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상의 산이란 산은 다 가겠다”
“내가 왜 암에 걸렸습니까?”
그 말에 의사는 “첫째가 스트레스, 둘째는 술담배, 셋째는 고기를 많이 먹어서 그렇다”고 답했다. 믿을 수 없었다. 담배는 평생 피워본 적도 없고 술도 많이 마시는 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유는 단 하나 스트레스 때문이었다.
상업고교 교사였던 문정남(70)씨는 정년을 2년 앞둔 1998년 교장으로부터 간곡한 부탁을 받았다. “나가시기 전에 학생부장을 맡아 땅에 떨어진 학교의 기강을 잡아 달라”는 것이었다. 평생을 바친 교직이었기에 거절할 수 없었다. 결국 마지막 열정을 학교에 쏟기로 했다.
그러나 청소년들이 어디 옛날처럼 교사가 얘기한다고 고분고분 따르는 시대인가. 더구나 상고였기에 공부에 관심 없는 아이들이 많았다.
“복장·용의 지도단속, 흡연 단속, 두발 단속. 아무리 순찰을 돌고 해도 막을 수가 없어요. 쉬는 시간이면 화장실에 담배 연기가 꽉 차요. 걸린 애들 그냥 보낼 수 없으니 일일이 벌 세우고, 또 요즘 애들이 어디 말이나 제대로 듣나요. 막 대들어요. 그러니 하루 하루가 스트레스였죠.”
직장암 2기 말에서 3기로 넘어가는 과정이었다. 중앙병원(현 아산병원)을 찾았으나 1차 수술 결과는 실패였다. 재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그냥 죽을란다. 수술 안 할란다”며 문씨는 수술을 거부했다. 수술을 준비하는 과정이 너무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수술 전 25일 동안 물 한 방울 안 먹고 링거를 맞으며 살았다. 내내 들었던 생각이 “저 물 좀 마셔 봤으면”이었다. 더구나 산에 다니던 사람이 병실에 있으려니 죽을 맛이었다. 당시 몸무게가 65kg에서 45kg으로 줄었다.
“그때 내 몰골을 본 사람들은 제가 죽을 줄 알았대요. 재수술 안 받으려고 집에 갔는데 너무 아파서 다시 응급실에 온 거예요. 결국 의사 설득으로 재수술을 받았어요.”
결과는 성공이었다. 이후 6개월 동안 항암주사를 맞았다. 이 기간에 다른 사람들은 머리카락이 빠지고 입맛도 없고 여러 증상이 온다는데 이상하게도 그에게는 아무 증상이 없었다. 통원하며 1주일 동안 주사를 맞으면 3주일을 쉬는 방식으로 6개월이 지났다. 암이 어떻게 진행됐는지 결과를 확인하러 병원에 갔다. 몇 년을 그렇게 반복했다. 그러나 그는 “죄인이 사형선고 받으러 가는 기분”이었기에 한 번도 결과를 보러 간 적이 없었다. 아내가 대신 갔다.
“내 목숨을 당신한테 맡기겠다”
결과는 다시 나빠졌다. 암이 간으로 전이됐다는 것. 암 환자가 다시 암이 전이되면 살 수 있는 확률이 상당히 낮아지기에 그에게는 사형선고였다고 한다. “죽기 전에 다른 병원에서 치료해보고 싶다”고 주치의에게 부탁해 삼성의료원으로 갔다. 어떻게든 수술 안 하고 치료하는 방법을 찾아보려 했으나 간 뒤쪽으로 암이 퍼져 결국 수술 날짜를 잡아야 했다.
그 후 그는 매제와 함께 고향 영동 땅에 묏자리를 보러 갔다 왔다. 그리곤 중앙병원의 전 주치의에게 수술 날짜를 잡았다고 했더니 “내가 당신 배를 두 번이나 열어 봤으니 더 잘 알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래서 “그럼 내 목숨을 당신한테 맡기겠다”고 하고 잡혀 있던 수술을 취소하고 다시 병원을 옮겼다.
