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걷는 인생/백팔사찰순례하기

6. 금산사(김제 모악산)

돗가비 2009. 10. 16. 14:50

금산사

 

조선 성종 23년(1492)에 작성된 "금산사 5층석탑 중창기"에 의하면, 금산사는 이미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의 가섭불 때에 있었던 옛 절터를 다시 중창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금산사의 터전이 오래 전부터 부처님과 인연이 깊었던 것임을 알수 있게 한다.

흔히 통일신라 시기 진표율사에 의하여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엄밀히 따지면 그는 중창자이지 창건주는 아니다.

왜냐하면 "삼국유사"를 비롯한 기록에 의하면, 진표율사는 금산사의 순제법사에게 출가한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진표율사 이전에 이미 금산사가 창건되었음을 알게 한다.

남아있는 "금산사사적"의 기록에 의하여 금산사가 백제 법왕 1년인 599년에 창건되었음을 알수 있다.

이후 금산사의 모습이 크게 부각된 것은 통일신라 시기 경덕왕때 진표율사에 의한 중창 때문이다.

금산사에서 숭제법사의 가르침을 받아 수행을 하던 진표율사는 27세 때에 변산 부사의암(不思議庵)에서 철저한 수행에 전념하였다. 17년 간을 몸을 돌보지 않는 망신참의 고행을 통하여 마침내 미륵보살과 지장보살로부터 간자와 계본을 전해 받게 된다.

이후 진표율사는 금산사로 다시 돌아와 금산사의 중창불사를 발원하고, 경덕왕과 왕실의 후원을 받아 6년에 걸쳐 가람을 대규모로 일으켜 세웠다. 이 때가 경덕왕 21년인 762년부터 혜공왕 2년인 766년에 이르는 기간이었다.

금산사의 창건과 관련하여 "금산사사적"의 내용을 근거로 불 때 599년 백제 법왕의 자복사찰로 창건되었으며, 이 후 진표율사에 의한 6년여의 중창으로 사찰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금산사가 미륵신앙의 성지로 자리 메김 한 것은 진표율사 때부터이다.

 

미륵신앙이란

미륵이라 하면 미래에 오실 부처님이라는 것은 누구나가 아는 사실이다. 여러 경전을 통해 전해진 미륵신앙은 삼국의 불교인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인물들에게 영향을 준 신앙이었다. 물론 어지러운 시대에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자들이 미륵을 자처해 민중들에게 정신적 혼란을 초래케 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진실된 미륵신앙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안락을 주는 신앙이다.

미륵이란 범어 'Maitreya'를 음역한 것으로 이것은 자비를 갖춘 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자비라는 것은 포용력을 가지고 인류의 모든 기쁨과 슬픔을 대변하는 말로서 적극적인 종교적 실천 의지를 내포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미륵신앙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되어진다.

하나는 미륵상생신앙이고 또 다른 하나는 미륵하생신앙이다.

미륵상생신앙이란 아직 보살의 신분인 미륵이 수행하고 있는 도솔천을 이상세계로 보고 죽은 후에 도솔천에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는 신앙형태로 도솔천에 왕생하기 위해서는 십선도를 일심으로 열심히 닦아 죄업을 참회 수행하여야 한다는 신앙이다. 도솔천에 태어난 후 미륵불 옆에 있다 이윽고 미륵이 하생할 때 미륵을 따라 지상으로 내려와 삼회의 설법을 들어 깨달음의 길로 인도 받는다는 신앙이다.

 

미륵하생신앙은 중생이 핍박받고 괴로움에 처했을때 미륵부처님이 나타나 사회의 개조와 인간개조를 통해 중생을 구제하고 사회를 변혁하는 후천개벽적인 내용이 아니다.

