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한국의 전통적인 소리에 춤 /재담 /몸짓을 가미한 연극의 일종인 창무극의 창시자이며 그것을 해학과 풍자로 승화시켜보는 이로 하여금 감동과 기쁨의 도가니로 빠뜨려 버리는 한국판 천의 얼굴을 가진 명인으로 일컬어 지고 있다.
인간의 껍질을 과감하게 벗어버리는 춤
고통스러운 삶의 몸짓이 춤으로 표현되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웃게도 울게도 한다. 그녀의 삶이 그렇듯 공옥진 몸짓과 표정에도 꾸밈이 없다. 인간의 껍질, 고통과 슬픔의 껍질들을 과감하게 벗어 그녀의 1인 창무극은 솔직하면서도 기교를 부리지 않는다.기교가 없다는 것은 예술적인 아름다움이 결여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어느 고전 무용가에게 공옥진의 춤에 대한 이야기를 넌즈시 물어보았다.
그리고 그 고전무용가에게 당신도 공옥진처럼 춤을 출 수 있겠느냐고 물어 보았더니, 부끄러워서, 나는 그런 춤 못춰요라고 잘라 말했다. 바로 그런 점이다. 다른 춤꾼들은 부끄럽다는 이유로 추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옥진은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아무데나 누구앞에서도 놀이꾼의 얼굴을 벗어 버릴수 없는 철처한 공연의 주역같은 데도 있다. 그는 사람들을 웃겨야 직성이 풀리고 울려야 진짜 얘기를 한 것 같은 흡족감을 얻는 사람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가 갖고 있는 술수는 무궁무진이다. 그러나 그의 춤에는 사약함이 없다. 과장이 있지만 교만함이 없고 꾸밈이 있지만 거짓이 없다. 따뜻한 인정이 있고 인심좋은 주인이 손님대하듯 풍성한 반가움이 있다.
공옥진은 1933년 전남 승주군 송광리 추동에서 판소리 명창 공대일(남도 지방 문화재)씨의 4남매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공옥진은 국악의 명문가 집에서 난 만큼 일찍부터 소리를 배웠다. 손 잡고서 걸음마가 될 무렵 머리말에 장고와 북소리가 끊이질 않아 귀 장단이 익긴 하였지만, 무턱대고 소리를 배우지는 않았다. 공창식, 공기남이 다 집안간이라서 승주 지방에서는 밥상을 넘나들지 못 할 정도로 사람이 북적거렸는데 아버지인 대일한테서 단가 전국 명산, 옥루사창을 온종일 무릎 꿇고 배웠다. 간간이 춘향가도 익혔지만 춘향가는 단가를 먼저 배우고서 배우라는 호령이 떨어져 그만 어깨너머로 아니면 광목이불의 찬 속에서 사설을 익혔으나 독공한 탓이라 쉽게 내용이 들어오지 않고 장단이 잘 안 맞았다.
사랑채에서 심부름을 하다가 제자들의 소리를 따라도 해 보았으나 안 되어서 부엌에서 군불을 때다가 부지깽이로 장단을 쳐가며 불러 보기도 했다.
이때 마침 한성준에게 보름 동안 장고 춤과 살풀이 춤을 배운 최승희가 일본에서 잘한다는 소문을 듣고서 뱃삯으로 당시 돈으로 20원을 주고 일본으로 가서 겨우 내린 곳이 시모노세키였다. 극장 앞에서 온종일 기다려도 안 나와서 뒷문 분장실로 가니 댕기머리 땋은 여자아이(공옥진)를 받아 들일 수 없다고 감독이라는 사람이 밖으로 때다 밀어버렸다. 겨우 만나보기는 했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일행과 함께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다(이때 나이가 10세 전후였다.)
살풀이 춤을 배우기는 했으나 어쩐지 발 디딤새가 엇나가고 장단 역시 신무용을 한이라 그런지 맞지 않아서 교포가 사는 집에 들어가일을 해 주다가 공연이 끝나면 돌아와 연습을 해 보기를 여러 날을 해 보았으나 구름 속에 결을 잡는 격이 되어 버렸다. 옥진은 속 생각으로 '그래도 우리 한압씨(할아버지)가 이전에 소리 명창으로 날렸는디 되잖은 것덜이 사람 우습게 본다'고 생각하고서 관부연락선을 타고서 고향으로 되돌아와 버렸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아버지 공대일씨는 소리와 판에 재주가 있는 딸을 국제적으로 이름난 최승희밑에 두면 춤을 배워 유명해지리라는 생각을 한 것 같지만, 사실은 아버지가 징용가게 되어 집안의 어려운 살림에 최승희가 준 돈이 도움이 됐고, 그 밑에 가서 하녀노릇을했으니 팔려간 셈이라는 것이다. 와보니 집안에 난리가 한 바탕 난 것이다. 이제 시집을 막 보내려고 하던 참에 딸이 집을 나갔으니 부모 걱정이 태산 같을 것은 불 보듯 뻔한 이치라, 끈 떨어진 짚신을 한 쪽은 들고 한 쪽은 신고서 도둑 고양이 마냥 아버지가 소리를 가르치는 방 가까이 가서 가만히 들으니, 한숨을 내쉬며 들이쉬며 보기에도 딱할 정도였다.
이러구러 사정얘기를 하고 난 연후에 목침을 갖다 놓고서 배우기 시작한 것이 심청가였다. 공대일은 협률사가 해체된 후로 지방에 협률사가 도처에 생기자 광주에 권번에서 가르치기도 하고 협률사의 단원으로 공연을 하기도 하였다.
