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걷는 인생/백팔사찰순례하기

26. 벽송사(함양 지리산)와 서암정사

돗가비 2012. 4. 8. 13:53

120407.

벽송사의 역사

한국 선불교 최고의 종가 벽송사

 

벽송사(碧松寺)는 조선 중종 시대인 1520년 벽송지엄(碧松智嚴) 선사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수행햐여 도를 깨달은 유서 깊은 절이다. 조선시대 불교의 선맥(禪脈)에서 보면 벽계정심, 벽송지엄, 부용영관, 경성일선, 청허휴정(서산), 부휴선수, 송운유정(사명), 청매인오, 환성지안, 호암체정, 회암정혜, 경암용윤, 서룡상민 등 기라성 같은 정통조사들이 벽송사에서 수행교화하여 조선 선불교 최고의 종가를 이루었다.

 

아울러 선교겸수한 대 종장들을 109분이나 배출하여 일명 “백팔조사 행화도량”(百八祖師 行化道場)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벽송사는 지리산의 천봉만학(千峰萬壑)을 앞뒤 동산과 정원으로 하여 부용(芙蓉:연꽃) 이 활짝 핀 것과 같은 부용만개(芙蓉滿開), 혹은 푸른 학이 알을 품고 있다는 뜻의 청학포란(靑鶴抱卵)의 형국에 자리하고 있다.

 

고인이 “운거천상(雲居千上: 구름 위 하늘 세계) 별유천지(別有千地: 인간 세상 밖에 따로 있는), 부용정토(芙蓉淨土:연꽃이 활짝 핀 극락정토에) 조인만대(祖印萬代:조사의 깨달음을 만대에 이어지리)”라는 말로 표현하였듯이 벽송사는 만고에 수려한 풍광 속에 자리하고 있다. 벽송사를 창건한 벽송선사는 태고보우, 벽계정심 선사로부터 내려오는 심인(心印)을 전해받아 조계정문(曹溪正門)의 정통조사가 되었다.

 

선사는 “무자화두(無字話頭)에 의해 무명(無明)을 타파하고 선요(禪要)에 의해 지혜의 병을 떨쳐버렸으니, 간화선 수행법(看話正宗)에 의해 수행하고 깨달음을 얻은 조선의 첫 번째 조사가 되었다. 그래서 벽송사는 간화선의 제일 조정(朝庭)으로서의 역사를 간직산 ‘한국선불교의 근본 도량'이 되는 것이다. 벽송대사의 뒤를 이어 벽송산문의 제2대 조사에 오른 분이 부영영관(芙蓉靈觀)선사이다.

 

부용선사는 도가 높고 학문이 깊어 배우러 오는 승속제자가 문전성시를 이루었는데, 특히 영호남 일대에 부용선사의 가르침을 받은 선비가 수 없이 많아 “전단향나무를 옮겨 심으니 다른 나무들도 향기가 난다”라고 하는 말이 널리 유행하였다. 부용영관 문하에 수많은 제자가 배출되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분이 서산대사라 불리는 청허휴정(靑虛休靜)과 부휴선수(浮休善修)이다.

 

서산대사는 깨달음을 얻은 뒤 벽송산문의 제3대조사가 되어 지리산 일대에서 행화하다 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팔도도총섭이 되어 승군을 일으켜 도탄에 빠진 나라와 백성을 구하는데 전력을 다 하게 된다. 한국 선문의 거장 청허휴정이 벽송조정의 제3대조사라는 사실은 벽송사 사적의 백미가 아닐 수 없다. 서산대사 문하에 사명대사와 청매조사도 이곳 병송사에서 오도하여 크게 불법을 떨치게 된다. 그리고 부용영관의 다른 한 사람의 수법제자인 부휴선수선사 또한 벽송사에서 도를 깨닫고 벽송산문의 조사가 되어 오랫동안 지리산에서 행화하였다.

 

오늘날 한국불교 출가스님의 모두가 서산문파와 부휴문파에 속한다. 서산과 부휴 양대조사가 모두 벽송사 출신이라는 사실은 벽송사가 조선불교의 종가(宗家)임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그래서 예로부터 벽송사를 가리켜서, “조계조정(曹溪朝庭), 벽송총림(碧松叢林), 선교겸수(禪敎兼修), 간화도량(看話道場)”이라고 불렀다.

 

1704년(숙종30년)에 환성지안(환성지안)대사가 벽송사에 주석하며 도량을 크게 중수하였다. 이 때에 불당, 법당, 선당, 강당, 요사 등 30여동의 전각이 즐비하였으며, 상주하는 스님이 300여명에 이르렀고, 부속 암자는 10여개가 넘었다고 전한다.

