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걷는 인생/백팔사찰순례하기

8. 불갑사(영광 불갑산)

돗가비 2009. 12. 2. 23:26

불갑사

 

불갑사 연혁

 

1. 마라난타존자(摩羅難陀尊者)의 전법(傳法) 및 창건(創建)

 

불갑사(佛甲寺)는 호남(湖南)의 명찰(名刹)로 유서(由緖)깊은 고찰(古刹)이다. 삼국시대 백제에 불교를 처음 전래한 인도스님 마라난타존자(摩羅難陀尊者)가 남중국 동진(南中國 東晋)을 거쳐 백제 침류왕 1 년에 영광땅 법성포로 들어와 모악산에 최초로 사찰을 창건하였는데, 이 절이 제불사(諸佛寺)의 시원(始原)이요 으뜸이 된다고 하여 불갑사라고 이름지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옛 백제지역의 고찰(古刹)을 대부분이 백제가 멸망되면서 백제서기가 유실되어 그 창건역사를 고증할 수 없는 것처럼 완벽한 고증은 현재로서는 어렵지만, 불갑사 고적기(古蹟記)에서 불갑사의 최초 창건을 "羅濟之始 漢魏之間"이라고 하여 불갑사가 백제초기에 창건된 사찰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점과, 이 지역에 전해내려오는 구전(口傳)과 지명(地名), 사명(寺名), 그리고 마란난타존자의 행적을 살펴봄으로서 어느 정도의 확신은 가능하다.

 

마라난타존자가 최초 상륙했다는 법성포(法聲浦)의 백제시대 옛 지명은 아무포(阿無浦)로 불리웠으며, 고려시대 부용포(芙蓉浦), 고려말 이후 법성포로 되었다.

아무포는 나무아미타불의 음을 함축적으로 포함하고 있는 지명으로 보인다. 이는 마라난타존자가 중국에서 백제에 당도할 때 아미타불상을 모시고와 처음 도착한 포구가에 모셔 놓았었다는 구전과 마라난타존자가 극락정토신앙과 염불을 중심으로 불법을 교화했었다는 점, 그리고 인도스님에 의한 백제포교의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일본쪽 설화

 

(살아있는 몸을 가진 아이타 여래가 천축에서 교화를 마치고 백제로 날아와 내전 위에 나타나 눈부신 빛을 내어 궁중을 다 비추니...용안이 빛을 잃고 신하들이 혼비백산하였다. 이때 여래가 군신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은 근신하지 마라. 너희 왕이 옛날 천축에서 월개 장자로 있을 적에 극락세계의 나를 청하여 공경하고 공양하였기에 지금 이 나라 임금이 되었으나 향락에 빠져 주야로 악업을 지어 3악도에 떨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너희를 제도하기 위해 이 나라에 왔느니라..."

그 뒤 큰절을 지어 여래를 받들게 되니 비구들이 별같이 절 안에 늘어서서 주야로 경전을 외고 군신이 밖에 구름처럼 모여 조석으로 그 명호를 불렀다. 온 나라 백성들이 오랜 세월 공경하며 예배하였다)

 

는 선광사 연기(善光寺 緣起)의 기록을 볼 때 마라난타 스님은 포구에 상륙한 후 아미타불 정토신앙을 전파했을 것이며 이로부터 아무포라고 불리다가, 불법을 꽃피웠다는 의미의 부용포, 뒤에는 더 명확하게 성인이 불법을 전래한 포구라는 의미의 법성포로 개칭되었다. 그리고 고려 태조 때부터 불리우게 된 영광(靈光)이라는 지명은 우주법계와 억만생령이 본래부터 함유하고 있는 깨달음의 빛이라는 뜻이며, 불법을 들여온 은혜로운 고장이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 또한 아미타불을 다른 말로 "무량광불"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무량한 깨달음의 빛이라는 뜻이며, 영광이라는 말과도 의미가 통하는 것이기 때문에 영광이라는 지명도 불교 명칭이라고 보아야 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 침류왕 원년(384년)에 마라난타 스님이 동진에서 오자 왕이 교외로 나가 궁궐안으로 맞아들여 예경함으로써 백제불교가 시작되었다. 그 이듬해 한산에 사찰을 세우고 열명을 출가 시켰다."

