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831.
서울 화계사.
화계사는 1522년(중종 17)에 신월 선사(信月禪師)가 창건한 절이다. 원래는 고려 때 법인 대사(法印大師) 탄문(坦文)이 화계사 인근에 보덕암(普德庵)을 세우고 오랫동안 법등을 이어왔는데, 신월 선사가 현재의 자리로 옮겨 짓고 절 이름을 화계사라고 하였다. 그래서 절 측에서는 보덕암을 화계사의 전신으로 여긴다.
화계사가 창건된 조선시대는 불교를 억압하고 유교를 장려하는 정책을 펴던 시기였다. 그런 까닭에 조선시대 500년을 우리나라 불교의 역사에서는 가장 어두웠던 시대로 꼽는데,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정책적으로는 불교를 탄압하였으나 실제로는 왕실에서까지 불교를 믿었다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서울 근교에는 화계사를 비롯해 도선사와 흥천사, 망월사 등 왕실 사람들이 드나들던 절이 꽤 많이 남아 있다.
화계사는 창건 때부터 왕실 가족이 참여하였다. 신월이 서평군(西平君) 이공(李公)의 도움을 받아 법당 3처(處)와 요사 50칸을 짓고 절 이름을 화계사(華溪寺)라 한 것이다. 그러나 채 100년도 지나지 않은 1618년에 화재로 전소되어 이듬해 3월 도월(道月)이 재건하였는데, 이때는 덕흥대원군 (德興大院君)가문에서 시주하였다. 덕흥대원군은 중종의 일곱째 아들로 선조의 생부이다. 그리고 1866년에 용선(龍船)과 범운(梵雲) 양 선사가 불전과 승방 건물들을 중수할 때 시주한 사람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다.
왕실의 비호 아래 절의 특색을 살리면서 착실히 발전해온 화계사는, 특히 흥선대원군의 원찰이라 불릴 정도로 흥선대원군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대원군이 화계사와 인연을 맺은 것은 부인 여흥 민씨가 이 절에 자주 드나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대원군의 둘째 아들이 왕위에 오르게 된 일화가 이 절에 전해진다.
어느 여름날, 대원군이 남루한 차림으로 화계사를 찾았다. 너무 목이 말랐는데, 때마침 느티나무 아래에서 동자승이 기다렸다는 듯이 물 사발을 건네주는 것이 아닌가. 신기해서 연유를 물으니 만인萬印이라는 스님이 시켰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원군은 만인을 만나게 되었으며, 만인은 대원군의 심중을 꿰뚫어 보고는 자손이 왕위에 오를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충청도 덕산德山의 가야사伽倻寺 금탑 자리가 제왕지지帝王之地이니, 남연군 묘소를 그곳으로 이장하면 제왕이 될 귀한 왕손을 얻을 것’이라고 한 것이다.
후에 대원군이 가야사를 찾아가 돈을 써서 금탑을 허물고 그 자리에 남연군의 묘를 썼다. 본래 남연군의 묘는 경기도 연천에 있었으니, 500리나 되는 곳으로 옮긴 것이다. 묘를 이장한 지 7년 후인 1852년에 둘째 아들 재황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조선의 제26대 왕인 고종이다. 12살에 왕위에 올랐으므로 대원군이 오랫동안 섭정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대원군은 절 중창을 위해 시주를 하였으며, 전각 곳곳에 자신의 글씨를 써놓기도 하였다. 1933년에는 한글학회 주관으로 이희승, 최현배 등 국문학자 9인이 화계사에 기거하면서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집필한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근대에 들어와 화계사는 해외에 널리 알려졌다.
1960년 중반부터 숭산 행원 큰스님께서 화계사의 조실로 계시면서 40여년의 세월 동안 전 세계를 돌며 32개국 120여 개의 홍법원을 개설, 5만 여명이 넘는 외국인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화계사는 1991년 대적광전을 창건하고 4층에 국제선원을 개원하여 외국인 불교도들을 수용하고 있다. 현재 이곳에서 승려가 된 외국인은 현정사 주지 스님을 지낸 현각스님 외 무상사 조실 대봉스님, 주지 무심스님 등 백여 명에 이른다.
