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성곽은 서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조선시대의 도성(都城)이다. 태조는 한양 천도 후 일차적으로 궁궐과 종묘를 먼저 지은 다음 태조 4년(1395) 9월 도성축조도감(都城築造都監)을 설치하고 정도전(鄭道傳)에게 명하여 성터를 살피게 하였다. 정도전은 백악(白岳)·인왕(仁王)·목멱(木覓)·낙산(駱山)에 올라 실측하여 네 산을 연결하는 5만 9,500척의 성터를 결정하였다. 이듬해 정월부터 전국에 걸쳐 무려 11만 8,000여명이 동원되어 600척을 한 단위씩으로, 축성구역을 97지구로 나누어 정하였다. 구역마다 천자문의 글자를 표시하여 백악 동쪽에서부터 천(天)자로 시작하여 낙산·남산·인왕산을 거쳐 백악 서쪽에 이르러 조(弔)자까지 구획하여 공사를 하였다. 공사는 구역마다 책임자를 두어 책임진 부분에 해당하는 성벽에 관직과 축성한 고을의 이름을 새겨넣어 책임을 분명하게 하도록 하였는데,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높고 험한 산에는 15척 높이의 돌로 쌓게 하였는데, 돌로 쌓은 성벽의 길이는 1만 9,200척이었다. 평지는 아래 부분이 25척, 윗 부분이 18척 되는 너비로 높이 25척의 규모로 흙을 쌓았는데, 그 성벽의 길이는 4만 3,000척이었다. 동대문 부근 청계천에 있는 수구(水口)에는 구름다리를 쌓고 그 좌우에는 돌로 성을 축조하였다. 홍예의 높이는 16척, 석성 등을 포함한 길이는 1,050척이었다. 이해 가을에도 8만명의 정부(丁夫)를 동원하여 흙으로 쌓은 부분을 돌로 고치고, 4대문과 4소문을 완성하였다. 4대문이란 동쪽의 흥인문(興仁門), 서쪽의 돈의문(敦義門), 남쪽의 숭례문(崇禮門), 북쪽의 숙청문(肅淸門)을 말하고, 4소문이란 동북의 홍화문(弘化門), 동남의 광희문(光熙門), 서북의 창의문(彰義門), 서남의 소덕문(昭德門)을 가르킨다. 이 가운데 흥인문에만 옹성(甕城)을 쌓았다. 대략의 공사는 이렇게 끝났지만 숭례문은 1396년에, 흥인지문의 옹성은 이듬해 4월에야 완성되었다 세종 4년(1422)에 이 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하여 흙으로 쌓은 부분을 모두 돌로 바꾸면서 더 높게 쌓고, 석재를 약 2 : 1 길이 비율의 장방형으로 많이 다듬어 쌓았다. 또한 여장(女墻)도 쌓았고 수문도 2개 더 만들었다. 전국에서 약 32만 2, 000명의 인부가 동원된 이때의 개축으로 도성은 둘레 8만 9,610척, 높이 40척 2촌, 여장 4,664첩(堞), 치성(雉城) 6군데로 되었으며, 곡성(曲城) 1군데, 성랑(城廊) 15군데를 갖추게 되었다. 그 뒤 1426년 수성금화도감(修城禁火都監)을 두고 관리를 전담케 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광해군 때 수축이 있었고, 숙종(肅宗) 30년(1704) 3월부터 약 5년간에 걸쳐 3군영(三軍營)에 분담하여 둘레 9, 975보, 성첩(城堞) 7, 081개로 만드는 대대적인 수축을 하였다. 또한, 영조 19년(1743)에도 부분적인 보수를 하였고, 성첩도 회분(灰粉)으로 단장하였으며, 고종 6년(1869) 동대문의 개축이 있었다. 