 

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한가지 짚어보아야 할 것은 마라난타존자는 공식적인 국가적 전교사절로 온 것이 아니라면 국왕이 처음부터 마라난타존자를 영접했다고 보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오히려 마라난타존자가 법성포에 당도하여 영광의 법성포 및 불갑사 지역, 나주의 불호사 지역 등 남쪽지역에 교화의 발길을 재촉한 뒤에 당시의 수도인 한산으로 향해 온다는 이야기를 국왕이 듣고 나서 궁궐로 영접해 들여 가르침을 받았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삼국사기에서는

 

"마라난타존자는 여환삼매(如幻三昧)를 얻어, 불에 들어가도 타지않으며 쇠붙이나 돌로 변신할 수 있는 등 무궁무진하게 화현(化現)하였다."

 

라고 하였고, 해동고승전에서는

 

"신통한 이적으로 사물에 감통(感通)하니 그 변화를 헤아릴 수 없었다. 사방으로 돌아 다니는데 뜻을 두어 어느 한 곳에 머무르지 않았으며, 교화의 인연이 닿는 곳이면 아무리 먼 곳이라도 나서서 갔다."

 

라고 하여 마라난타존자의 신통력과 불법전파의 열정을 나타내 보여 주고 있다. 또한, 나주 불호사의 상량문과 단청기에는 마라난타존자 창건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마라난타존자가 법성포로 상륙하여 불갑사와 불호사를 창건한 후 한산으로 올라가 불법을 전파했다고 전래 되어오는 사실을 뒷받침 해주는 간접적 고증자료 이기도하다.

마라난타존자의 불법전래 후 392년 백제 아신왕은 불법을 믿으라는 교령을 전국적으로 내리게 된다.

그 후 약 140년간 불법에 관한 기록은 나타나 있지 않고 단지 미륵 불광사 사적의

 

"백제 성왕 7년(526년)에 겸익이 인도에서 배달다삼장과 함께 범어(梵語)원전 논장(論藏(아비달마))과 5부 율장(律藏)을 가지고 귀국하자 왕은 나라안의 명승 28인을 소집하여 겸익법사와 함께 율장 72권을 번역하게 했다."

 

는 점과, 조선도교사(이능화著)의

 

"백제에서는 고구려와 달리 도교가 발을 붙이지 못할 정도로 불교가 성행하여 승려와 사람이 매우 많았다."

 

고 하는 기록을 통하여 백제시대에 불교가 융성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역시 불갑사도 백제 말기까지 여전히 사원의 역할을 유지하고 수행교화의 도량으로 융성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660년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백제가 멸망할 때 영광지역의 저항이 거세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불갑사도 전화를 면치 못하고 쇠폐했었으리라 짐작된다.

 

2. 행사존자(行思尊者)의 2중창

불갑사의 2창은 행사존자에 의해 700~740년경에 이루어졌다. 혹자는 노승이 법당개연시 "정원원년개조(貞元元年改造 )"라는 대서육자를 보았다는 기록을 토대로 785년으로 보는 경우가 있으나, 이 기록은 2창시 지은 법당을 정원원년에 개조했다는 것이므로 2창은 785년 이전으로 보아야 한다.

행사스님은 당나라로부터 건너 들어와 불갑사를 2중창하고 나서 산너머 함평 용천사를 개창하였다고 하는 기록이 조선중엽 백암성총의 용천사 숙석루계권문에 나타나있다. 이렇게보면 불갑사는 불법의 정맥을 이은 선문의 조종(祖宗) 6조혜능대사의 상수제자인 청원행사스님이 선문(禪門)을 연 곳이기 때문에 통일신라말의 구산선문(九山禪門)이 벌어지기 이전에 벌써 선문의 꽃을 피운 곳이 된다.

 

3. 통일신라말 ~ 고려중기

통일신라말기와 고려초기의 기간동안 불갑사에 관한 현존기록은 없으나,

 

고려말 각진국사가 불갑사에 와서 주석하기전 젊은 시절에 행각하며 잠시 머물렀었을 때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스님은 다음에 마땅히 이 절에 머무실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는 각진국사 비문의 기록을 보면 그 이전부터 절이 존재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또한 고려중기 영광에서 배출된 정각국사 지겸(1145년~1229년)의 존재를 통해서도 고려초 중기까지 가람이 계속 존속되어 온 것을 알 수 있다.

 

지겸(志謙)은 선사 사충(嗣忠)에게 출가하여 금산사로 올라가 구족계를 받았고, 보조지눌, 진각혜심과 교우가 깊었으며 고려 무신의 집권시 최씨무신정권을 교화시켰다. 최근에 그의 저서 종문원상집(宗門圓相集)이 발견되었다.