25세 무렵까지 죽 한 그릇을 먹으면서 소리를 하다가 힘이 부쳐 개울가에 가서 물 한 모금을 다시 소리를 하기도 했으며, 부실한 몸이라 소리하고 나면 목이 부어서 고생을 많이 했다. 그 해에 수궁가를 전 바탕 못 배우고 토끼가 용궁에 가는 대목까지만을배웠다. 전 바탕을 다 배우고 싶어도 아버지가 자주 집을 비우고 또 집에 있더라도 제자들이 와서 배우는 통에 무릎맞춤으로 진득하게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없어서 그대로 도막 소리만을 익혔다.
해방이 되고 나서는 아직까지도 일제 시대 소리꾼이나 연주가, 춤 꾼들이 상당수 살아 있어서 소리 마디와 춤 한상을 배울 수 잇는 계기가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들은 자기 자리를 빼앗길까 두려워서 그랬는지 모르되 한 두 번 가르치다가 그것도 역시 선선한 구석이 없어서 작파 해버리고, 조선성악연구회에서 창극분과를 담당했던 고흥 거금도 태생 동초 김연수가 우리국 극단을 만들어 세상에 나오며 공연을 하게 되자 여기에 아버지가 청을 넣어서 들어가 하찮은 역도 해 보았고 못다한 소리도 배우게 되었다. 호동 왕자가 인기가 좋아 재공연을 하게 되자 노비역을 맡게 되어서 그 재주를 뽑낼 즈음 단원들간에 시기와 질투가 심해서 결국 단체를 6년간 이나 다니다가 다시 화성극단(단장:박영선)에 입단하기도 하고 해님 극단에 갔다가 출연료 때문에 여인숙에 의상을 저당 잡혀서 목포에서 서울까지 걸어 온 적도 있었던 기구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이 당시에는 비온 뒤 죽순 돋듯 많은 창극 단체들이 생겨났는데 이 대 도막 소리를 위주로 해서 정통적인 판소리를 익히기가 어려웠지만 본디 창극의 소리와 정통적 발성인 소리를 구분해서 가르쳤다고 하는 것을 보면 공옥진이 얼마나 소리 공부를 하기 위해서 몸부림 쳤다는 것을 알 수 있겠다.공옥진이 이러한 가시밭길을 걸으면서도 꾸준히 세간의 입질에 오르는 것은 그 재주가 범상치 않다는 것을 말하는데 본디 소리하면서 발림을 하기도 하지만 그렇게는 자주 안 하듯 공옥진의 신명이 바로 이 창극단을 따라다니면서 그 재주가 일취월장 했다고는 볼 수 없어도, 그 타고난 재주가 바로 얼굴에서, 몸짓에서, 소리를 하면서 갈고 닦였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공연이 없는 날에는 아버지한테 배우고, 심청가는 아버지와 김연수한테 거의 다 배웠다. 홍보가는 공대일 바디와 김연수한테서 배웠으며, 수궁가는 임방울한테 용궁 들어가는 대목부터 토끼 배 가르는 대목까지를 배웠다.
흔히 공옥진을 동물 춤이나 배꼽춤이나 추는 이로 허술히 보아서는 그의 진면목을 볼 수 없으며 춤도 하고 소리도 하고 재담과 연기도하는 공옥진의 알짜 모습은 본디 소리꾼의 딸로 태어났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언제나 낮은 자리에 있었기에 지고히 빛나는 예술.
병신춤의 명인이라 부를 만큼 병신춤을 재주로 피워냈고 더불어 원숭이, 퓨마등 동물의 모의한 춤까지 추고 있어 전통연예인이면서 예술적 표현력에 왕성함을 보이는 창작인이기도 한다. 곧 그녀의 몸 여기저기에 모든 재주들을 감고 있어 심청전, 흥부전 등을 일인극으로 엮어 노래와 춤, 연기 모방춤으로 이끌어 낸다. 한평생을 묵힌 술처럼 그녀의 예술은 입에 쩍쩍 달라 붙는다.
그렇다. 그렇기에 그녀의 공연은 언제나 많은 관객을 운집시켰고 그녀의 공연에 그녀도 울고 관객도 울고 관객도 웃고 그녀도 웃는다. 언론이 주목했고 호사가들의 입에서도 감탄사를 자아내게 하는 명인이지만 사실 그녀의 삶은 평범하기 이를데 없는 시골의 억척스런 할머니이다.
공옥진 프로필
1931 승주군 송광면 추동리에서 남도 인간문화재인 공대일 명창의 4남매 중 둘째딸로 태생(조부는 광주의 김채만을 사사, 서울 협률사 초기 멤버이던 공창식 명창)
1938~1943 최승희에게 사사 |
1945~1947 조선 창극단 입단 |
1948 고창 명창대회 장원 |
1953~1955 구례 천운사 입산 수도 |
1957~1963 임방울 창극단 협률사 입단 |
1961~1963 김연수 우리국악단 입단 |
1964~1966 김원술 안성국악단 입단 |
1966~1967 박연수 국극 협회 입회 <처녀별>,<바다로가는사람>,<동명성왕>,<흑진주>,<장화홍련전> <해방가>,<심청전>등 창극에서 주역 |
1967~1968 일본 순회 공연 |
1978 공간사랑 1인 창무극 |
1983 문예회관 대극장 1인 창무극 |
1985 세종문화회관, 1인 창무극 |
1991 호암아트홀 1인 창무극 |
1993 미국/영국/중국/일본 등 순회 공연 |
1994 런던페스티발 국제예술제 한국 대표외 미주 및 동남아 순회 공연 |
1995 미국 카네기홀 공연 |
1996 서울 두레 소극장, 1인 창무극 |
1996 공주 아시아 1인극제, 1인 창무극 '심청전' 현재 전남 영광군 예술 연수소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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