이처럼 서울성곽은 태조 때 처음 축조되어 세종 때 개축되고 숙종 때의 수축이 있었는데, 세 차례의 축조는 축조 방법과 돌의 모양이 각기 달라, 세 시기의 성벽이 쉽게 구분된다. 즉 태조 때의 것은 1척 정도의 다듬지 않은 네모꼴의 작은 돌을 불규칙하게 쌓았으나 벽면은 수직이다. 세종 때는 2×3척의 긴 네모꼴의 다듬은 돌을 아래 부분은 비교적 큰돌로, 윗 부분은 작은 돌로 쌓았으며, 성벽의 중앙부가 밖으로 약간 튀어나왔으나, 철과 석회를 사용하여 축성 기술이 향상되었음을 보여준다. 숙종 때의 것은 가로와 세로가 2척 규모의 정방형 돌을 정연하게 쌓아 간격도 일정하고 벽면도 수직이다. 이러한 축조술의 변화는 조선시대 축성술의 전반적인 변화와 관계된 것으로, 지방의 읍성(邑城)과 산성(山城)에도 적용되어진 모범이었다. 1915년 일제는 근대 도시로의 발전을 방해한다고 하여 성문과 성벽을 무너뜨렸고, 그 결과 현재 삼청동·장충동 일대의 성벽과 숭례문·흥인지문·숙청문ㆍ창의문ㆍ광희문 등이 전체 또는 일부 남게 되었다. 광복 후 1963년에 인왕산 방면과 북악산의 돌로 된 성벽을 보수하였으며, 1972년과 1976년에 부분 보수와 개축을 하였다. 이후 혜화문이 복원되고 숙청문ㆍ광희문의 문루가 복원되는 등 계속적인 복원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고 최규식경무관 동상(1.21간첩사태당시에 순직한 종로경찰서장)
오늘 산행은 서울성곽을 둘러보는 정도의 산행이라고하기엔 싱거운 산책이라고 봐야겠다. 창의문(자하문)에 가기 위해 방배동에서 406번 버스를 타고 종로 제일은행본점앞에서 내려 7122번이던가 하는 버스로 갈아타고 자하문고개에서 내렸다. 버스정류장에서 내리면 고최규식경무관동상이 늠름하게 서 있다. 계단을 올라가면 북악산(백악산)을 올라가기 위해 절차를 밣아야 하는 초소가 보인다. 초소에서 신분증을 내고 출입증을 받아서 올가가는데 오늘 따라 지갑을 가지고 오지 않아서 이름을 대고 출입증을 받았다. 난 마누라하고 같이 다니면 마누라믿고 아무것도 안 챙기는게 못된 버릇이다. 다행히 이름만 대도 출입증을 주기에 받아들고 잘 만들어진 나무계단을 오르기 시작한다. (입장시간 하절기09-15시, 동절기10-15시, 매주 월요일 휴관)
창의문(자하문)
북소문인 창의문은 자하문이란 애칭으로 널리 불리었다. 숙정문이 항상 폐쇄된 채 제 구실을 못하였기에 이 문이 그 문의 역할까지 도맡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하기에 사람들은 창의문을 늘상 북문이라 불렀던 것이다. 도성의 북쪽 교외로 빠지거나 가까이는 세검정과 북한산으로 가자면 이 문이 관문이기에 이용도가 적지 않았다. 이 문 근처에는 자하가 많이 끼였는가 서울 내기들은 세검정 일대를 두고 <자문밖>이라 하였으니 이는 곧 창의문 밖을 일컫는 말이었다. 이 자하문은 4소문 중에서 그 원형을 유일하게 보존하고 있는 문이다. 등치로는 건평 49.587m²(15평) 안팎의 조그마하지만 매우 단단하고 굳건한 기풍을 풍기는 건축물이다. 특히 우리의 눈길을 끄는 색다른 특징을 엿볼 수 있는데 바로 목계를 달아 놓은 것이다. 동소문 문루에 봉황새를 그려놓은 것이 여타 문과 다른 특색이듯이 창의문 추녀에 나무로 닭을 깎아 매달아 놓은 것 역시 다른 문과 유를 달리하는 모습이다. 