 

당시 이규보가 국사의 학덕에 대해서 평하기를 진인(眞人)이 나와 도(道)와 합하고 정법안장(正法眼藏)을 얻어 생령(生靈)을 도주(陶鑄)하니, 이는 바로 우리국사라고 하면서 명(銘)을 짓기를,

 

달마의 마음을 전하여 영광(靈光)이 동방에 빛나는데, 후학들은 거꾸로 보니 마치 거울을 등지고서 비치기를 바라는 격이다. 밝고 밝은 국사시여, 태양처럼 걸으시니, 한번 연기(煙氣)를 띄우매 몽매함이 모두 깨우쳐졌다. 법왕이 세상에 출현하시니 조사의 달이 다시 빛나고, 깨닫는 길이 남쪽을 맡으니 배우는 자 돌아갈 곳을 알리라....

 

라고 하였다.

이 비문(碑文)대로라면 지겸스님은 정말로 훌륭한 분으로 사료된다. 그래서 스님의 행적을 사실대로 기록하여 후세 사람들이 오히려 괴이하게 여기고 의구심을 낼까 봐 이규보는 적지 않는다고 까지 했다.

 

4. 각진국사의 3 중창

불갑사의 3중창은 고려말 1341년 각진국사가 주석하면서부터 이루어졌다.

 

각진국사는 송광사의 수선사 제 13 세주(世主)로 계시다가 만년에 하산소(下山所)가 왕명에 의해 불갑사로 정해지자, 평소 따르던 제자 천여명이 몰려들어와 총림(叢林)을 이루게 되었고, 동구(洞口)가 그 무리를 수용하기에 비좁았으며, 이로부터 중창불사를 시작하여 5 백여칸의 거찰(巨刹)을 이루었고 승방 칠십여원, 낭환 사백여주, 31산내암자, 누각높이 90척, 법당은 수백인이 앉을 수 있는 규모가 되었다.

 

각진국사에 의해 가람이 장엄하고 수려하게 가꾸어진 후 불갑사는 불지종가(佛之宗家)라고 불리워졌으며, 호남(湖南)의 제일가경(第一佳景)이요 해동(海東)의 무쌍보계(無雙寶界)라고 칭송되었다. 이에 동(東)에는 토함의 일출(日出) 서(西)에는 연실의 낙조(落照), 동(東)에는 불국(佛國) 서(西)에는 불갑(佛甲)이라는 말로써 산수의 풍광과 가람의 장려함이 대비되기도 하였다.

 

각진국사는 왕이 불갑사를 하산주석처로 내리자 문인 심백(心白), 지부(智孚) 등으로 하여금 배편으로 원나라에 가서 대장경을 구해오도록 하여 충혜왕 2년, 충목왕 4년, 공민왕 1년의 모두 3회에 걸쳐 제방의 고승석덕을 초빙하여 대대적인 전장법회(轉藏法會)를 개최함으로써 나라의 은혜에 전장의 공덕으로 보답하여 복국의 터를 닦았다.

불갑사 3창의 기록을 살펴볼 때 낭환(廊環)이 4백여주의 규모로 서 있었다고 되어있는데 이는 회랑(回廊)이 불국사처럼 가람둘레를 빙 둘러싸고 있었다는 점을 말해준다.

 

그리고 불갑사는 고려시대 중후기 영광은 물론이고 압해, 장성, 삼계, 육창, 해제, 모평, 함풍, 임치, 장사, 무송지역 사찰들의 본사격이었다고 전해진다. 이 사실은 삼계에 현존해 있는 천방사지 오층석탑속의 유물에서 불갑사 말사라는 기록이 나온 것으로도 알 수 있다.

 

5. 조선시대 초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불갑사는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연전히 장엄하고 화려한 사찰이었다.

 

나주, 함평, 영광, 무장, 진원, 장성, 광산의 선비들이 절이 아름답고 고요하며 수석이 맑고 만가가 먼 것을 좋아하여 매일 수십인이 모여 춘추로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으며 과거에 급제한 이가 많이 나왔다고 한다.

 

이로서 오노봉(五老峰)의 백석암(白石菴)이나 구강군(九江郡)의 백록동(白鹿洞)처럼 학문하는 이들에게 이름이 높았으며, 춘추로 온 고을의 부노(父老)들이 자손을 데리고와서 강당에 모여 독법(讀法)을 하고 문루(門樓)에서 음사(飮射)를 하였다고 하니, 불갑사는 스님들만이 즐겨찾아 수행하는 곳이 아니요, 온 고을사람들이 모두 그 아름다움과 싱그러운 기운을 사랑하고 가꾸며 호연지기를 키우고 정신을 수양하던 곳임을 알 수 있다.

