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우문고 44
김삿갓 시집
김병연(김삿갓) 지음/ 범우사/ 1988-6-1/ 144쪽 | 182*103mm (B40)/
人物擧皆無不用 捨其所短取其長
사람과 물건은 저마다 알맞게 쓰이나니
그 단점은 버리고 장점은 취해야하리
책 소개
김삿갓의 시는 작품성보다는 풍자가 넘치고 회화적인 면이 더 강조되어 이 책머리에 있는 김삿갓의 가족사를 적는 것으로 책 소개를 대신하고 싶다.
1.
세상 사람들은 김삿갓을 대천재요, 대기인이자 대광인이며, 방랑시인이라고 한다.
이렇게 그를 일컫는 바와 같이 그는 57세의 평생을 두고 팔도강산을 몇 차례씩 두루 방랑한 화려한 걸인이었고, 이백에 필적할 만한 시선이었지만 인생으로서는 두보만큼이나 불우했다.
재치와 해학과 풍자가 넘치는 그의 시 속에서 우리는 인생의 무상을 체득한 그의 사상을 엿볼 수 있고, 발어먹으면서 세상을 편력하여 남긴 그의 작품에서 모든 인간사를 초월한 초인적인 천재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추우나 더우나 흰 겹옷을 입고 머리에는 커다란 삿갓을 쓰고 단장을 벗삼아, 오늘은 석양에 비끼는 산 그림자를 영탄하고 내일은 주막집에서 술로 시름을 잊으며, 행운유수와도 같이 일생을방랑하며 시대의울분을 토했던것이다.
김삿갓은 순조 7년(1807)에 권문세가인 장동김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병연이고 자는 성심, 호는 난고이다. 김삿갓이라는 것은 그의 속칭이며, 그 속칭이 나오게 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순조11년인 1811년 11월에 홍경래가 "서북 사람은 중용하지 말라"는 조선조의 차별 정책에 격분하여 평안도 용강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 후 홍경래는 순식간에 가산, 박천, 곽산, 태천, 정주 등지를 휩쓸고 선천으로 쳐들어갔다. 이때는 김삿갓의 조부였던 김익순이 함흥 중군으로부터 선천방어사로 부임한 지 불과 3개월밖에 안 되었을 때였다. 김익순이 술에 취하여 누워 있는데 홍경래의 군사들이 몰려 들어와서 그를 결박하고 항복을 받았다.
불가항력으로 일어난 일이었지만, 홍경래의 난이 평정되자 김익순은 모반대역죄로 사형을 당하였고, 그의 일가는 폐족을 당하였다. 당시 김병연은 5세였다.
김병연의 부친인 김안근은 자식에게까지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하여 병연을 형인 병하와 함께 하인인 김서수에게 부탁하여 황해도 곡산땅으로 피신시켰다. 곡산에서 신분을 속이고 숨어 살던 병하, 병연 두 형제는, 조부의 죄는 자식과 손자까지 죽음을 당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게 판명되어 다시 부모의 품으로 돌아왔다.
폐족의 자손으로서 세상의 학대와 멸시를 받던 김병연은 과거에서 김익순의 죄를 맹박하여 장원 급제했으나, 그 김익순이 자기의 조부라는 것을 알고는 세상을 원망하여 마침내 22세 때 홀연히 집을 뛰쳐나갔다. 이때 그의 큰아들인 학균이 태어났으나 돌아보지 않았고, 2년간을 방랑하다가 24세 때 다시 집으로 돌아와 차남 익균을 낳고 나간 뒤로는 세상을 떠나기까지 한 번도 집을 찾지 않았다. 차남인 익균이 세 번이나 병연을 찾아 집으로 돌아오게 하려 했지만 끝내 뿌리치고, 평생을 방랑하다 57세의 나이로 전라도 동복이라는 객지에서 불우한 일생을 마쳤다. 그의 시신은 아들 익균에 의해 강원도 영월군 의풍면 태백산 기숡에 장사지내졌다.
김삿갓은 방랑 생활을 하다 보니 언제나 옷차림이 허술했고, 체모를 내세울 필요도 없었으니 갓 같은 것은 아예 생각 밖이요 삿갓이 오히려 잘 어울렸다. 삿갓은 햇볕을 막아 주고, 비가 오면 비옷 구실도 하며, 하느ㅜㄹ을 부그러워하고 사람을 꺼리는 마음을 가려 줄 수 있었기 때문에 그는 언제나 삿갓을 쓰고 다니면서 평생을 방랑하며 서럽고 안타까운 일생을 보냈다. 이런 이유로 세상에서는 김병연을 김립 또는 김삿갓이라고 일컫게 된 것이다.