화계사는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 조계사의 말사이며, 송원당 설정 큰스님을 회주 스님으로 모시고 모든 사부 대중이 열심히 정진하고 있다.
화계사일주문.
일주문은 사찰로 들어가는 첫 번째 관문이다. 기둥이 한 줄로 되어 있어 일주문이라고 부른다.
‘일주’라는 명칭에는 일심(一心)이라는 의미를 부여하지만 신성한 사찰에 들어서기 전에 흐트러진 마음을 하나로 모아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즉, 일주문을 기준으로 중생이 사는 세상인 세간(世間)과 깨달음의 세계인 출세간(出)으로 나누어지는데, 그래서 일주문을 지날 때는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하고 마음을 새롭게 가지게 된다. 이 문에 사찰의 현판을 걸어 절의 격을 나타내기도 하는데 1998년에 조성된 일주문에 ‘삼각산 화계사’ 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범종각.
범종각에는 범종(대종), 법고, 운판, 목어가 천장에 걸려있는데 이 네 가지를 보통 불구사물이라고 부른다. 사찰에서 치르는 의식을 알리거나 공양 또는 함께 일할 때 군중을 모으기 위해 사용하는 것들이다. 하지만 나름대로 다 특별한 의미들을 지니고 있다.
“범종”은 땅 속, 특히 지옥에 있는 중생들을 위하여 치고 “법고”는 가축과 짐승들을 위하여 친다. 그리고 “목어”는 수중생물, “운판”은 날아다니는 날짐승들을 위하여 치는데 불구사물을 모두 치는 것은 이 세상 모든 중생들에게 부처님의 범음을 들려주어 생사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세계로 인도하기 위함이다.
목어(木魚)는 나무를 깎아 물고기 모양으로 만든 것으로, 아랫배 부분을 파내고 거기에 나무막대기를 넣어 두드려서 소리를 내는데, 수중생물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목어는 본래 선종 사찰에서 식사시간을 알리는 기구였다. 스님의 상징처럼 느껴지는 목탁은 바로 이 목어가 변한 것이고 부처님 앞에서 염불이나 독경, 예불을 할 때에나 공양을 할 때, 또는 대중을 모을 때 신호로 사용한다.
그런데 왜 하필 물고기 모양일까? 물고기는 잠을 잘 때에도 눈을 감지 않으므로 수행자들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해서 정진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
법고(法鼓)는 근래에 조성된 것으로, 대형 북으로 홍고(弘鼓)라고도 부르는데, 전통악기의 하나이기도 하다. 불교 의식에 사용되므로 법고라는 이름이 붙었다.
법고는 양쪽이 쇠가죽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축생들에게 부처님의 음성을 전달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쇠가죽을 쓸 때 한쪽 면은 수소의 가죽을 대고, 반대쪽 면은 암소 가죽을 댄다. 이것은 음양이 조화되어야 소리가 제대로 난다고 하며 쉬 찌어지지 않고 오래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운판(雲板)은 구름처럼 생긴 판이라서 운판이라고 부른다. 두드리면 맑고 은은한 소리가 나는데, 공중에 날아다니는 짐승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운판에는 보살상이나 진언이 새겨지며 용과 구름, 달이 새겨지기도 한다. 본래 선종에서 부엌문에 달아두고 공양시간을 알릴 때 두드렸다고 하는데, 부엌은 불을 다루는 곳이고, 구름은 비를 머금고 있으므로 화재를 예방한다는 주술적인 의미도 담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요즘에는 공양 시간보다는 중생 교화용 의식 용구로 많이 사용한다.
대종(大鐘) 대종을 범종이라고도 부르는데 땅 속, 특히 지옥에 있는 중생들을 위하여 친다. 범종은 새벽에 28번을 치고 저녁에는 33번을 친다. 대종은 진암(眞菴)스님이 1978년에 조성한 것으로, 비천상이 날아갈 듯 새겨져 있고 종을 만드는 데 시주한 사람들의 이름이 한글로 종의 한쪽에 빼곡히 적혀있다.