 

또한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지내게 되었는데, 태수가 문무관원을 거느리고 절에서 재계하면서 자고 용추(龍湫)에서 제사를 지내면 효험이 있었다고 한다.

 

6. 법릉선사(法稜禪師)의 4중창(重創) 및 해릉(海稜), 채은(采隱), 청봉선사(靑峰禪師)의 중수(重修)

 

 

불갑사는 정유재란의 병화(兵禍)로 절이 전소되어 버리고 오직 전일암(餞日菴)만이 남아 황폐해지자, 선조 31년(1598년) 법릉선사가 불사(佛事)를 발원하여 전각(殿閣)을 중창하고자 하였는데 수은 강항(睡隱 姜沆)선생이 불갑사중수권시문(佛甲寺重修勸施文)을 지어 이 불사를 도왔다. 법릉(法稜)의 4중창불사 이후 법당과 제불전(諸佛殿)이 5개동, 방사(房舍)가 11동, 암당(菴堂)이 11개소나 복원되었다. 불갑사기(寺記)에 이때의 건물명과 배치설명이 되어 있어서 그 당시의 가람 모습을 알 수가 있다.

 

불전은 대웅전, 나한전, 팔상전, 명부전, 관음전의 다섯을 비롯하여 금당이 있었고, 방사(房舍)로는 좌승당(左僧堂), 우선당, 청풍각, 백운당, 문수전, 명경당, 향적전, 향로전, 상실(上室)을 비롯하여 향로전과 상실에 부속된 별실 2동, 비전(碑殿), 양진전(養眞殿) 등이 있었고, 만세루, 천왕문, 금강문이 대웅전과 일직선상에 있었다. 산내암자로는 화재를 면한 전일암을 비롯하여 해불암, 명도암, 증지암, 척선대, 남암, 내원암, 청계암, 불영대, 심적암, 수도암, 오진암 등이 복원되었다.

 

1598년~1623년까지 대웅전 중창 및 전각들 중창복원, 천계 3년 계해(1623년)에 주불(主佛)을 조성하고, 숭정 8년 을해(1635년)에 좌우불상 조성, 숭정 7년 갑술(1634년)에 번와불사를 비롯하여 순치 18년(1661년), 건륭 8년 계해(1743년), 정묘(1747년)에 개금개채가 있었고, 순치 11년 갑오(1654년)에 명부전에 모신 지장보살, 시왕 등이 조성되었으며, 1694년 해릉선사에 의해서 법전중수 및 제전각들이 보수되었고, 1702년 팔상도 제작, 1706년 팔상전 주불 및 좌우보처 조성, 1710년 괘불탱화 및 괘불지주 조성, 1741년 채은선사가 다시 각 전각 및 방사에 대하여 대대적인 보수를 하였으며, 청봉당대선사에 의해서 영조 40년(건륭 29년, 1764년) 대웅전 중수, 팔상전 중건, 영조 41년(건륭 30년, 1765년) 향로전 중창 등의 불사를 마무리하고 1777년(건륭 42년)에 대웅전 후불탱화, 신중탱화, 팔상전 영산회상도, 명부전 지장탱화 등이 조성되었다.

 

만세루는 정유재란 직후 3칸으로 지어졌다가 1644년에 5칸, 1675년에 7칸으로 늘여지어졌고, 1741년 중수, 1802년 중수가 이루어졌다. 또한 도광 2년 임오(1822년)에 팔상전 3중창, 1825년 대웅전 중수 불사가 이루어졌다. 1822년 팔상전 상량문에 보면 불갑사에는 그때까지도 비전, 양진전, 오진암, 전일암, 불영대, 증지암, 해불암, 수도암에 대중이 각 10여명 이상씩 머물러 있었으며, 전체 산내 대중이 100여명에 이르렀다. 법릉선사의 4창 이후 1840년경 까지 불갑사는 본사대중 30여명 각 산내암자 대중 70여명 이상, 도합 100여명 이상의 승려가 수행하는 도량을 꾸준히 유지해 왔으며, 고려말 조선초의 가람 규모나 아름다운 면모에는 못미치더라도 그에 유사한 가람의 풍광을 갖추고 수행납자들의 정진도량으로서, 또한 학문하는 이들의 정진처로서의 역할을 훌륭히 해왔었다.

 

이 시대에 불갑사를 거쳐간 훌륭한 스님들과 학자들이 무수히 많지만 대표적으로는 연화인욱, 청봉거안, 율봉청고, 용암혜언 스님과 수은강항 선생을 들 수 있다.