미륵부처님이 하생하여 오시는 세계는 모든 중생이 자비심을 가지고 십선을 많이 행하고 있는 대자 대비한 세계다. 혼탁하고 어지러운 세계에 오셔서 고통받는 중생을 구원 하신다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중생들이 십선을 열심히 닦아 자비와 평화의 불국토를 만들어 대자대비의 세상이 되었을때 미륵부처님이 오셔서 미처 깨닫지 못하는 중생들에게 3회의 설법으로 오랜 업장을 소멸하게하고 위없는 깨달음의 길로 인도한다는 것이 미륵 하생신앙이다. 그래서 미륵신앙은 열심히 십선의 도를 닦아 자신의 억겁을 참회함으로써 불국토를 열어 모두 다같이 성불하자는 기도와 참회의 신앙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미륵신앙이 신라시대에는 미륵이 화랑으로 화하여 세상에 현신해 줄 것을 기원하는 화랑도와 결합되어 정치적으로 이용되기도 하였고 후고구려의 궁예에 의해 본래의 신앙에서 벗어나 혹세무민하는 경지 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후 고려말 우왕때 니금이라는 사람이 미륵불을 자칭하고 나타나 민중들을 우롱하다 처형당하였고 조선시대 숙종때 승려 여환이 석가시대는 가고 미륵이 세상을 다스린다는 미륵신앙을 퍼뜨려 왕권을 도모하다 처형당했다.

조선말기와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암울한 시기에 굶주림과 억압의 고통에서 허덕이다 사회변혁을 꿈꾸는 민중들에게 이상사회의 실현을 약속하는 민중신앙과 결합하여 미륵신앙이 민중들에게 희망을 안겨주기도 하였다.

근래에 와서는 본래의 미륵신앙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교리속에 미륵신앙을 자의적인 해석과 절충을 통하여 후천 개벽적인 신흥종교로 발전한 경우도 더러 있었다.

 

이상과 같이 역사적으로 보면 미륵신앙은 때로는 본래의 미륵신앙에서 한참 벗어나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되기도 하였고 자칭 미륵의 화신이라는 자들이 나타나 후천개벽을 이야기하며 민중을 기만하는 행위도 나타기도 하였고 때로는 이 땅을 살아가는 민초들에게 희망을 안겨주는 정신적인 의지처가 되기도 하였다.

 

십선도

 

身業으로서의 殺生 偸盜 邪淫과 業으로서의 妄語 兩舌 惡語 綺語, 意業으로 서의 貪心 疑心 癡心 등의 10惡을 여의고 열 가지 善行을 닦아 行을 하는 것으로

 

① 불살생(不殺生):살아 있는 것을 죽여서는 안 된다.

② 불투도(不偸盜):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③ 불사음(不邪淫):남녀의 도를 문란케 해서는 안 된다.

④ 불망어(不妄語):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⑤ 불기어(不綺語):현란스러운 말을 해서는 안 된다.

⑥ 불악구(不惡口):험담을 해서는 안 된다.

⑦ 불양설(不兩舌):이간질을 해서는 안 된다.

⑧ 불탐욕(不貪欲):탐욕스러운 짓을 해서는 안 된다.

⑨ 부진에(不瞋):화를 내서는 안 된다.

⑩ 불사견(不邪見):그릇된 견해를 가져서는 안 된다.

 

금산사의 불교사상

금산사를 중심으로 불교사상적인 접근을 해보면 우선, 통일신라시대의 진표율사에 의한 금산사의 중창과 미륵전의 건립은 이 지역이 미륵신앙의 중심지가 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으며 그후, 고려 문종 때 혜덕왕사에 의해 86동 43개 암자의 대가람으로 중수되었고, 조선시대에 마침내 대승불교의 대표적인 부처와 보살들을 모두 수용한 대적광전을 세우게 되고 한국불교의 특징인 통 불교적 경향을 반영하기 시작하였다.

금산사는 대적광전에 화엄의 법신불인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좌우에 노사나불과 석가모니불의 삼신불을 봉안하여 정토사상의 연화장세계를 그리고 있다. 또한 금산사는 청정한 불국토에 가기위해서 자기완성과 이웃구제의 원을 세워 끊임없이 정진하는 보살도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는 사찰이며, 1700년대에는 환성지안스님에 의해 수 천명의 신도가 참여한 화엄대법회가 열리기도 하였다.

 

사회가 안정되었을 경우에는 십선을 닦아 도솔천에 오르려는 미륵상생신앙이 발전하였고 사회가 불안정하면 미륵보살에 의해 구원을 기원하는 미륵하생신앙이 발전하게 된다.

일제시대가 되면서 우리 민족은 그 어느 때보다도 전면적인 위기에 처해 있었다.

