 뒤 3년 형을 받고, 6개월간 황주의 고도(孤島)인 철도(鐵島)에 정배당하기도 하였다.


1905년 47세 때 이준 열사는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의 영애 ‘아리스'의 내한을 계기로 ‘한미공수동맹'을 제창하였다.

같은 해 이준은 민영환과 상의한 후 을사보호조약 반대를 위한 국제적 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상해로 건너갔다가 민영환이 순국자결하였다는 연락을 받고 통곡하면서 귀국하였다.


1906년 48세 때 이준 열사는 「만국청년회」 회장에 취임하여 국제친선운동을 전개하였고, 정부에 ‘國政 구폐 진언서'를 제출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에 「국민교육회」회장에 재선되어 이동휘(34세), 이갑(30세), 안창호(27세), 유근(46세), 유정수(51세), 유승겸(31세), 홍재기(34세) 등과 국민교육운동을 전개하면서 「보광학교」를 설립하였으며, 이러한 움직임에 따라 전국 각지에서 보광학교의 야학제도와 같은 학교들이 우후죽순처럼 설립되었다.


이준 열사는 한북흥학회 회장으로 서우학회와 합동하여 「서북흥학회」를 발족하고, 이갑, 안창호, 이종호(22세) 등과 교육사업에 총력 집중하면서 서북흥학회를 모태로 「오성학교」(지금의 건국대학교 전신)를 설립하였으며, 「광신중상업고등학교」를 설립하였다.


같은 해인 1906년에 「법안연구회」회장에 취임하여 법안과 법 운영 등에 관해 연구하였고, 이어서 법안연구회를 확대시켜 홍재기 등과 함께 「헌정연구회」를 조직, 회장에 취임하여 헌법을 속히 실행하여 인권과 자유가 보장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같은 해에 이준 열사는 평리원 검사를 잠시 거쳐 곧 특별법원 검사에 취임하다. 그 때 열사는 정부에 인재등용론 제안서를 제출하는 한편 법무대신 이하영에게 권고문을 보내어 법조계와 일반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이준 열사의 호법정신(護法精神)은 곧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생명적 가치인 법치주의와 준법의식의 실천이었다는 점에서 실천적 선각자의 표징이 되고 있다.


이준 열사가 친일파에 굴하지 않고 투쟁하자 친일파의 공격대상이 되었다. 이 사건으로 친일단체 일진회의 모략으로 이준은 매 70대에 면관처분이 내려졌는데 고종황제가 이를 알고, 면관을 불허하여 매 70대를 얻어맞았고, 매를 맞고도 태연하게 평리원 검사로 출근하여 반대파들이 혀를 내둘렀다.

고종황제는 이준 열사의 높은 기상에 감복하였고, 친일파들은 이준을 감옥소에 보내려고 온갖 모략과 감시를 하면서 끈질기에 괴롭혔다.


1907년(49세) 도산 안창호(30세)와 비밀결사를 조직하였고, 안중근(29세)의 청으로 진남포의 삼흥학교에서 애국강연을 하기도 하였다.


같은 해 이준 열사는 친일파이자 탐관오리인 이하영, 김낙헌을 고발, 공개재판에서 준엄하게 그 죄상을 추궁하였다.


같은 해 이준은 「국채보상연합회」 회장에 취임하여 일본에서 얻어온 차관을 상환코자 국민에게 그 필요성을 호소하는 등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였다.


같은 해 「자강회(自彊會)」주최 기독교청년회에서 “생존경쟁” 제하의 국민자각촉구 명연설을 하였고, 같은 해 “한국혼 부활론”을 저작하였다.


같은 해인 1907년 5월 이준(49세)은 고종황제의 위임장인 밀조(密詔)를 봉대한 특사가 되어 비밀리에 서울을 출발하여 1907. 5. 21.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에서 이상설(38세)을 만나 시베리아를 거쳐‘페테스브르크'에서 이위종(21세)과 합류하여 러시아 황제에게 고종의 친서를 전하고 1907. 6. 25.에 헤이그에 도착했다.

이상설 선생은 의정부 참찬을 지내다가 간도에 가서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여 교포자녀 교육에 힘쓰고 있었고, 영어, 불어, 러시아어에 능통한 이위종 선생은 페테스부르크 주재 한국공사관 참사관을 지내다가 을사조약으로 공사관이 철수한 후에도 러시아에 남아있었다.

3인의 사절은 헤이그에서 각국 대표와 언론에 을사조약의 부당성과 불법성 그리고 일제의 침략성을 알리는 활동을 하였고, 7월 14일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여 일본의 침략행위를 세계에 호소하였으나 열국의 냉담한 반응에 할복 자결로 대한인의 독립의지를 보여주었다.


일제는 이준 열사의 사망에 대해 병사라는 소문을 퍼뜨렸고, 일제의 조선통감부는 궐석재판을 통해 작고한 이준 열사에게 종신징역형을 선고하였다.


열사가 가신지 38년째인 1945년에 조국광복이 이루어졌고, 바로 그 해에 독립협회 사건 때 이상재 선생에게 무죄 선고하여 파면된 전력이 있는 독립투사 함태영(뒤에 부통령이됨)선생이 중심이 되어 본 이준열사기념사업회를 결성하였다.


열사가 가신지 55년째인 1962년에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으며,


열사가 가신지 56년째인 1963년 10월 4일 헤이그에서 열사의 유해를 모셔다가 국민장을 거행하고, 서울 강북구 수유리 묘소에 안장하였다.

 이준열사 묘.

삼성암 오르는 길의 계곡.

빨래골. 삼성암입구 계곡이 빨래골인데 옛날 무수리들이 빨래를 하였던 곳이다. 이 계곡은 물이 많은 곳이라 무너미라고도 불리웠다고 한다.  

둘레길 걷는 동안에 처음이자 딱 한번 북한산 능선을 볼 수 있었다. 

 

평창동 형제봉입구에서 하루를 마감하였다. 둘레길만 잽싸게 둘러보자면 더 진행할 시간이었지만 독립투사 묘소 몇 군데 둘러보고 삼성암을 보면서 시간을 조금 지체하였다. 둘레길은 구간을 구태여 구별할 필요도 없을것이고 지리산 천왕봉을 오르듯 후딱 올라갔다 갈길 바쁘게 내려서듯 할 필요도 없다. 자기의 테마를 정하고 길을 정해서 둘러봐야 할 곳은 길에서 조금 벗어나더라도 이번 기회에 둘러보아야 한다. 오늘도 둘레길에서 벗어나 구경도 하고 밥도 먹으면서 더 걸었기에 거리를 단축하였다. 서울에 살면서도 가보지 않은 곳이 많기 때문이다. 신발과 복장은 가볍게 하고 걸을일이다. 먹을걸 잔뜩 챙겨와서 길거리에 주저 않아 먹을 필요도 없을일이다. 물 한 병 들고 과일 조금 넣고 시작하면 된다. 가다가 배고프면 동네 마을에 들어가 사먹으면 된다. 수유1동 빨래골 버스종점 부근에 식당이 없어 동네로 한참 내려서다 허름한 식당이 보여 점심을 먹었다. 설렁탕이나 찌게를 하는 곳인데 김치찌게가 먹을만하다. 둘레길이란 사람사는 것도 느껴봐야 한다. 자연을 보고 느끼는것만이 능사는 아니렸다. 내가 살지 않는 동네에 들어가도 보고 먹을것도 먹어보고 사람구경도 해보면 싶다. 세상은 여러 부류의 인간들이 섞여 살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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