연화(蓮華)선사는 1650년경 해불암 중수의 공덕이 매우 크며, 백암성 총스님의 모악산 해불암기에 그 내력이 기록되어 있다. 연화스님은 서산대사와 양대산맥을 이루었던 부휴선수대사의 고제(高弟)인 벽암각성 스님에게 법을 인가 받았으며, 그 제자로는 구련선하와 구하처열의 두 도인이 있다.

 

 

청봉(靑峰)선사는 불갑사 중수에도 공덕이 클뿐만 아니라, 서산대사의 5세 법손인 호암대사의 법제자로서 설파, 연담스님과 더불어 선지(禪旨)가 깊기로 이름 높았다.

그 제자 율봉(栗峰)선사는 청봉스님에게 법을 인가 받은 후 금강산 마하연에서 나한들을 놀라게 하였으며, 통도사 등지에 주석하면서 선풍을 드날렸다.

 

율봉스님의 제자 용암혜언 스님은 14세때 숙부 손에 이끌려 불갑사에 글을 읽으러 왔다가 청정한 수행 가풍을 보고 문득 출가할 결심이 생겼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7세에 산너머 용천사에서 출가한 후 다시 불갑사로와 청봉, 율봉스님 문하에서 도업을 이루고, 전국을 유람하며 수행한 후 이적을 많이 보였으며, 1812년 불갑사로 돌아와 화엄대법회를 열었고, 1819년 불갑산중에서 좌선수행을 하니 그 따르는 문도가 많았다고 한다. 조선조 말기의 경허선사가 용암스님에게 법맥을 잇고 있으니, 오늘날 이름높은 수월, 혜월, 만공, 한암스님 등이 모두 그 법손이 되는 셈이다.

수은강항 선생은 불갑사 중수 권시문을 써서 불갑사의 4창불사를 도왔을 뿐만 아니라, 전일암에서 수행하며 개안(開眼)의 경지를 터득했다고 한다.

 

고려말 각진국사 주석시 공민왕이 사방 삼십리의 토지를 불갑사 사원전으로 하사하여 불량답(佛糧畓)으로 하게 하였으나, 조선초 태종, 세종대의 억불기를 당하여 대부분이 몰수 축소되었다. 그러나 정유재란 병화 이후 150년간에 걸친 위와같은 법당 등의 중창불사와 함께 사원 경제력도 축적되어 갔으니, 영조 23년 당시 불갑사는 본사승려 30여명, 산내암자 승려 80여명에 사찰위전답 285필지 27결 81부 1속을 소유한 대사찰로 성장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불량답 18필지 3결 74부 3속을 포함한 원위전답 65필지 5결 6부 7속과 효종 9년(1658년)부터 영조 23년(1747년)까지 만 90년간에 걸쳐 조성해온 조성위답 220필지 22결 74부 4속으로 구성되었다. 불갑사 고적기 뒷부분에는 이와같은 내용을 상세히 기록한 불갑사 전장기가 실려있는데 이것은 조선후기 사원전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러나 조선조 말기의 극심한 훼불기를 당하여 불갑사도 온전하지 못하였으니, 1845년~1868년경까지 약 20여년 이상 승려들이 수행을 못하고 절이 비어있게 되었으며, 이 시기에 건물들이 많이 무너져 내려서 현재의 규모로 축소된 듯하다.

 

7. 설두대사(雪竇大師)의 도량회복 및 중수(重修)

 

 

설두대사(1824~1889년)가 1870년(고종7년)에 각진국사의 주석도량이 폐허로 변해가는 것을 슬퍼하여 단신으로 백양사에서 불갑사로 내려와 절을 되찾고 중창불사를 시작하여 전각들을 보수하였으며, 고창(무장) 연기사터에 있던 사천왕상을 옮겨 모셔와 불갑사에 봉안하였다.

 

설두대사는 동사열전에서 조선조말기 불문(佛門)의 삼걸 가운데 한분이라고 일컬어 졌으며, 백파문하의 용상으로서, 초의선사와 추사 김정희가 사변만어를 지어 백파스님의 선문수경을 비판하자 설두대사는 선원소류를 저술하여 스승 백파스님을 옹호하고 초의와 김정희를 통박하고 나섬으로서 조선후기 선논쟁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추사 김정희선생이 설두대사에게 준 휘호가 현재 백양사에 있는데 백벽(白璧)이란 제(題)하에 "백파문인이 종법을 모아 드날릴 것이니 대기대용 이 두글자를 써서 설두상인에게 주노라"라고 되어있다. 추사선생의 예상처럼 설두문하에서는 근세의 뛰어난 용상들이 많이 나왔으니 다륜, 설유, 금화, 학명, 석전(박한영)스님 등이다.