 

이로부터 금대암에 선원이 개설되어 수선납자가 운집하고, 벽송사 본당에는 강원이 개설되어 근세 일제강점기까지 지속되었으니, 근 300년 동안 조선불교 제일의 총림이 이루어져 선교겸수(禪敎兼修)의 중심도량이 되었다. 이로부터 선교를 겸한 대종장들이 벽송사에 수선안거하면서 후학들을 지도하게 되니, 강당을 거쳐 간 강주(講主)스님 만도 약 100인이나 되니 학인과 납자의 수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그리고 근대에 선지식이신 경허선사도 벽송사에 주설하며 서룡선사 행적기록을 집필하였다.

 

특히 벽송사 강원의 마지막 강주를 역임한 초월동조(初月東照)대사는 일제 강점기에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혜화전문학교의 교장을 역임하였으며 이후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옥고를 치르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일제 조선불교 말살정책으로 인해 400여년간 지속되어 온 한국불교 최고의 조정인 벽송사의 사세도 기울기 시작했다.

 

특히 한국전쟁으로 시작된 지리산 빨치산들의 암약(당시 벽송사는 빨치산의 야전병원으로 이용됨)으로 말마암아 국군에 의해 방화되어 완전 소실되는 슬픈 역사를 맞이하게 되었다. 60년대 이후 구한원응(久閒元應)대사의 원력에 의해 중건되 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특히 옛날 선종의 최고 조정에 벽송선원을 낙성하여 을유년(2005년) 하안거에 개원하여 눈푸른 납자들이 수선정진할 수 있는 선찰종가(禪刹宗家)로 거듭나게 되었다.

 

벽송사에는 신라 양식을 계승한 3층 석탑(보물 제 474호)과 경남 유형문화재인 벽송선사진영. 경암집 책판.묘법연화경 책판과 경남 민속자료 제2회인 목장승의 문화재가 보존되고 있다. 특히 목장승은 변강쇠와 옹녀의 전설이 깃들어 찾는 이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선방뒤 탑전앞에 천년의 세월을 묵묵히 서 있는“도인송(道人松)”과 “미인송(美人松)”의 전설 또한 유명하다. 예로부터 목장승에 기원하면 애정이 돈독해지고, 도인송의 기운을 받으면 건강을 이루고 한가지 소원이 이루어지며, 미인송에 기원하면 미인이 된다는 말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리고 벽송사 선방에서 도인이 유래없이 많이 나와서 “선방 문고리만 잡아도 성불한다”는 말이 여기서 생겨났다고 한다.

조선 선불교 최괴의 종가인 벽소사를 참배하여 묵은 업장을 소멸하고 청복(靑福)을 담아 성불인연을 가꾸어보자. 아울러 벽송사 목장승과 도인송, 미인송의 기운을 받아 건강과 소원을 성취하면 더욱 좋을 것이다.

 

 

 

 

 

 

 

 

 

 

 

 

 

 

 

서암정사의 유래 -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민족의 미극이 유난히도 치열하고 깊었던 이곳 지리산(智異山), 1960년경 전화(戰禍)가 지나간 지 한참 뒤이지만 산간오지(山間奧地) 두메산골인 벽송사(碧松寺) 주변에는 아직도 전쟁의 상흔(傷痕)이 곳곳에 남아 있다. 그러나 대자연(大自然)의 섭리가 인연(因緣)에 사로잡인 인간들의 희비에 개의치 않나니, 한 때 천지를 진동하던 총성과 온 산을 뒤덮었을 포연(砲煙)의 폭풍이 휩쓸었을 이곳에도 언제 그런 일이 있었나는 듯 산새가 지저귀고 봄이 오니 꽃이 핀다.

 

오늘날 서암정사(瑞庵精寺)가 있게 된 것도 역시 억겁(億劫)의 인연과 대자연이 빚어낸 조화의 한 그림자가 아닌가 한다. 문득 지난 일을 회상하니, 벌써 40여 년 전이다. 내 어느 날 복잡한 도시인 부산을 뒤로하고 청산(靑山)에 파묻힐 양으로 심산유곡(深山幽谷)의 수행처(修行處)를 찾아 정처 없이 흰구름 따라 발길 닿는 대로 온 곳이 여기 벽송사다.

 

인적도 드물어 한적한 산사(山寺)벽송사, 때로는 감자를 심어 끼니를 때우고 몸소 흙더미를 치워가며 이어지는 수행생활은 고달프기 그지없다. 너무 힘이 들고 갈등도 많이 생겨 여기를 떠나버릴까 하는 마음이 몇 번이나 일어나기도 한다. 하지만 그때마다 비가 새는 법당에 탈금(脫金)이 다 되어 새까만 모습으로 초라하게 앉아 계신 부처님을 들여다보며 망설이기를 거듭하면서 그럭저럭 눌러앉아 "여기가 또한 인연지(因緣地)려니."여기고 폐허를 수습하다 보니 어언 10여 성상(星霜)이 훌쩍 흘렀다. 구석구석 묵은 쑥대가 나부끼는 1970년대 초의 어느 포근한 봄날 오후, 선정(禪定)에서 일어나 조용히 경내를 거닐면서 한 발짝 한 발짝 잊혀져 가는 묵은 옛길을 따라 알 수 없는 무슨 기운에 이끌리듯 와서 멈춘 곳이 바로 오늘의 서암정사 터다.