동종(銅鐘)....보물 제11-5호
범종각 천장에 걸려있는 조그마한 종이다. 크기는 작지만 300여년의 역사를 지닌 유물이다. 본래 경북 희방사에 있던 종으로 1898년에 이곳으로 옮겨왔다. 종에 새겨진 명문에 따르면 1683년에 사인 스님에 의해 제작된 조선시대 종이라고 한다. 무게는 300근에 달하며, 2000년 2월15일에 보물 제11-5호로 지정되었다.
이 종은 종의 가장 윗부분인 용뉴에 쌍용(雙龍)을 배치해놓은 것이 특징이다. 상대에는 범자(梵字)를 2줄로 배치하여 장식하였고, 그 바로 아래에는 조선시대 후기 양식을 지닌 유곽이 있다. 유곽대는 도식화된 식물무늬로 채우고, 유곽 안에 있는 9개의 유두는 여섯 잎으로 된 꽃받침위에 둥근 꽃잎을 새겨 넣었다. 하단에는 가는 두 줄의 띠를 둘렀고, 띠 안에 연꽃을 새겨놓았다. 사실성과 화사함이 돋보이는 수작일 뿐 아니라 승려가 공명첩을 가지게 되었다는 당시의 사회상을 알려주는 명문이 남아 있어, 종 연구와 더불어 사료로서 가치가 크다고 한다.
이 동종은 지금은 사용하지는 않지만 현재의 대종을 조성하기 전까지는 이 동종을 아침저녁으로 쳤다고 한다.
여느 절에 가나 프랑카드가 도배를 하고 있다. 이곳 화계사에 범종각에도 합격기원의 프랑카드가 대문짝만하게 걸려 있다. 물론 다른 전각들에서 걸려 있기는 매한가지. 건물이 가진 아름다움을 간직하기 위해서라도 제발 프랑카드는 절집 입구에 가지런하게 달아 놓는 공간을 만들면 안될까 생각해본다. 저게 무슨 주련을 매달아놓은 것도 아니련만 왜 들 그럴까.
대적광전.
조실당.
조실당은 사찰의 조실스님이 거처하는 곳이다.
조실스님은 선종사찰에서 참선을 지도하시는 스님 중 가장 큰 어른을 말한다. 화계사에는 고봉선사와 덕산선사가 조실을 지내셨고, 얼마 전까지 숭산 대선사께서 화계사 조실로 거쳐 하셨던 곳이 바로 이 조실당이다. 지금은 덕숭문중 수덕사 방장이신 설정 큰스님이 화계사 조실을 겸하고 계시며, 화계사에 머무실 때 거쳐하시는 방으로 사용한다. 주로 제자를 지도하거나 재가자들을 지도할 때 사용하기도 하고 손님을 맞아 차방으로도 이용한다.
조실당은 2009년 출입구의 방향을 남향에서 동향으로 바꾸고 담장을 새롭게 꾸몄으며, 봄이면 조실당 담장 안에 핀 홍목련의 자태가 우아하여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한다.
천불오백성전과 삼성각.
대웅전.
화계사 중심 법당으로 정면3칸, 측면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현재의 대웅전 건물은 1870에 용선(龍船)과 초암선사가 흥선대원군의 시주를 받아 지은 것이다. 그때에 지어진 것이 현재의 대웅전과 큰방(보화루)이다. 당대를 호령하던 흥선대원군이 시주자이므로 공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1870년에 환공야조(幻空冶兆)가 지은 <화계사대웅보전중건기문>에 의하면 석수(石手) 30명, 목공(木工) 100명이 달려들어 불과 수개월 만에 완성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웅전은 제법 높은 단 위에 세워져 있어 앞마당에서 올려다보면 지붕의 양쪽이 마치 커다란 새가 날개를 펼친 듯 활력이 있다. 지붕 처마를 받치고 있는 공포는 장식품으로도 손색이 없고, 특히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설치하였는데, 이렇게 공포를 많이 꾸며놓은 건축양식을 다포계양식이라고 한다.
