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의 영광은 현재의 영광,함평,고창일부,장성일부,무안일부,신안일부를 포괄하는 커다란 세력권을 형성하면서 호남 서북부의 행정중심지로 성장하였다. 이처럼 고려시대에 와서 영광지역이 지방지배의 거점으로 부상하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이 추측된다.
첫째, 서남해 해로와 밀착되어 부용창(법성포)이 설치되어 호남 서북부의 세곡의 운송로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던 것이다.
둘째, 후백제와 고려가 각축을 벌였을 때 영광지역의 호족세력이 왕건의 후원세력으로 역할 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럴 가능성이 있는 인물은 영광김씨 김심언과 영광 전씨 전홍지가 찾아진다.
조운제도와 부용창
조운제도는 영광과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일찍이 조창이 건치됨으로써 우리고장이 역사적으로 각광을받게 되었다 해도 과언은 아니기 때문이다. 고려 조정은 성종 11年(서기 992)에 한수이남에 12개소의 조창을 설치하였는데 그때 우리고장에도 부용창이라는 조창이 세워지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국가재정의 중추기관인 조창이 우리고장에 세워짐으로써 일찍이 영광이라는 지명이 우리 역사에 등장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 고장에는 수군의 진보도 설치되었으니 실로 이 고장이 우리나라에 끼친영향은 큰 것이다. 조운이란 국가에서 조세로 징수한 곡물, 포백 등을 수로로 운송하는 제도로서, 일명 조전이라고도 하였다.
교통수단이 미개하던 중세에는 모든 물화의 운송이 육로보다는 수로를 이용함이 편리했다. 특히 농경위주의 당시의 사정으로는 나라의 재정수입도 토지에다 과하는 곡물세입이 주종을 이루었다. 이와 같이 전국 각지에서 징수된 세곡을 중앙으로 취합하는 데는 수로이상의 방법이 없었다. 이러한 제도는 중앙집권적 지배체제가 강화·정비 되어가던 성종대에 이르러 확립되었다.
이와 같이 곡물을 수합 보관하기 위해 수로 연변의 창고를 조창이라고 부르거니와, 이때 성종이 개경 이북에는 이를 두지 아니한것은 그 지역은 농지가 부족한 산간지대라는 것 이외에도 항시 북방의 오랑캐와 대치하고 있는 군사적 요충권이었기로 그 지방의 세곡은 이를 군화미에 충당하기 위함이다.
여하간 법성포에는 900여 년간 이라는 장구한 세월동안 조창이 있으므로 해서 국가에 공헌한 바도 크지만 반면으로는 대소 전란시마다 공격 목표가 되었으니 그때마다 주민들이 겪어야 했던 고난은 엄청나게 컷으리라 예상된다.
역사적 배경
물론 우리 고장 영광도 고려의 통일국가형성으로 인하여 고려의 영토로 되었으니 44연간(892 ~ 936)의 후백제 시기에는 줄곧 후백제에 속하였다.왕건이 태봉국 궁예의 명에 의해 나주까지 진격하였을 때에도 우리고장은 여전히 후백제의 영토로 남아있었다. 견훤에게 있어 광주는 전략상의 요충지었기 때문에 그가 신임하는 인물을 성주로 삼아 사수케 하였다. 광주의 서북방에 위치한 영광은 광주에서 전주로 가는 통로였기로 견휜은 이 중요한 전략상의 요지를 확보하기 위하여는 필히 영광을 자기 지배하에 두지 않으면 아니되었다. 지금의 장성이 당시에는 영광에 속하였다. 이 때문에 고려의 입장에서 보면 영광지방은 끝까지 저항하던 지역이다. 왕건은 건국후 제도와 질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도 그와 같이 크게 저항하던 지역에 대하여는 차별대우할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