 

설두대사의 비문에 보면

 

"이 산(모악산)이 작지만 지리산, 조계산과 더불어 정족지세를 이루며, 불갑사가 융성할 때에만 호남의 불법이 흥왕하므로 산이 작다고 경시하지말고 항상 중요시하라고 예부터 전해내려 온다"

 

고 적혀있다. 추사 김정희 선생이 백파스님 문하의 뛰어난 세 스님에게 주라고 법호 세계를 써서 주었는데 다륜, 석전, 만암이었다.

 

설두스님 하에서 다륜, 금화를 거쳐 학명스님(1867~1929)이 배출되었으니, 학명스님은 영광출신으로 1886년 20세에 부모가 죽자 무상을 느끼고 행각에 나서서 순창 구암사에 이르러 당대의 강백 설두유형스님이 40여명의 학인들과 강경하는 모습을 보고 감화를 받아 불갑사의 금화스님에게 출가했으며 1900년 34세에 구암사에서 강석을 열고 몇 해 동안 후학을 양성하였다. 그러나 불교의 대의가 생사 해탈에 있음을 깨닫고 학인들을 해산시킨 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참선하여 큰 깨침을 얻었다. 내소사, 월명암, 백양사 운문암 등에 선원을 설립하고 선풍을 진작하였으며, 그 시대 일본의 대선사 종연스님의 법거량에 상대하여 해동 대선사의 기개를 떨쳐 종연스님의 콧대를 납작하게 하였고, 만년에 내장사에 주석하며 반농반선을 주장하고 백장청규사상을 실천에 옮겼다.

 

금화스님은 뛰어난 선승으로서 광무 8년 갑진(1904년)에 만세루를 개수(改修)하였으며, 1907년 사천왕 탱화를 조성하고, 순종융희 3년 기유(1909년)에 동파스님과 함께 대웅전을 보수하였다. 그리고 영광읍에 불갑사 포교원인 원각사를 설립하고 탱화 5점 등을 조성하였다. 또한 해불암에서 좌선정진 할 때

 

한 겨울에 눈이 많이 와 식량이 떨어지자 신중단 앞에서 "빈도가 박복하여 대중이 굶어 죽게 생겼습니다." 라고 하자 그 다음날 문장에 있는 신도가 쌀 두가마를 지고와서 하는 말이 "젊은 사람 두명이 와서 스님들이 굶어 죽게 생겼다고 말해서 쌀을 지고 왔다."고 하였다

 

는 일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또한 금화스님은 환송스님과 함께 의병활동도 하였다.

석전 박한영(박한영)스님은 일제시대 후진교육에 힘썼으며 대한불교조계종 초대종정을 지내기도 했다.

 

8. 일제 강점기 및 6.25 동란기

 

 

일제 강점기에는 나한전이 무너져 내린 자리에 칠성각이 신축 되었으며, 만암(曼庵)스님이 정축년(1937년)에 후원자리에 있던 명부전을 대웅전앞 중정 좌편 현위치로 이건하고, 개금개채(改金改採)를 한 후 기문(記文)을 남겼다. 1938년 설제(雪醍)스님에 의해 만세루, 일광당 등의 보수불사가 이루어졌다. 만암스님은 백양사의 제 5 창주이며 선교율을 겸수하였고, 조계종 종정을 지내기도 하셨다.

 

1934년 가을 야간에 불갑사 산중에 있던 각 부도가 모두 도굴당하고 파손되어 설호스님이 남아있던 부도 6기를 모아 불갑사 앞 남록에다 옮겨 부도전을 조성하였다.

 

불갑사에는 일제 말기까지도 선원과 강원이 개설되어 정진하는 승려들이 많았었으나, 6.25 동란시 빨치산토벌대에 의하여 산너머 용천사는 물론이고 산내의 암자인 해불암, 불영대, 전일암, 오진암, 수도암 등이 불태워져 버렸다. 이 와중에 해불암에 모셔져 있던 古삼존불상이 불갑사 포교당 원각사로 옮겨 모셔졌다. 그 후 해불암, 불영대, 전일암, 수도암은 작은 규모로 복원되었으나 오진암은 아직까지 복원되지 못하였고, 또한 전일암은 1985년 화재로 인하여 다시 소실되었다.

 

. 수산선사(壽山禪師)의 중수(重修)

 

 

1974년 지선스님에 의해 범종루와 범종이 조성되었고, 1976년경부터 수산지종(壽山知宗) 원로스님이 주석하시면서 각 전각에 대한 번와, 개연 등의 불사가 이루어져 왔고, 현재 복원불사가 진행되고 있다.