문미에는 대웅전 현판이 걸려 있는데, 현판 글씨는 근세의 명필인 몽인 정학교가 쓴 글씨이다. 대웅전 좌우측 벽에는 석가모니의 일생을 표현한 벽화가 그려져 있으며, 정면 문 하단에는 연꽃문양이 그려져 있으며, 조선 후기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는 이 대웅전은 건물 전체가 1986년에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 65호로 지정되었다.
전각 내부를 들여다보면 본존인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봉안되어 있다. 이 삼존불은 근래에 조성된 것이다.
뒤에 있는 후불탱화는 1875년에 화산스님이 조성한 것으로, 주불은 석가모니불이 아니고 아미타불이다. 아미타불 주변으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 보현보살, 문수보살, 지장보살 등과 사천왕, 십대제자 등이 그려져 있다.
대웅전 왼쪽에는 본래 관음전이 있었는데, 1974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고 한다. 관음전 역시 창건 초기부터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단지 관음전에는 자수관음상이라는 특이한 유물이 전해져오는데. 이 자수관음상은 1875년에 왕실에서 내린 것으로, 이 상을 봉안하기 위해 1876년에 초암스님이 관음전을 중수하였다고 전해온다.
화계사 대웅전 주련
비로해장전무적 毘盧海藏全無跡 비로자나의 법해에는 완전한 자취가 없고
적광묘사역무종 寂光妙士亦無踵 적광묘사 또한 아무런 흔적이 없네.
겁화통연호말진 劫火洞然毫末盡 겁화가 훨훨 타서 털끝마저 다해도
청산의구백운중 靑山依舊白雲中 푸른 산은 예과 같이 흰 구름 속에 솟았네.
명부전.
저승의 명부를 상징하는 불전을 말한다. 죽은 사람들을 고통에서 구원해 주고자 대원력을 세우신 보살로 알려진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모신 곳이며, 지장전(地藏殿)이라고도 한다. 또한 저승의 심판관인 시왕을 모신 곳이라고 하여 시왕전(十王殿)이라고도 부른다.
화계사 명부전은 명부(冥府)의 세계를 상징적으로 꾸며놓은 전각이다. 명부란 지옥을 뜻하는데 지옥의 모습을 그대로 꾸며 놓은 곳은 아니고, 죄인들을 심판하는 법정과 비슷하다. 한가운데에 지장보살이 판사처럼 앉아있고 주변에는 시왕들이 검사처럼 날카로운 눈매로 아래를 굽어보고 있다. 지장보살을 돕는 도명존자와 무독귀왕, 시왕을 돕는 동자, 판관과 녹사, 신장 등이 실내 앞면을 가득 메운다. 한쪽에는 생전에 저지른 죄를 비춰볼 수 있는 업경대가 설치되어 있다. 업경대로 죽은 사람의 죄를 비춰보고 시왕들이 문초를 하며, 그 결과에 따라 극락이든 지옥이든 어디론가 망자를 보내는 곳이다. 망자는 죽은 지 49일째가 되는 날에 어디론가 가게 되는 까닭에 후손들은 이날 특별히 정성을 다해 불공을 올린다. 죽은 이가 좀 더 좋은 곳으로 갈수 있도록 비는 것이다. 이 의식을 49재라 한다. 명부전은 바로 49재를 치르는 곳이다. 불교신자가 아니더라도 자신의 조상이 좋은 곳으로 가기를 바라며 49재를 지내곤 하는데, 이것은 우리 민족이 효를 인간의 가장 중요한 도리로 여기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래서 어느 절이든 명부전은 쉽게 발견할 수 있은 전각이다.
