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락셋터(영광읍 신하리)
벼락셋터는 영광읍 신하리에 있다. 여기에 얽힌 얘기는 다음과 같다.
영광(靈光)에서는 비가 오지 않으면 염산면 야월리 신초부락 앞 해중제단(海中祭壇)에 군수(郡守)가 제관(祭官)이 되어 용왕수신(龍王水神)에게 기우제를 지냈다. 제관(祭官)은 비가 오기전에 영광읍성(靈光邑城)안으로 들어서야 한다. 들어서지 못하면 벼락을 맞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래 내려오는 동안에 헤아릴 수 없이 기우제는 지냈으나 비는 오지 않았다. 그 까닭은 제관(祭官)이 벼락을 맞지 않기 위하여 바닷속 깊이 제단(祭壇)
에 까지 가지 않고 해변에서 돼지를 물속에 넣고는 재빨리 돌아오는 정성(精誠)없는 기우제를 지냈지 때문이었다.
그러기를 계속하다가 지금으로부터 약 280년전 임호군수(林濩郡守)때였다. 백성(百姓)은 계속되는 가뭄에 대흉년을 맞아 기아에 허덕이고 있었다. 임군수(林郡
守)는 명산을 찾아 기우제를 지냈으나 비는 오지 않아 人心은 날로 흉흉해져 갔다.
임군수(林郡守)는 마지막으로 신명(身命)을 바쳐 용왕수신(龍王水神)에게 기우제를 지내기로 작심하고 염산면 신초부락 앞 수중제단으로 길을 텄다. 임군수(林
郡守)는 바닷속 깊이 있는 제단(祭壇)에 이르러 제물(祭物)을 바치고 용왕수신(龍王水神)에게 이렇게 빌었다.
"용왕님 꼭 비가 내리게 해주소서. 지금 백성들이 기아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내 신명(身命)을 바쳐 드리는 祭이오니 비를 내려 이 불쌍한 백성들을 구해주소서…."
이와 같이 간절한 기도를 드리고 걸음을 재촉하여 돌아오는 길이었다. 영광읍성(靈光邑城)이 눈앞에 보였다. 그때 바로 하늘에서 검은 먹구름이 일고 폭풍우와 함께 뇌성벽력이 치면서 임군수(林郡守)가 벼락을 맞아 말위에서 떨어져 죽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백성들은 다같이 슬퍼했다. 그해는 우순풍조하여 대풍(大豊)이 들었다. 백성들은 임군수(林郡守)가 身命을 바쳐 기우제를 지낸 덕분이라고 얘기했다. 그의 공(功)을 못잊은 백성(百姓)들은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쇠숟가락을 앞다투어 모았다. 임군수(林郡守)의 선정비(善政碑)는 후일 많은 목민관(牧民官)의 귀감이 되었다. 이 비(碑)는 일제때 파손되었으나 해방후 靈光 士林의 뜻을 모아 군청(郡廳) 경내에 다시 세웠다.(이기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