민중에 의한 미륵신앙은 하생신앙을 토대로 한 새로운 종교가 일어나게 되었으며 일제치하에서 우리 민족에게 애환을 달래주고 희망을 심어주는 구심점 역할도 했었지만, 순수한 미륵신앙에서 벗어난 혹세무민하는 종교활동으로 변질되어 나타나 사회에 많은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1960년대 태공월주스님에 의해 미륵사상과는 거리가 먼 의사 미륵신앙이 번성하여 사회적 폐단이 이는 것을 보고 불교 본래의 자세로 되돌아갈 필요성이 제기되어 1966년 `미륵정심회'를 조직하였다. 태공월주스님이 그의 제자인 도영, 도법, 평상, 원행스님 등과 함께 십선행을 권장하며 “미륵 바르게 알기운동”을 펼치고 있지만 미륵신앙을 표방한 몇몇 신흥종교들이 정통의 미륵신앙에서 벗어나 있는 현실을 보면 심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070113. 맑음. 혼자서 시골가는 길에 잠시 들러서 모악산을 오르려다 차가 막혀 시간이 줄어들어서 산은 오르지 못하고 금산사 구경만 하고 갔다.  

 금산사 일주문

일주문(一柱門)은 사찰로 들어가는 첫 번째 관문이다. 원래 지붕을 가진 일반적인 건축물이라고 하면 사방에 네 개의 기둥을 두어 지붕의 하중을 지탱해야 하는 것이 상식이다. 하지만 일주문은 한 줄로 나란한 두개의 기둥만으로 지붕을 지탱하며 서 있는 건축물이다. 일주문이란 명칭은 바로 이런 건축적인 특징에서 붙여지게 된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모습에 비추어 일심(一心)이라는 의미를 부여한다. 즉 신성한 사찰에 들어서기 전에 흐트러진 마음을 하나로 모아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일주문의 경지는 아직 무언가를 깨달았다고는 할 수 없는 위치이다. 다만 단호한 결심과 실천 의지를 보이면서 구도자로서의 길을 시작하는 단계일 뿐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일주문을 기준으로 중생이 사는 세상인 세간(世間), 그리고 속계(俗界)와 생사 번뇌에서 해탈한 깨달음의 세계인 출세간(出世間), 즉 진계(眞界)로 나누어진다는 것이다

 금강문

사찰에 따라 천왕문(天王門)을 세우기도 하며, 어느 경우에는 금강문과 천왕문이 함께 세워지기도 하는데 이때에는 금강문이 천왕문 밖에 세워진다. 금강문은 보통 앞면 3칸, 옆면 1칸의 직4각형 평면을 이룬 단층집으로 건축된다. 중앙문은 앞뒤 모두 아무런 창호를 달지 않고 개방하며, 양 옆칸은 모두 벽체를 친다. 지붕은 맞배지붕이나 팔작지붕으로 꾸미고, 공포는 익공식(翼工式)이나 다포식(多包式)을 사용했다. 안에는 중앙문만 사람이 통행할 수 있게 하고, 양 옆칸에는 중앙 쪽으로 홍살을 세워 격리시키고, 그 안에 금강역사상(金剛力士像)을 세웠다. 이 문을 통과함으로써 사찰 안에 들어오는 모든 악귀(惡鬼)가 제거되어 가람(伽藍)의 내부는 청정도량(靑淨道場)이 된다는 것이다.

 천왕문

사찰의 문. 일주문 다음에 있다. 일주문을 지나 깨달음을 갈구하며 길을 가는 구도자에게 다다라야할 부처의 세계는 눈에 아직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끊임없이 가야할 길만이 앞에 놓인 상황 앞에서 구도자들은 쉽게 갈등을 겪게 될 것이다. 이쯤에서 눈에 보이는 것이 천왕문(天王門)이다. 천왕문에 있는 사천왕은 이곳에서 구도자들을 맞이한다. 이들은 그 길을 지키면서 힘겨워하는 중생들에게 다시 한번 정진을 위한 각성의 계기를 마련해 주고 마음 속에 아직 남아있는 번뇌를 떨쳐내도록 무서운 모습을 하고 서 있는 것이다. 그들은 또한 청정도량인 사찰을 잡스런 것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고 신성한 불법을 지키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천왕문은 금강역사와 더불어 불법을 수호하는 외호신(外護神)인 사천왕을 모신 전각이다. 외호신이란 불국정토의 외곽을 맡아 지키는 신이라는 뜻이며, 동, 서, 남, 북의 네 곳을 지키게 된다. 이를 사대천왕(四大天王), 사왕(四王), 호세사왕(護世四王)이라고도 한다. 금강역사가 수호의 의미를 가진다면 사천왕은 여기에 더하여 인간을 보살피고 만물을 소생시키며 복락을 나누어주는 역할까지 담당한다. 방위에 따라 청, 백, 적, 흑의 얼굴색을 가지고 있는 사천왕은 불교에서 말하는 서른 세 개의 하늘 중 욕계 여섯 번째 하늘의 첫 번째인 사천왕천(四天王天)의 지배자이다.