화계사 명부전인 현재의 건물은 1878년 새로 지은 것이다. 당시 화계사는 왕실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던 절로서 왕명으로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지장보살과 시왕상을 옮겨 모시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황해도 배천의 강서사에 있던 지장보살과 시왕상이 선정되어 이곳 화계사로 모시게 되었다. 이때 이 지장보살과 시왕상을 봉안하기 위하여 초암스님이 조대비(趙大妃)의 시주를 받아 명부전을 건립하게 된 것이다.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2001년에 기와를 바꿔 얹고 벽도 채색해 새 건물 같다. 현판과 주련은 흥선대원군의 친필 그대로이고, 추사 김정희의 제자답게 추사체의 특징을 과시하고 있다. 내부역시 2001년에 새로 꾸며 지장보살상은 물론 각종 시왕상, 동자상등이 말끔하게 단장되어 있다. 하지만 지장보살의 후불탱화는 1878년에 조성된 그대로이다. 최근 개금불사를 위해 지장보살의 복장을 열어보니 1649년(인조27)에 강서사에서 제작했다는 발원문이 나와 조성시기가 밝혀졌다. 발원문과 함께 여러 가지 책의 불경과 불사리도 나왔다.
지장보살상은 전체적으로 강건한 기상이 엿보인다. 얼굴은 둥그렇지만 눈매가 길고 콧마루가 우뚝하며, 굳게 다문 입은 용맹스러움이 배어 있다. 설법인을 짓고 잇는 손매도 탐스럽고 탄력이 있으며 어께선도 부드러우며 풍부하다. 무릎은 전후좌우의 길이와 폭이 알맞은 비래를 갖추면서 넉넉한 두께를 유지하여 안정감을 준다. 불의는 상당히 두껍게 표현하여 매우 사실적이다.
좌우에 시립해 있는 도명존자상과 무독귀왕상은 물론 시왕. 판관. 동자. 사자. 수문장상도 모두 지장보살과 같은 양식기법으로 제작되었다. 판관의 사모나 시왕의 의관 또한 이 시대의 의제(衣制)를 가늠할 수 있을 만큼 사실적이다. 이렇듯 지장보살상과 시왕상은 당시를 대표할 수 있는 미술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복장 유물까지 온전하게 나와 불교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대웅전 앞과 명부전 앞에는 놋 항아리(청동)가 있는데, 이것은 홍대비(1904)가 내린 놋물드므(유수옹) 1벌이다. 전각이 나무로 지어져 불나면 끝장이라 소방용으로 놓아 둔 것이다. 이러한 놋항아리-물드므는 창덕궁의 인정전(仁政殿, 1804), 선정전(宣政殿, 1647), 대조전(大造殿, 1888) 것과 같아서 눈뜨게 한다.
화계사 명부전 주련
지장대성위신력 地藏大聖威神力 지장보살님의 위대하고 신통한 힘은
항하사겁설난진 恒河沙劫說難盡 억겁을 두고 설명해도 다하기 어렵나니
견문첨례일념간 見聞瞻禮一念間 보고 듣고 예배하는 잠깐 사이에
이익인천무량사 利益人天無量事 사람과 하늘에 이익 되는 일 헤아릴 수 없어라.
삼성각.
불교의 여러 신(神)중에는 우리나라에서만 믿어 오는 신들도 꽤 된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산신과 칠성신, 그리고 독성신이다. 이 세 신은 본래 별도의 건물에 모시는데, 산신은 산신각에, 칠성은 칠성각에, 독성은 독성각에 각각 모신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세신을 한꺼번에 모시고 건물 이름도 삼성각이라고 부른다.
본래 화계사에는 산신각이 있었는데, 1885년에 금산(錦山)스님이 중수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 산신각이 너무 낡아서 1975년에 진암(眞菴)스님이 고쳐 지은 것이 바로 현재의 삼성각이다.
정면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기와는 동기와를 얹었다. 내부에는 1973년에 조성한 칠성탱화와 독성탱화, 산신탱화가 봉안되어 있고, 외부 벽화는 마음을 찾아가는 심우도가 그려져 있다.
산신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토속 신으로 나이 든 도사의 모습으로 나타나며 호랑이와 동자를 거느린다.
칠성신은 인간의 수명장수와 재물을 관장하는 신을 말한다.