그 까닭은 문밖의 지세가 지네와 유사한 상이기에 그 기세를 제압하자면 지네와 상극인 닭의 꼴을 만들어 매달아 놓아야 한다는 속설에 따른 것이다. 창의문에 얽힌 역사적 사실 중에서 인조반정에 관한 것을 빼놓을 수 없다. 인조반정은 광해군 15년 (1623) 이귀 등 서인일파가 광해군 및 집권당인 이이첨 등의 대북파를 몰아내고 능양군 종(綾陽君 倧:인조)을 왕으로 옹립한 정변이다. 1623년 3월 12일 이귀, 김유, 김자점, 이괄 등은 반정계획을 진행하던 중 계획이 일부 누설되었으나 예정대로 실행에 옮겨 장단의 이서군과 이천의 이중로군은 홍제원에서 김유군과 합류하였다. 반정군은 창의문을 향해 진군하여 문을 깨뜨리고 입성한 뒤 훈련대장 이흥립의 내응으로 창덕궁을 무난히 점령하였다. 이에 당황한 광해군은 궁궐 뒷문으로 달아나 의관 안국신의 집에 숨었다가 체포되어서 인(庶人)으로 강등되어 강화로 귀양 보내지고 능양군이 왕위에 오르니 이가 곧 인조이다. 후에 영조는 이 거사를 기념하기 위하여 창의문의 성문과 문루를 개축하고 반정공신들의 이름을 현판에 새겨 걸어놓게 하였다. 지금도 그 현판이 문루에 걸려 있다.
북악산을 오르는 길은 나무계단의 연속이다. 성곽 너머로는 삼각산의 능선이 길게 늘어서 있다. 족두리봉에서부터 보현봉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찍으려 하자 경계근무중인 군인이 제지한다. 사진을 찍을수 있는 장소도 정해져 있다. 쉼터에 올라가서 사진을 찍을수 있었다.
좌측에 족두리봉부터 향로봉 그리고 비봉
좌측으로 솓아오르는 향로봉, 비봉,승가봉, 우뚝솓은 보현봉
보현봉과 평창동
인왕산을 배경으로 앉아서
근무중인 군인에게 부탁해서 한 컷
나무계단 오르막이 여간 힘들지 않다. 그래도 구간이 짧아서 오를만하다. 마누라는 뒤에서 힘들다고 두털거리는데 내가 그래가지고 지리산구경하겠냐고 구박을 하면 아니꼬아서지리산 안간다고 말대꾸한다. 지리산구경시켜준다고 열심히 훈련을 시키는대도 영 체력이 늘질않는다. 과일도 먹어가면서 어쩌든 정상에 올라선다.
인왕산과 성곽 우측아래에 북악스카이웨이길이보이고, 자하문고개이다
평창동이 숲속에 있는데 스위스알프스의 마을같이 보이더라
사진촬영장소에서 뒤에 인왕산이...
보현봉과 북한산능선. 우측아래로 형제봉, 푸른숲은 북악산과 성곽
북악산(백악산)정상 표지석. 주변사진은 못찍게 한다
정상에서는 땡볕에 서 있을수도 없고 사진도 못찍게 해서 성곽을 따라 다시 내려선다. 내려서다 보면 1.20간첩사태때 총격전이 벌어지면서 총탄을 맞았던 소나무가 서 있다.
메꿔놓은 총탄 자국의 소나무
1.21사태소나무 안내판
내리막길을 걷다보면 다시 봉우리 아닌 봉우리가 나타나는데 청운대이다. 오늘은 운좋게도 길일인지 청운대 주변에서 서성거리며 놀고 있는 꽃사슴 두 마리를 봤다. 한 쌍인지는 모르겠는데 작은 꽃사슴이 앙증맞게 이쁘다. 그런데 북악산 안쪽으로는 출입이 통제된 구역인데 어찌하여 사슴이 살고 있단 말인가? 안에서 근무하는 군인들이 키우는 것일까? 야생꽃사슴은 아닐터이고 분명코 부대에서 키우는가 보다. 그렇다고 그리 놓아 먹이면서 키운다는 것도 아닐듯싶은게 아리송하기만 하다. 해답은 알 수 없는 노릇이고 사진을 찍으려고 하니 여기서도 군인들이 촬영은 금지하고 하면 가로 막는다.
