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사는 세상/옥당골로 찾아들어

이절(李節)과 공북석

돗가비 2009. 8. 24. 10:47

이절(李節) 과 공북석(拱北石)(대마면 복평리 방축마을)

대마면 복평리 方파提가 있는데 그 옆에 拱北石이라
고 글씨가 쓰여 진 높이 2.4m, 폭 1m 가량의 立石이 있다.

여기에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한다.

조선조 말엽 순조 임금때 방축마을에 이절(李節)이라
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어려서부터 남달리 재주가 있고 용모가 비범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태어날때부터 기구한 운명(運命)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의 부친이 낮잠을 자다가 태몽(胎夢)을 꾸었는데 해(太陽)가 목구멍으로 넘어오는 꿈을 꾸었다. 부인(婦人)에게 그 꿈을 얘기하고 동침을 요구하였으나 부인은 대낮에 무슨 짓이냐고 거절하였다. 그러나 흥분을 억제하지 못하고 노비와 동침하였는데 잉태하게 되었다. 그후부터 노비(奴婢)의 배는 허리띠를 졸라 매게 하고 婦人에게는 걸레를 두둑히 싸매서 출산후(出産後)는 婦人의 소생(所生)으로 위장 양육하였다. 그러나 이 비밀이 탄로가 되어 서자(庶子)임이 밝혀졌다.

옛부터 나라에 일이 있으면 주민은 서울에까지 참여
하지 못하므로 일정한 장소에서 서울을 향하여 절을 하고 나라의 안위를 기원하는 곳이 있었는데 이 마을에서는 선돌에서 북향망배(北向望拜)를 하였다고 한다.

이절(李節)이 11세때 이 사실을 알고 이곳에 공북석
(拱北石)이라 글씨를 써서 각(刻)을 하고 북향망배(北向望拜)에 참여하며 앞으로 커서 나라에 충성할 것을

깊이 간직하고 학문에 열중하였다.

점차 나이가 들어 성년이 되었다. 이절(李節)은 자기
의 처지를 알게 되었다. 자기는 서자(庶子)로서 과거에 오를 수도 없고 집안에서도 대우를 받지 못함을 알게 된 것이다. 자연히 세상을 원망하게 되고 모든 일을 올바르게 받아들이지 않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따라서 마을의 일들에 방해를 하고 심술을 부리기 일쑤였다.

이랫마을과 방축마을 중간에 위치한 언구제(석정마을
 뒤)의 능선을 잘라 방축제의 물을 넘겨 수로를 만들어 섬암마을의 주맥(主脈)을 끊어 풍수지리설에 의한 마을터를 못쓰게 하고 심술을 부렸다 한다. 이와 같은 심술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계속되어 이를 나라에서 알게 되었다. 이와같은 사항을 조사하기 위하여 파견된 관원이 방축마을에 오게 되었다.

이 사실을 알아 차린 이절은 관원이 오는 길목인 「이
래장등」에 하마비를 세워놓고 그곳에서부터 자기집까지 화문석(花紋席)을 깔고 영접을 하며 관원을 놀라게 하였다. 또 자기집에 머무는 동안 아침 저녁 새로운 반상기로 접대하니 관원이 그를 시험하기 위하여 반상기를 모두 방축제에다 던져 버렸다. 그러나 이 사실을 미리 탐지한 이절(李節)은 방죽안에 그물을 쳐놓아 그릇을 건져내니 관원이 그이 비범한 계략에 놀랐다고 한다.

후세 이 고장 사람들은 이절(李節)을 기인(奇人)이라
부르고 있다.(이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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