 보제루

 범종각

 그 유명한 미륵전 . 보기만해도 압도되는 웅장함이란 말로는 다 표현하기 힘들다. 선조들의 건축술이 대단함을 알리는 

 건물 용화전 또는 장륙존상(丈六尊像)을 모신다고 해서 장륙전이라고도 한다. 법당 안에는 도솔천에서 설법중인 미륵보살을 봉안하거나 용화세계에서 중생을 교화하게 될 미륵불을 봉안하는데, 한국에서는 미륵불을 주로 봉안한다. 용화회상도(龍華會上圖)를 후불탱화로 봉안하는데 이는 용화수 아래에서 3번의 설법을 통해 모든 중생을 구제한다는 내용을 상징하는 것이다. 국보 제62호로 지정된 금산사(金山寺) 미륵전이 대표적인 예이다.

 法身인 비로자나불을 모신다는 대적광전

 미륵전옆에 있는 5층석탑 

 대장전

 대장전은 대장경을 보관하기 위해 축조한 전각을 말한다. 대장전이란 편액을 단 건물로는 경북 예천군 소재의 용문사(籠門寺) 대장전과 전북 김제군 소재의 금산사(金山寺) 대장전을 예로 들 수 있다. 예천의 용문사 대장전은 인도의 고승이 대장경을 용궁에 소장하였다는 고사와 용이 나타났다는 창건설화 등에 의해 이곳에 대장전을 짓고 부처님의 힘으로 호국을 축원하기 위하여 조성한 전각이다. 전각 내에는 대장경을 보관하기 위한 용도로 쓰인 윤장대(輪藏臺)를 좌우에 각각 1기씩 설치하고 있다. 윤장대는 그 모습이 특이하고 화려할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는 그 예가 유일한 것으로 대단히 중요한 유물이다.윤장대는 바닥에 돌둔테를 놓고 중앙에 원형의 기둥을 세운다. 이 기둥에 의지하여 하대(下臺). 몸체. 옥개부의 3부분으로 구성되었다. 하대에는 연꽃을 조각한 판재로 장식하고, 몸체에는 풍혈청판과 계자각으로 구성한 난간을 대고 기둥 사이에는 화려한 꽃살창과 살창을 대었다. 옥개부에는 닫집과 유사하게 짧은 기둥을 달고 연봉오리와 낙양각으로 장식하였다. 기둥 상부에는 다포식의공포에 금단청을 하고 겹처마 형태의 지붕의 씌워 마감하였다.

금산사의 대장전은 본래 미륵전 전면에 위치한 목탑이었다고 한다. 지금으로서는 목탑의 형태 등에 대해서는 알 수 없고 다만 지붕에 있는 복발과 원추형 보주(寶珠) 등의 일부 잔재에 의해 탑이 있었음을 어렴풋이 유추해 볼 수 있을 따름이다. 본래 목탑에 불상과 경전을 봉안하는 것이 일반화되었으므로 목탑이 변화하여 현재의 건물로 되면서 대장전이란 전각명이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대장전은 장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형 건물이다. 전체 규모는 아담하나 건물 내부에는 작은 평면임에도 불구하고 고주(高柱)가 2개 서 있다. 고주에는 후면과 측면으로 퇴량(退樑)을 걸었으며, 다시 45도 방향으로 귀잡이보로 연결하였다. 전체 건물규모에 비해 다소 어색한 이러한 가구연결 방식은 대장전이 원래 목조 탑이였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육각다층석탑

 나한전

석가모니를 주불(主佛)로 하여 좌우에 석가모니의 제자 가운데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은 성자들을 봉안한다. 500나한상을 모신 오백나한전과 16나한상을 모신 응진전(應眞殿)으로 구분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오백나한이 중생에게 복을 주고 소원을 성취해 준다고 믿어 많은 나한전이 생기게 되었다. 경상북도 영천군 거조암 영산전(靈山殿)의 500나한상과 청도군 운문사의 오백나한전이 유명하다. 나한전에 봉안된 현존 나한상은 거의 조선시대 작품으로 다른 불교상들과는 달리 다양한 자세를 취하고, 표정도 해학적이면서 인간적인 정취를 자아내므로 친근감을 불러일으킨다.