칠성은 본래 도교에서 신앙하던 것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와 기우(祈雨)·장수·재물을 비는 민간신앙으로 자리 잡았다. 이후 칠성신에 대한 제사는 조정과 민간에서 계속되었으며, 이 신앙이 불교에 수용되어 사찰 안에 칠성각을 짓고 칠성신을 모시게 되었다. 칠성각은 조선시대에 나타나기 시작해 지금도 대부분의 사찰에 두고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의 사찰에서만 볼 수 있는 특유한 경우이다. 칠성각에는 칠여래(七如來)와 북두칠성을 상징하는 칠원성군(七元星君)을 탱화로 그려 봉안하고 있다.
독성은 남인도 천태산에서 홀로 깨달아 성인이 된 나반존자를 가리킨다. 희고 긴 눈썹을 가진 도인으로 오른 손에는 석장을, 왼손에는 염주 또는 불로초를 들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천불오백성전.
대웅전의 동남쪽에 자리 잡은 천불오백성전(千佛五百聖殿)은 오백 나한을 모신 전각이다. 건물 자체가 높은 단 위에 설치된 데다가 내부에 많은 나한상(像)을 봉안하고 있어 건물 높이가 상당하다.
1964년에 조성된 전각으로 내부에 봉안된 오백나한상은 최기남이 조성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그는 1915년 관직에서 물러나 금강산에 들어가 십팔 나한상과 천불상, 사천왕상 등의 조각에 열중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여주 신륵사에 자신이 조성한 조각상등을 봉안했다가 이후 화계사로 옮겨와 최기남의 가족이 천불오백성전을 짓고 모시게 된 것이다.
나한(羅漢)은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성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최고의 깨달음을 얻었으므로 부처나 보살 못지않게 공양을 받을 만한 위치에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러한 나한을 모신 건물에는 흔히 ‘오백나한전’, ‘응진전’이라는 이름이 붙는데, 이곳만은 특이하게 천불이 덧붙여져 있습니다. 그래서 법당에 불상이 천 개 모셔져 있을 것 같지만 사실 오백나한상과 관음보살상만 모셔져 있습니다. 건물 이름에 천불이 붙어 있는 것은 천불전과 나한전을 겸한다는 의미이다.
오백 나한은 경전에 많이 등장한다. 석가모니가 중인도 교살라국 사위성에서 오백나한을 위해 설법을 했다고 하고, 매달 15일 마다 오백나한들을 위한 계를 설하였다고도 한다. 또 석가모니가 열반에 드신 후 중인도 마가다국 칠엽굴에서 오백 나한이 모여 불전을 편찬하였고, 석가모니 사후 600년이 지난 뒤 인도 서북부의 가습미라에서 열린 제 4결집에 모인 비구의 수가 500이라 오백 나한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처럼 나한은 석가모니 생존시에 따르던 500명의 제자를 뜻하기도 하고, 열반하신 뒤에 여러 가지 중요한 일에 모여들었던 500명의 나한이나 비구를 뜻하기도 한다.
아무튼 이들은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에서 특별한 신앙의 대상으로 자리 잡아 오늘에 이르는데,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조성된 오백 나한의 모습이 다 다르다는 것과 우리 인간들의 모습과 닮아 있고 해학적인 모습이 많다고 한다. 그래서 오백나한상 중에는 자신이 아는 사람의 얼굴을 하나쯤은 찾을 수 있다고 전해진다.
천불오백성전 주련
통화현관안저심 通化玄關眼底尋 깊고 오묘한 가르침 깊이 들어가니
색즉공혜공시색 色卽空兮空是色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네
차시이석즉황금 此時耳石卽黃金 이때에 기와장이 황금이 되는 때이니
도심맥맥의심심 道心脈脈意沈沈 보리 구하는 마음 계속 깊이 이어가네.
대적광전.
대적광전은 화계사에서 가장 크고 웅장한 건물이다.
1991년 정수스님이 조성한 대적광전은 정면7칸, 측면4칸, 4층의 건물이다. 근래에 들어서 절에서도 복합건물을 세우는 경우가 흔한데, 이 건물 역시 여러 가지 기능을 갖추고 있다. 1층은 식당, 2층은 강의실(제일선원)과 요사, 3층은 법당으로 사용하며 4층은 국제선원이 사용하다가 지금은 ‘일요영어법회’와 ‘템플스테이’ 장소로 이용하고 있다.