 

석굴법당 조성造成 경위

 

이곳이 만년도량(萬年道場) 의 성지(聖地 )임을 확신하고 산승(山僧)이 도량 주변을 조심스럽게 살피던 중 사람이 일부러 깎아 놓은 듯 한 거암, 즉 지금의 석굴법당 전면(前面)에 다다른 순간 몸과 시선이 굳어진 듯 멈추었다.

"여기로구나, 아! 좋구나...."

조용히 눈을 감고 부처님의 영산회상, 그리고 아미타상을 상상했다. 지극한 마음으로 한없이 기도하면서 염원(念願)의 심층에서 떠오르는 어떤 영상(影像)을 느끼니 바로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세계(世界)로다.

 

전쟁의 참화(慘禍)로 이 주변 지리산에서 희생된 무수한 원혼(寃魂) 들의 마음의 상처를 달래고 남북의 첨예한 대립의 벽을 허물고, 나아가서는 모든 인류(人類)가 부처님의 대자비(大慈悲) 광명 안에서 평화로운 이상사회(理想社會) 가 실현되기를 발원(發願)하면서 부처님을 조성하게 된다.

 

조성과정의 이야기들

 

서암정사는 대자연의 섭리가 빚어낸 조화로 준비된 장소에 여러 사람들의 크고 작은 공덕이 보태지면서 비로서 오늘날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30여년 전 불사(佛事)를 시작한 이래 적지 않은 난관과 고초를 겪었지만 좌절하지않고 장엄한 사찰을 조성할 수 있었던 것은 불보살의 보살핌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여러 사주 들의 정성어린 물심양면 공덕과 더불어 석공들의 공덕을 들지 않을 수 없다. 홍덕회, 이종원,이승재, 이금원, 이인호, 맹갑옥 석공은 지극한 정성과 노력으로 한치의 흘림 없이 조각을 완성했다.

 

석굴법당의 아미타 본존불은 이승재 석공이 시작했고, 본존불 외에 석굴법당의 여러 부조는 홍덕회 석공이 조각했으며 맹갑옥 석공이 조역을 했다. 주산신과 독수성은 맹갑옥 석공이 겉석을 치고 홍석희 석공이 세조각(細彫刻 )으로 마무리 했다. 사천왕상과 비로전은 이종원 석공이 중심이 되어 완성했고 배송대는 이금원 석공이, 용왕단은 이인호 석공이 각각 조각했다

 

여러 석공 중에서 특히 홍덕희 석공은 서암정사에서 10년 이상 머물면서 석굴법당을 위시해 사자굴의 모든 조각을 마무리 했다. 마천면 추성리와 의탄리의 몇몇 인연이 있는 분들은 처음 터를 닦을 때부터 시작해 도량 조성 과정의 크고 작은 일에 큰 힘을 보탰다.

험한 장소에서 도량을 조성하다보니 뜻밖의 사고로 자칫 불사가 중단될뻔 한 적도 있었으나, 그때마다 불보살의 도움으로 순조롭게 오늘에 이를 수 있었다.

 

20여 년 전쯤일까. 지금의 사천왕성 맞은편에 있는 돌탑을 쌓을 때였다. 탑 쌍기를 끝낼 무렵 점심시간이 되어 일꾼들을 태워 경운기를 재조한 짐차(일명 탈탈이)를 몰고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오다 브레이크가 고장 나버렸다.

운전자를 포함해 일곱 명이 탄 짐차는 걷잡을 수 없이 언덕길을 미끄러져 내려갔다. 불행 중 다행으로 짐차가 쌓고 있던 탑에 부딪혀 탑을 무너뜨리고 멈춘 덕분에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대형사고를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람을 점검해보니 한 사람이 보이지 않아 자세히 살펴보니 무너진 돌 더미 속에서 옷자락이 내다 보였다. 황급 결에 관세음보살을 염하면서 무너진 돌 더미를 치워내자 탑 쌓는 기술자가 모로 누워 기절한 채 돌 밑에 깔려 있었다. 호흡도 거의 끊어져 있었으나 한 참 뒤에야 돌아왔다. 병원에서 정밀 진단을 한 결과 갈비뼈 3대만 부러지고 다른 곳은 이상이 엇었다.

 

나중에 이야기하기를 이 사람은 사고가 나는 순간 비몽사몽간에 흰옷을 입은 노인이 자신을 밀어 올리는 것을 느낀 것 외에는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입원해 있을 때도 같은 노인이 나타나 밀치는 바람에 병상에서 떨어진 적이 있다고 했다. 상처로 인하여 신체가 허약해지고 정신이 극도로 혼미해질 때 관세음보살이 나타나 정신을 차리게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