 조사전

조사전(祖師殿) 불교 각 종파의 조사(祖師, 위대한 큰스님)나 그 사찰의 창건주(創建主) 스님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전각으로 격을 낮추어 조사당(祖師堂)이라고도 하며 나라의 최고 큰스님을 모셨으면 국사전(國師殿)이라 한다.

  특히, 선종(禪宗)의 사찰에는 고승들이 입적하면 화장을 해서 사리탑인 부도를 만들고 조사당을 지어 그 안에 영정을 봉안시킨다. 그러다가 다른 종파에도 전파되어, 지금은 대부분의 큰 사찰에는 조사당이 거의 다 있다. 또는 인도와 중국의 조사인 33조사와 함께 고려의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스님, 태고 보우(普愚)스님 등을 모시고 때로는 서산대사(西山大師), 사명대사(泗溟大師) 등의 영정도 모시기도 한다.

 삼성각

독성각(獨聖閣)·산신각(山神閣)·칠성각(七星閣)이 있으며, 대개 삼성각에 삼신을 같이 모신다. 독성각은 불교에서 말하는 독각(獨覺)을 모신 곳이다. 독각은 석가모니처럼 스승 없이 홀로 깨우친 자를 말한다. 대승불교의 교학에서 독각은 타인을 위해 가르침을 설하지 않는 이기적인 자를 뜻하지만, 이 경우에는 좋은 의미의 독각이다. 산신각은 단군이 산신이 되었다는 전설에서 유래하는 산신을 모신 곳이다. 칠성각은 북두칠성에 축원하는 도교의 신앙을 받아들여 북두칠성을 불교의 여래로 조화하여 모신 곳이다. 따라서 삼성각은 불교가 수용되는 과정에서 토착신앙 또는 민간신앙과 융합하여 빚어진 변용이다. 이런 식의 변용은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흔히 목격되는데, 이질적인 신앙을 불교로 포용하여 보다 높은 차원으로 유도한다는 데에 의의가 있으나, 자칫 기복 위주의 주술적 신앙으로 불교의 본질을 왜곡시킬 우려와 폐단도 있다. 실제 그러한 폐단이 있었음은 한용운이 〈조선불교유신론〉에서 무속적인 산신과 칠성을 제거하고 석가모니불만을 봉안할 것을 주장한 데서도 알 수 있다.

 

 5층석탑을 둘러싸고 있는 석상들

 5층석탑

 

 

