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사는 세상/옥당골로 찾아들어

영광의 조선시대

돗가비 2009. 8. 21. 12:54

1396년(태조5)에 현재의 위치로 읍터를 옮겼으며 1629년(인조 7)에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638년 복구되었다. 1755년(영조31)에는 또다시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764년 복구되는 곡절을 겪었다.

 

조선시대 영광의 행정편제에서 주목할만한 점은 법성창의 존재이다. 조선이 건국된 후 전남지역에는 나주와 영광에만 조창이 설치되어 운용되었다. 그나마 나주 영산창은 수로가 험하여 배가 전복된다는 이유로 폐쇄당하고 영광 법성창만이 전남 지역의 유일한 조창이었다.

 

우리고장의 법성포에 수군의 진영이 설치된 것은 중종 9년(1514)의 일이다. 우리가 법성진의 건치연혁을 살피기 위해서는 기히 존재하고 있던 법성창과 연관지어야 한다. 법성포에 조창이 있게된 것은 고려 성종 11년(992)의 사실이니 그로부터 552년후에 수군의 진영이 설치된 것이다.
그 조창이 중종 7년에 가서 영산포창과의 병합으로 인하여 과대해졌다 함은 상술한 바가 있거니와 그와 같이 거대한 조창이 생기게 되자 그에 따라 자연적으로 파생되는 문제가 경비였다. 평소 방대한 조창의 경비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가일층 중요한 것은 경창으로의 운반시 해상에서 겪어야 하는 왜구들의 준동위협은 대단히 고통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요인 때문에 조정에서는 영산포창이 병합된지 2년만인 중종 9年에 법성포에 수군을 건치한 것이다. 이제 고종 33년(1896)에 규장각에서 발간한 법성진지와 동대에 나온 지도를 토대로 하여 법성진의 내역를 살펴본다. 「초치 수군만호」라 하였으니 건치 당시에는 만호진을둔 것이다. 수군만호란 군사상 필요한 항포구에 해상수비를 위하여 군대를 주둔시키는 최소단위의 부대로써 그 수효는 34명에 불과하였다.

 

법성진은 법성창과 더불어 국운의 성쇠에 따라 숱하게 많은 풍상을 겪어야만 하였다. 상대에는 조운선을 해구로부터 방어하였고 임진왜란 때에는 충무공의 휘하에서 전공도 세웠다. 그러나 정유재란때에는 왜적의 수중에 완전히 함락 당하여 성중이 불바다가되는 수난도 겪는 바가 있었다(난중일기 중에). 그뿐 아니라 병자호란 시에는 병량수송에 일익을 담당하였는가 하면 동학과 의병시절에는 국세미를 지키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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