2
김삿갓에 관한 문헌으로는 대동기문, 대동시선, 황오의 녹차집속에 있는 김삿갓전 등 셋뿐이다.
대동기문에는 "김병연의 집안은 폐족이었으므로, 그는 스스로 천지간의 죄인임을 자처하여 늘 삿갓을 쓰고 하늘을 감히 우러러보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그를 김삿갓이라고 일컬었다"하였고, 대동시선에는 <삿갓을 읊음>이라는 그의 시가 실려 있다.
황오의 녹차집에는 "김삿갓은 동해 사람인데, 성은 김이요, 삿갓은 그의 머리에 쓴 것을 말한다. 을사년 겨울에 장안에서 우거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우전 정현덕이 내게 편지를 보내 오기를, '천하 기남자가 여기 있는데 한번 가 보지 않겠는가?'하기에, 같이 가 보니 과연 김삿갓이더라. 사람됨이 술을 좋아하고 광분하여 익살을 즐기며, 시를 잘 짓고 술에 취하면 가끔 통곡하면서도, 평생 벼슬을 하지 않으니 기인이더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김삿갓이 방랑을 하는 동안 가족은 폐족의 집안아리는 오명아래 이천, 가평, 영월, 평창, 서울, 여주 등지를 바람에 휘날리는 낙엽처럼 떠돌아다니며 고생을 하다가, 김삿갓의 손자인 김영진에 이르러서야 경흥부윤이라는 벼슬을 하게 되어 겨우 집안의 몰락이라는 불운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김삿갓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아들 익균은 양주에서 강원도 평창군 천동으로 가서 훈학 노릇을 하며 평번하게 일생을 보냈는데, 슬하엔 두 아들을 두었었다. 장남은 택진, 차남은 영진이었다. 택진은 20세 때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나무를 해서 팔아 동생 영진을 서당에 보냈다. 그러나 영진은 15세 때 강원도 건봉사로 가서 승적에 입적하고 승려가 되었다. 4년 동안 절에서 공부를 한 영진은 서울에 있는 절로 옮겨 왔다. 그는 머리를 까고 승려가 되었을망정 용모가 준수하고 영민했다고 한다. 그 당시 절에 자주 드나들던 궁중 나인이 그의 인품을 아껴 고종 황제에게 천거하였는데, 고종 황제는그가 김삿갓의 후손임을 알고 승적에서 그를 빼내 대궐에서 일하도록 했다.
김영진은 처음 궁내부 주사의 직책을 받았고, 그 다음 별군직과 황제의 시종 및 홍천군수를 역임했다. 그 후 경흥 부윤으로 임명을 받고 부임할 때 아들 경한을 얻었다.
그 후 한일합방으로 통곡을 하며 관직에서 물러난 영진은 여주로 옮겨 가서 양조장을 차려 돈을 모았고, 만년에는 절을 지어 다시 불경을 읽으며 생애를 마쳤다. 당시 휘문고교를 나온 경한은 "나라가 망했으니 벼슬할 생각은 말고 사업이나 하라"는 부친의 말에 따라, 27세 때 2년간 몸담았던 산림주사직을 버리고 양평의 용두리로 와서 양조장과 재목상, 묘목 사업 등에 종사했다. 사업이 번창하여 경한은 양평군 일대에서 첫손가락 꼽히는 유지가 되었고, 4년간 초대 도의원을 역임하기도 했다. 또한 군내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춘궁기 때마다 많은 양곡을 희사하여 사람들은 그의 덕을 기려 송덕비까지 세웠다. 1962년부터 기울기 시작한 사업에 정신없던 그는 중풍까지 겹쳐 1977년 6월 29일 세상을 떠났다.
현재는 김경한의 아들, 그러니까 김삿갓의 4대 후손인 김석동씨가 아직 양평군 청운면 용두리에 살고 있다. 이것은 현재 청운면사무소 병무 담당 주사보 박근배씨가 김삿갓의 후손인 김경한의 호적부와 김석동 씨를 직접 만나 확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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