몰래 살짝 찍은 꽃사슴
청운대
북악산 성곽
기관총초소에 들어가 찍은 북한산 자락
성곽의 치에 대한 설명판
청운대를 지나 성곽을 따라 내려 서다 군부대를 지나게 되고 숙정문에 도착하게 된다. 숙정문에 올라서니 바람이 시원스럽다. 가볍게 주변 구경을 하고 다시 숙정문을 빠져 나온다. 문앞에 나오면 출입증을 반납하게 된다. 출입증을 반납하고 내려서자 마자 방향을 틀어 다시 오늘의 힘든 코스를 가게 된다.
숙정문(북대문)
성문을 나서면서는 땡볕에 그대로 노출되버린다. 다시 오르막길을 가기 위해 백여미터를 걸으니 물줄기가 보이기에 숲속으로 들어선다. 물가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서 점심을 먹었다. 산에 와서 먹는 밥은 언제라도 맛이 좋다. 배부르게 먹고 낮잠을 한소금 자고 나면 좋으련만 장소가 좁아 잠은 자지 못하고 그대로 길을 재촉한다. 계단을 수없이 올라가야 한다. 마누라는 따라오면서 다시 불평을 늘어놓는다. 이런 고생을 왜 시키는지 모르겠다고 야단이다. 나를 믿을수 없다는둥 아주 정신을 놓고 머라고 주절거린다. 그래도 나는 앞에서 아무 대꾸도 않고 그냥 올라가 버리니 별 수 없이 따라 올라온다. 혼자는 어디서든 무서워서 못 있으니깐 두고 가면 잘 따라 온다. 드디어 고갯마루에 올라서니 이곳이 북악산 팔각정이다. 팔각정을 빙 돌아서 사방 경치 구경을 하고 매점으로 내려선다. 시원한 음료수라도 사먹을 요량으로 매점에 들어가서 얼음과자를 사면서도 마누라는 수건을 떨어뜨리고 야단이다. 아직까지도 올라올때의 기운을 다 못차린 모양새이다. 자판기에서 난 사이다를 빼내 마시고 마누라는 얼음과자를 사서 나오는데 매점 종업원이 불러세우면서 돈이 떨어졌다고 일러준다. 수건떨어뜨리고 정신없는차에 돈까지 떨어졌다고 하는 바람에 얼떨결에 무안함에 돈을 주워 들고 걷기 시작한다. 그런데 오면서 마누라가 이상탄다. 자긴 돈이 그대로있는겄같다면서 공돈이란다. 세상살다보면 공짜도 생기는법이다. 여기서부터는 북악산산책로를 따라걸으면 된다. 실은 올라온 길에서 곧장 도로를 건너면 되는데 우린 팔각정을 구경하느라고 그리 된것이다. 북악산산책로를 따라 걷다 입구에 충정대라는 커다란 돌기둥이 있는 군부대앞에서 길을 건더 산속으로 접어 든다. 산책로를 마냥 따라 걸어가다보면 작은 갈래길이 여럿 나타나는데 중심이 되는 길을 따라 걸으니 여래사, 국민대방향이라고 하는 표지판이 나타난다. 그곳을 향해서 걸음을 재촉하면서 땀을 흘리다보면 여래사인지 납골당이 모셔져 있는 절이 나타나고 옆으로 지나쳐 걸으니 배드민턴장을 두 개 거치게 된다. 그곳을 통과하면 국민대학교 건너편 도로에 나서게 되면서 산행을 마무리 한다. 버스정류장에서 153번버스를 타고 오다 중앙차로가 있는곳에서 142번 버스를 타고 방배동으로 왔다. 142번 종점이 집앞이라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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