 

1976년 대웅전 번와 및 팔상전 개연번와,1977년 사천왕문 개연 번와 및 사천왕상 개채, 1979년 명부전 번와 및 지장보살 시왕 개금개채, 1984년 만세루 개연 및 번와, 1985년 대웅전 삼존불상 원좌대위치로 이운, 1986년 천왕문과 대웅전 보수를 거쳐, 1987년에 나주 죽림사에서 발견된 불사리 3과를 모셔다가 오층사리탑을 조성 봉안하였다.

 

1989년 일광당 보수 및 후원요사 창고 건물 등 신축, 1991년 칠성각, 1993년 팔상전, 1994년 항로전 보수를 거쳐, 1995~1997년도에 만세루 전면 해체보수불사가 이루어 졌다. 현재 1996년 가을부터 양진전, 비전의 복원불사가 진행되어 마무리 단계에 와 있다.

 

그리고 불갑사 정면 남록(南麓)에 위치하였던 부도전터가 음습하여 현재의 부도전 위치로 1994년에 옮겨 모셔졌다.

 

예전에 비전(碑殿)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비림(碑林)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정유재란의 병화와 1845년~ 1868년경까지 절이 비어있을 때 모두 파손된 것으로 보여진다.

 

1. 마라난타대사님 소개

 

백제에 불교를 처음으로 전한 사람은 384년에 동진으로부터 건너온 마라난타(摩羅難陀)대사이다. 그는 중국의 승려가 아닌 인도의 승려로서 중국을 거쳐 백제로 왔으며. 그가 올 당시 동진의 효무제(孝武帝)는 궁 안에 절을 지을 정도로 불교를 깊이 믿고 받들던 군주였다.

 

'해동고승전'에 백제의 왕이 교외에까지 나와서 마라난타대사를 맞아들인 것을 보면 그가 동진 과의 공식적인 문화교류 사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의 불교가 그 당시 고구려가 수입한 도교(道敎)와 습합된 청담격의(淸淡格義) 중국식 불교가 아니라 인도불교가 직수입된 것이 특징인 것은 마라난타대사가 인도승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백제왕이 친히 나가 맞을 정도의 비중 있는 인물이었음에도 중국측 사서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어 그가 중국에 장 기간 채류하면서 활동한 인물이 아니라 그 곳을 경유해 곧바로 백제로 왔음을 알 수 있으며 그가 전한 불교가 순수한 인도 불교 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일본의 현존하는 사찰인 선광사(善光寺)의 창사 연기설화에는 "생신인미타여래께서 천축(天竺)에 화도를 마치고 백제국 으로 날아와서 왕궁의 내전 위에 매우 밝은 빛을 발하여 대궐 안을 환히 비추었다"고 하여 여래 광명이 인도에서 직접 백제의 궁중으로 비천해 온 것을 입증해 주고 있다.

 

'해동고승전'에 마라난타는 인도 출신의 승려이다. 그는 신통력을 가진자로서 그의 수행 정도는 가히 그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스님은 불교를 전파하는데 뜻을 두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면서 교화하였으므로 결코 한곳에 머무르는 일이 없었다. 옛 기록을 살펴보면 그는 원래 인도의 간다라에서 중국으로 들어와 사람들에게 불교의 가르침을 전했으며 향의 연기를 증거로 하여 사람들을 불러들였다. 그는 수많은 어려운 일들을 겪었지만 인연이 닿은 곳이면 그 곳이 아무리 먼 곳이라도 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고 한다.

 

091128. 맑음. 아내와 둘이서.

어제 김장을 하기 위해 시골집에 내려왔다. 그런데 배추랑 무우는 어머님이 다 캐다가 벌써 절여 놓으셨다. 그래 어젠 내려와서 할 일이 없어 대충 다른 집안 일을 하고 보냈다. 오늘은 아침에 일어나 배추를 씻고 여타 양념들을 준비해 놓은 다음에 오후가 되어 시간도 보낼겸해서 불갑사를 갔다. 불갑에서 몇 달을 살았던 적이 있어 옛날도 돌아볼겸해서 갔지만 별로 감흥이 나지는 않았다. 커다란 불갑저수지는 빙돌아서 포장도로가 둘러쳐져 있고 운치있던 저수지의 벚꽃나무와 산들은 다 밀어버려 별 재미가 없게 되어 있었다. 개발이 좋은것만은 아닌데도 모두가 다 뒤엎으려고만 하니 큰일이다 싶어진다. 예전의 불갑저수지를 생각하던 사람들에게는 실망만 안겨주리라 본다. 불갑저수지는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순수한 농업용저수지로는 국내에서도 손가락안에 들어갈 정도로 크고 깊다고 어려서 들은적이 있는데 정말인지는 모르겠다. 하긴 지금은 토목기술이 좋아서 워낙에 크고 많은 저수지가 생겨났을것이다.