 적멸보궁

 우리 나라 절 가운데는 불상(佛像)을 전혀 모셔놓지 않은 데가 있다. 법당 안에는 단(壇.戒壇)만 있고 속이 텅 비었으며 법당 밖 뒤편에는 사리탑을 봉안하여 놓은 곳이다. 이러한 곳을 적멸보궁, 또는 보궁이라 하는데 이는 사리탑에 부처님의 진신(眞身) 사리를 모신 보배로운 곳이란 뜻이다. 신라 진덕왕 때 자장(慈藏) 스님이 중국 오대산에 가서 문수 보살을 친견하고 부처님 가사와 사리를 받아와 우리 나라의 가장 수승한 땅에 부처님 사리를 봉안하여 모셨는데 경남 양산 통도사(通度寺)에 부처님 가사와 사리를 모시고 금강 계단을 세웠다. 그리고 강원도 설악산 봉정암(鳳程庵), 오대산 상원사(上院寺)에 각기 사리를 모시고 적멸보궁을 지었다 한다. 또 강원도 영월 사자산 법흥사(法興寺)와 태백산 정암사(淨岩寺)에도 부처님사리를 봉안하고 적멸보궁을 세웠다. 이로써 이곳을 3대 적멸보궁, 5대 적멸보궁이라 통칭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봉안한 불전을 지칭하여 적멸보궁이라 한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심으로써 부처님이 항상 그곳에서 적멸의 낙을 누리고 있음을 상징하게 된다. 부처님 생존시는 인도 마가다국 가야성의 남쪽 보리수 아래로, 을 설파한 적멸도량임을 뜻한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는 곧 법신불(法身佛)로 부처님의 진신이 상주하고 있음을 의미하며여기에는 예불의 대상으로 따로 불상을 봉안하지 않고 불단(佛壇)만 있는 것이 다른 불전과의 차이점이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5개의 적멸보궁은 경상남도 양산군 영축산 통도사의 대웅전, 강원도 평창군 오대산의 적멸보궁, 강원도 인제군 설악산 봉정암(鳳頂庵) 의 적멸보궁, 강원도 영월군 사자산 법흥사(法興寺)의 적멸보궁, 강원도 정선군 태백산 정암사(淨巖寺)의 적멸보궁 등이다. 이 중에서 태백산 정암사(淨巖絲)의 적멸보궁을 제외하고는 모두 신라의 자장(慈藏)이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가져온 불사리 및 정골(頂骨)을 직접 봉안한 것이다. 정암사에 봉안된 사리는 임진왜란 때 왜적의 노략질을 피해 통도사의 것을 나누어 봉안한 것이다. 통도사의 적멸보궁인 대웅전은 특이한 건축 형식과 금강계단의 존재로 가장 주목할 만한 적멸보궁이다. 통도사 대웅전은 1645년에 중건한 정면 3칸 측면 5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다른 전각과는 달리 정면의 너비가 측면보다 좁은 장방형을 이루고 있다. 특이한 평면형식은 이 전각 내에 부처님을 모시지 않고 건물 후면에 있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을 향하여 정면이 위치하면서, 한편으로는 불이문(不二門)을 들어섰을 때 마주 보이는 측면에도 합각(合閣)을 만들어 출입상의 정면과 예배상의 정면 양쪽 모두를 강조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대웅전의 기단은 건물의 격에 맞추어 격식을 갖춘 가구식기단으로 장식하였으며, 건물 내부의 불단과 천정을 화려하게 조각하고 단청을 하여 장엄하고 있다.

 5층석탑에서 내려다 보는 미륵전

 

 미륵전 처마

 

 

 

 원통전

승불교의 수많은 불·보살 가운데 중생구제를 위한 대자대비의 원력으로 대중들에게 가장 친근한 보살인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이 관음전인데, 사찰에 따라서는 원통전, 대비전, 보타전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관음전에는 관세음보살과 더불어 그 협시로서 남순동자와 해상용왕을 모시며 그 뒤에 천수천안관세음보살도나 수월관음도 혹은 아미타 후불탱화를 봉안한다.

 요사채

 금산사 마당에서

 

 해탈교

사찰 초입이나 경내에 놓여 있는 다리를 해탈교 혹은 극락교 등으로 부른다. 이 다리는 단순히 몸을 젖지 않게 해주는 기능적 다리로서 보다, 인도인의 세계관에서 남섬부주에서 수미산으로 가기 위해서는 7개의 바다를 건너야 한다. 그리고 부처님을 뵙기 위해서 세상사의 고통의 바다(苦海)를 건너는 다리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나 우리에게 화신(化身)한 석가모니부처님이 봉안된 대웅전(大雄殿),

법신(法身)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모시는 대적광전(大寂光殿), 서방극락정토를 주재하는 아미타부처님을 모시는 무량수전(無量壽殿), 미래불 미륵(彌勒)을 모시는 미륵전(彌勒殿), 그리고 손에 든 약합(藥盒)으로 중생의 병을 치료하는 동방유리광정토(東方琉璃光淨土) 약사불을 모신 약사전(藥師殿) 등이 있다. 이외 관음보살을 모시는 관음전(觀音殿, 圓通寶殿), 죽은 뒤 명부세계를 관할하는 명부전(冥府殿), 조사들의 초상을 모시는 조사당(祖師堂), 나한이 있는 나한전(羅漢殿, 應眞殿) 등은 주요 전각의 측면이나 뒷면에 배치된다.

 공사중인 금산사 입구의 구름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