3층에 법당은 그 규모가 수백 명이 한꺼번에 대중법회와 불공을 드릴 수 있을 정도로 내부가 넓다. 매주 일요일 오전11시에는 이 대적광전에서 일요가족법회를 열고 대덕스님들을 모시고 법회를 연다. 이곳에서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에 철야 삼천배 정진을 하고 있다.
대적광전 내부에는 중앙에 청정법신 비로자나부처님, 좌우측에 원만보신 노사나부처님과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부처님이 삼신불을 이루고 있어 화계사가 선종 사찰임을 잘 나타내고 있다. 협시보살로는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보현보살, 문수보살을 모셨다.
건물 규모가 워낙 크고 법당 내부 또한 넓어 이 전각이 주 전각처럼 느껴지지만 여러 가지 기능을 담기 위하여 대형으로 지은 것일 뿐이며 주 전각은 대웅전이다.
흔히, 사찰에서 대적광전이라고 하면 바로 비로자나불을 모신 건물임을 의미하는데 비로나자부처님은 “빛” 그 자체를 의미한다. 비로자나불은 연화장(蓮華藏) 세계에 있는 부처님으로 그 세계가 장엄하고 진리의 빛이 가득한 대적정의 세계이므로 전각 이름을 대적광전이라 부른다. 그러나 비로자나불만 모시면 비로전 또는 적광전이라 부른다.
보화루.
대웅전 앞마당에 공자형(工字形)의 큰 건물이 있는데 이것이 보화루(寶華樓)이다.
이 건물의 마루에서 대웅전을 바라보면 불상이 보이는데 곧 마루에서 바로 예불을 드릴 수 있도록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건물은 서울 근교의 왕실 원찰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으로 보통 ‘대방(大房)’ 이라고 하는데, 우리말로 ‘큰방’ 이라는 뜻이다.
보화루에는 군데군데 현판이 붙어 있는데 ‘보화루’라는 현판은 추사의 수제자 위당(威堂) 신관호(申觀浩)가 쓴 것이다. 그리고 ‘화계사’ 라는 현판은 1866년에 흥선대원군이 시주하여 대웅전을 중수할 때 쓴 글씨이다. 흥선대원군이 쓴 현판에는 좌측에 두인과 우측에 ‘대원군장(大院君章)’, ‘석파(石坡)’라는 방인의 도서 2과가 있는데, 글씨는 예서와 해서를 혼융하였고 질박한 느낌을 준다.
본래 보화루는 대적광전에서 볼 때 단의 높이가 있어 루(樓)의 성격을 가졌으나 대적광전을 지으면서 계단을 없애고 평평하게 하였다.
1933년에는 한글학회의 주관으로 이희승, 최현배 등 국문학자 9인이 화계사 보화루에 기거하면서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집필한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현재 보화루는 큰 방과 종무소, 그리고 다실로 사용하고 있다. 큰방에서는 법회 이외에도 불교대학 강의, 그리고 각 신행단체의 회의장소로도 이용되고 있다.
보화루에는 관음전을 대신하는 관세음보살상을 봉안하고 후불탱화로 석가모니불을 주존으로 좌우에 문수, 보현보살, 사천왕, 10대 제자를 봉안 하였다. 보화루는 2010년 전면 개보수를 하여 새롭게 단장 하였다.
천불오백성전과 보화루 뒤로 대웅전.
'혼자 걷는 인생 > 백팔사찰순례하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47. 법주사(속리산) (0) | 2015.06.17 |
---|---|
46. 호압사, 보덕사(서울 삼성산) (0) | 2014.10.15 |
44. 능원사, 보광사(서울 도봉산) (0) | 2014.08.28 |
43. 전등사(강화 정족산) (0) | 2014.08.25 |
42. 보문사(강화 석가산) (0) | 2014.08.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