 불갑저수지.

 불갑저수지는 보기와는 달리 크고 깊다.

 

수변공원에서 한 컷. 

전에 없던 수변공원인지도 만들어져 있고 볼품없는 장난감수준의 조각품들도 몇 개 있는데 쓴웃음이 입가에 맴돈다. 참 수준낮은 짓을 한것 같다. 새로 생겨난 도로를 타고 가니 불갑사를 가기는 수월하다. 전에는 불갑면소재지를 거쳐야만 불갑사를 갈 수 있었는데 말이다. 불갑사 입구에 가니 관광지를 만들기 위해 억지로 조성해 놓은 공원이 있다. 공연장도 보이고 넓은 주차장도 보인다. 최근에 불갑산 상사화 축제를 대비해서 만들었을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상사화는 꽃무릅으로 알고 있다. 꽃무릇이 절 주변에 많은 것은 꽃무릇 뿌리에 독소가 있어 이걸 약용으로 스님들이 사용하기 위해서 심어진것이라고 하던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일주문이 서 있는데 절과는 한참이나 떨어져 있으며 절의 규모에 비해서는 너무 크게 만들어진듯하다.

 불갑사 일주문. 내가 불갑에 살던 시절에는 없었는데 최근에 세운 듯한 일주문이 엄청난 크기로 서 있다. 불갑사와는 상당한 거리를 두고 덩그러니 서 있어서 위엄이 없고 주변과 어울리지 않아 황량해 보인다.  이 주변이 예전엔 마을이 있었고 민박과 가게를 하며 살아가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 다 어디가고 커다란 주차장을 만들고 입구에 상가를 세운게 놀라웠다.

 불갑사 호랑이 박제에 관한 안내판. 영광에서 태어나 자랐으면서도 영광 불갑산에 호랑이가 가장 늦게 까지 살았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랬다. 그리고 호랑이를 만들어 놓은게 뒤로 보이는데 실물크기로 만든것이라하면 호랑이가 정말 컸다. 작은 소만큼은 하게 커 보인다. 덫고개에서 잡았다고 하니 덫을 놓아 잡았을까? 학계의 도움을 받아 만든 모형이라고 하니 실물크기일까?

 불갑사 들어 가는 입구.

 불갑사 입구와 뒤로 불갑산. 예전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것은 저 다리일듯하다. 다리를 건너기 전에 부도와 비석들이 많이 있었지않나 생각이 들었는데 그자리일듯싶은곳은 꽃무릇밭이 되어 있어 마누라와 나는 의아해하며 의문을 가져봤다.

 보수공사에 들어간 사천왕문.

불갑사는 온통 공사판이었다. 불갑사의 사천왕상이 유명한데 그걸 보호하기 위해 보수공사를 하는 모양이다. 그리고 여타 전각들이 수없이 들어서 있는데 숨쉴 공간도 없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20여년 전에는 너른 대웅전앞 뜰이 참 좋았는데...지금은 여기저기에 집들이 들어서서 오히려 답답하다. 차라리 주변 땅을 사들여서 전각들을 세웠으면 좋았겟다 생각해봤다. 그렇게 불갑사를 구경하면서 실망을 많이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고향에 내려가도 다시는 없는 시간을 내서 불갑사 구경을 가지 않을듯하다.

 무슨 건물인지 금빛으로 찬란한데 고색창연한 절과는 어울리지 않는 느낌을 준다.

 대웅전.

 

 대웅전 내부 불상. 불상은 대웅전 정면을 보고 배치되지 않고 옆면을 향해 놓여 있다.  

 칠성각

 불갑사 대웅전. 대웅전 문창살 무늬가 멋지다.

 불갑사 위에 있는 작은 저수지. 저수지에 물이 가득 차면 청송 주산저수지만큼은 아니어도 멋있는 저수지인데 아쉽게도 가뭄으로 물이 없다. 이곳 저수지 위쪽에도 주산지처럼 물속에 나무가 있고 원앙이도 있으며 운치가 제법 있다.

불갑사 들어가는 입구. 파란색 풀이 꽃무릇의 잎이 아닐까싶다.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이곳도 전부 사람이 심은 꽃무릇으로 알고 있다. 하긴 요즘 세상에 자연그대로를 두고 축제를 열어 사람을 불러들이는게 얼마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