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감관과 자라바위(영광군 대마면 성산리 평금마을)
조선조 중엽에 지금의 영광군 대마면 성산리 평금마을에 이감관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에게는 재산이 넉넉하여 남부럽지 않게 잘 살았으나 슬하에 일점 혈육이 없었다.
그는 자식이 없으므로 외로운 생활로 지냈으나 마음씨가 착하고 도량이 넓어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처지였다. 마을에 어려운 일이 있거나 이웃의 어려운 사정을 보면 자기 일처럼 돌보아 주었고 흉년이 들면 가난한 이웃을 돌보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하루는 마을 사람을 모아놓고 "우리가 이렇게 모여 사는 것도 서로의 인연이 맺어진 것이니 이웃간에 서로 돕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마을이 잘 살고 서로 화합하여 우리 마을의 수호신을 모시는 제단을 만들어 마을의 안녕과 주민의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하였다.
이 말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처음에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생각해 보니 그럴싸한 일이라 생각이 되어 "좋을대로 하십시다" 하고 서로들 호응을 하였다. "그러면 어떤 방법으로 제단을 만들어야 하겠습니까?"하고 서로들 호응을 하였다. 이감관은 "우리 마을을 소호하는 신의 제단을 소흘히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내 자식은 없으나 이 마을을 위해서 평소 생각한 바 있습니다. 우리 마을이 평지에 있고 들이 좋으니 후손들이 오래오래 평안히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거북이형의 제단을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이 일은 나에게 맡겨 주시기 바랍니다." 마을 사람들이 생각해 보니 이감관이 본래 남다른 데가 있고 솔선해서 만든다 하니 반대할 이유
가 없었다. 이감관은 이내 고산아래에서 자라 모양의 바위를 옮겨 제단을 만들고 매년 3월 그믐에 마을 공동제를 지내게 되었다.
이로부터 수년이 지나 마을은 재앙이 없어지고 차츰 부자 마을이 되었다. 그리고 서로 돕고 협조하는 기풍이 일어나 인심좋은 마을로 변하였다.
어느덧 이감관은 늙어 자리에 눕게 되었는데 하루는 마을 사람들을 불러놓고 유언하기를 "내 나이 늙어 자식이 없어 나의 재산을 전할 곳이 없으니 모든 재산을 평금 마을의 재산으로 하여 주시오"하고 운명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고마움에 보답하기 위하여 장례를 마을 공동으로 후히 치르고 의논한 끝에 제사는 마을제인 3월 말일로 정하고 마을에서 제사를 지내주기로 하였다.
몇해가 지난 뒤 마을 사람중에 우리 마을이 이 처럼 잘 살게 된 것은 이감관이 마을 제단으로 만든 자라바위의 덕택인데, 지금 자라의 머리가 평금천 쪽으로 향하고 있는데 이 자라머리를 마을 안쪽으로 돌려 놓으면 더욱 더 잘살 수 있다는 설을 주장하여 자라바위의 머리를 마을안쪽으로 돌려 놓았다. 이 일이 있은 후 마을에는 재앙이 일어나고 가정에 화가 미치는 집이 늘어나게 되었다.
이를 지켜 본 주민들은 이는 필시 자라바위의 머리를 돌려 놓았기 때문이라며, 다시 전과 같이 돌려 놓았다. 그후 마을은 다시 평안해지고 아무 탈이 없게 되자 이감관의 신통한 재주와 제단(자라바위)의 영험을 마을사람들은 알게 되었다.
이 마을에 신삼봉(申參奉)이 살고 있었는데, 이와 같은 영험을 보고 느낀 바 있어 이감관의 유산으로 마을 재산이 된 산에서 소나무를 벌채하여 자금을 마련하여 자라바위 옆에 이감관의 송덕비를 세웠다. 지금도 평금마을에는 매년 3월 말일에 동제(洞祭)와 같이 이감관의 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그때 이감관이 기증한 논 500평(坪)이 지금도 마을 재산으로 남아있다.(전재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