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올재(관람산과 옥녀봉사이 고갯길)
영광은 백제(白濟)에 무시이군(武尸伊郡)이었고 신라(新羅)때 무영군(武靈郡)이라 했으나 고려때 영광(靈光)으로 고쳤다. 당시
영광은 압해(押海), 임자(荏子), 흑산(黑山)에 이르는 서해 도서는 물론 장성(長城)일부, 무안(務安), 함평(咸平)에 이르는 광활
한 지역으로 나주목(羅州牧), 순천부(順天府) 다음으로 컸다. 고을은 원래 남쪽 산기슭에 있었으나 왜구의 침노가 잦자 산수(山水)를 등진 불리한 지리요 망루가 낮은 탓이라고 우와산(牛臥山) 동쪽으로 옮겼다.
오늘날의 읍은 조선에 접어들어 성산(城山)(146m)을 선창으로 계선주삼아 배가 정박해 있듯 조성했다. 읍은 머릴 동남쪽에 수퇴봉(水退峰)을 두고 그 아래 노인봉(老人峰)(257m) 정동쪽에 옥여봉(玉女峰), 북쪽에 관람산을 두어 분지를 이루고 있으며, 옥녀봉이 있어 양택명지(陽宅明地)가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전설의 곧올재는 관람산과 옥녀봉 사이의 고갯길이다. 해발 80m내외의 이 고개는 읍내서 동북으로 바라보이는 고개로 20분 가량 오르면 되는 곳이다. 이 고개는 영광읍 교촌리 1반에 속하거니와 이 고개를 넘으면 운성리(運城里) 성동부락(城洞部落)이고 묘량북부가 나오며, 대마면(大馬面)을 거쳐 장성으로 가거나 서울로 가던 옛길이다.
몇년전까지도 영광읍내 사람들은 이 고개를 넘어 대마와 장성, 삼계의 경계를 이룬 태청산(太淸山)(593m)으로 땔나무를 하러 다녔고 지금도 이 고개를 이용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옛부터 이 고개에서 초부(樵夫)들이 부르는 피리소리는 영광읍내 입경(入景)에 속했다 하거니와 지금도 이 고개를 넘는 장꾼들은 술이 거나해지면 이 고개를 넘으며 옛 노래를 불러 옛 정취를 느끼게 하는 고개이기도 하다.
이 고개 이름이 곧올재가 된 것은 읍지(邑誌) 등 문헌으로 보아 옛부터 있던 고갯길이라 하여 고봉(古峰)라 썼고, 고도(古道)라고 썼는데 이것이 고도재로 읽히고 곧올재로 발전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주민들간에 전해온 전설이겠지만, 이미 MBC에서 방송한 바 있고, 한국의 전설 제1권에도 실린 전설이 있으므로 그 내용을 간략히 소개한다.
백제(百濟)가 호남땅을 다스리기전, 전남은 삼한시대의 마한(馬韓)이었다 한다. 마한이란 남풍(南風)을 마파람이라 하듯이 남쪽에 있는 한(韓)나라라는 뜻으로 풀이하고 있는데, 사실 이 마한은 통일된 한나라가 아니라 50여 부족국을 통틀어 이른 이름이라 한다.
이 부족국가간에는 싸움이 자주 있었다. 영광고을을 중심으로 있던 나라는 성진이었다. 이 고을에 금실이 좋은 젊은 부부가 살고 있었다. 남편 도손은 열심히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그의 부인이 산기(産氣)가 있던 어느날, 이웃 부족들이 이 고을을 쳐들어 왔다. 군사들이 싸우는 동안 부녀자들은 교촌 뒷산 고갯길을 넘어 태청산(太淸山)으로 피난을 갔다. 도손은 만삭의 부인을 등에 들쳐 업고 피난을 나섰다.
그러나 만삭의 부인을 업고 피난을 가는 것은 쉬운 일이 이 아니었다. 고을에서는 싸움이 한창이었다. 피난을 떠나는 사람들은 빠른 걸음으로 고갯길을 넘어 태청산으로 피난을 가버렸다. 만삭의 부인을 등에 업고 가장 뒤늦게 고개를 넘던 도손이 부인을 고갯길에 내려놓자 곧 아기를 낳을 듯 심한 진통을 했다. 드디어는 피난길에서 아기를 낳고 말았다. 아기를 낳을 날이 차지 않았건만 전쟁의 충격 때문에 조산을 하고 만 것이다.
아기를 받아 본 일이 없는 도손은 당황하기만 하였다. 혼수상태에 빠진 부인은 물을 찾고 있었다. 도손은 물을 가져와야 했다. 아기도 받아야 했다. 사람들은 그들을 못 본 체 하며 피난길을 재촉해 갔다. 당황한 그는 적진이 되고 만 고을을 향해 뛰어갔다. 전쟁터에서는 이웃이 모두 필요 없었다. 「여보! 곧 올게, 조금만 참고 있어」라면서 도손은 아기를 덮을 걸레며 가위며 물이며, 그의 부인과 아기를 구할 도구와 약이 급했던 것이다.
집을 향해 뛰던 그는 적들에게 붙잡혔다. "너 이놈! 웬놈이냐." 도손은 피난 떠나던 일과 그의 부인이 출산해 급한 사정을 얘기했다. 그러나 적병들은 곧이 들으려 들지 않았다. 적군 병사들은 "이놈이 첩자임에 틀림없다."면서 모진 매를 때렸다. 도손은 정말이라며 사정했다. 첩자가 아니라 위급한 부인을 구하러 왔노라고 울면서 애원했다. 그러나 그의 애원은 통하지 않았다. 군인들은 그를 쳐죽였다. 도손은 죽으며 고을 동북쪽 고개를 향해 손을 허우적이며 "곧 갈께"를 수없이 되뇌이다 숨을 거두었다.
돌보는 이없이 산길에서 조산아를 낳은 도손의 부인도 도손을 부르며 죽어갔다. 전쟁이 끝나자 사람들은 이 고개를 넘어왔다.
금실 좋던 부인은 산마루에서 남편은 산아래서 서로를 향해 손을 허우적이며 죽어 있었다.
사람들은 도손이 피를 흘리며 누워있는 자기 부인을 뒤에 두고 고을을 향해 뛰어가면서 "곧 올게 조금만 참아"하고 소리치던
말이 생각났다. 사람들은 이 고개 마루에 이들 부부를 묻으며 "곧 올께"를 되풀이 했다. 이후부터 이 고개 이름은 곧올재가 되
었다.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적의 침공을 받았던 약한 나라 백성의 슬픔을 뼈저리게 느끼게 하는 것이다.
영광(靈光)사람들은 조선초기 왜놈 해적의 침공을 자주 받았고, 6.25때는 인민군의 피해를 많이 받았다. 이런 난리가 일어날
때마다 영광사람들이 몸을 피하는 곳은 역시 태청산(太淸山)으로 이 재를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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