“수술 기다릴 때의 마음, 안 해본 사람은 몰라요. 마음이 지옥을 넘나드니 빨리 수술 날짜가 왔으면 한다니까요. 근데 수술 날짜가 연기되더니 CT를 찍자고 해요. 그러더니 나중에는 퇴원하래요. 간으로 전이된 흔적이 없어졌다잖아요. 그게 지금도 이해가 안 돼요. 1000명 중 한 명은 이렇게 나을 수 있다는데, 처음 검사했던 기계가 잘못된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어쨌든 기적이죠.”
2001년부터 2006년까지 직장암 치료를 받았고 지금은 “의학적으로 완치단계”라는 게 그의 말이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기적적으로 구한 게 산, 그리고 하느님이라 믿는다. 무종교인 그가 말하는 하느님은 애국가 속의 하느님으로 절대적인 신(神)을 뜻한다. 신을 믿지 않아도 사람이 아프면 그리 된다고 한다.
문정남씨는 암 선고를 받기 전, 젊을 시절부터 좋아했던 산을 본격적으로 타기로 하고 “500개 산을 오르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러나 300산쯤 올랐을 때 병이 찾아왔다. 병원에서 늘 ‘500산을 타게 해주세요’하고 빌었다. 그리고 항암치료를 받을 때부터 이어서 산에 갔다. 남들이 다 말려도 차라리 산행하다 죽겠다고 맘을 굳게 먹었다.
의사가 얘기하길 암세포가 가장 싫어하는 게 산소이니 산소함유량이 가장 높은 산으로 가는 게 최고의 치료방법이라 믿은 이유도 있었다. 그렇게 산에 가면 큰 나무를 끌어안고 살려 달라고 빌었다. 옆에 종교 있는 사람들은 무슨 소나무한테 비느냐고 했지만 그게 그만의 기도 방법이었다. 산행하노라면 자연스레 산에 몰입해 잡념이 사라지고 스트레스도 날아가 버려 암에 가장 좋은 치료약이었다고 한다.
3800산을 오른 일흔 살의 화학 선생님
500산을 다 타고, 그는 1000산을 타게 해 달라고 하느님께 빌었다. 그런 식으로 해서 3800산에 올랐다. 기가 막힐 일이다. 그 많은 산을 어찌 다 올랐단 말인가. 지금은 5000산이 목표지만 기도할 때 “저는 염치가 없어서 더 이상 빌지 못합니다. 다 하느님 뜻대로 하세요”라고 기도한단다.
2000년 1월 1일부터 개수를 세었으며 그 이전에 오른 것은 다 무효로 하고 시작했다. 교육자 출신답게 산행 기록을 엑셀 파일로 한눈에 볼 수 있게 정리해 두었다. 순번, 산 이름, 높이, 소재지, 오른 날, 회비, 등정 일수, 산악회 순으로 나눴다. 이 과정에서 1대간 9정맥도 완주했다. 100~200m대 낮은 산도 포함시켰는데 “산을 3000개 이상 오르면 갈 산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 그의 대답이다. 그렇다고 해서 도로에서 몇 발짝 걸어서 낮은 산봉우리에 올랐다고 개수에 포함시키는 것은 아니며 초입의 해발고도가 낮아 나름 산행다운 시간이 걸려야 기록에 넣었다.
“3000산 이상 넘어가니 높이에서 자유로워지더군요. 성철 스님 말대로 산은 산입니다. 히말라야 8000m를 가는 게 아니라면 산 높이를 따지지 말아야 합니다. 목포 유달산만 해도 낮지만 그 위세가 남다르지 않습니까. 강원도 가면 1000m 넘는 산을 시작하는 데가 700m인데 섬산이나 어떤 지역에 가면 50m 이하에서 시작하는 산이 많거든요. 항상 새로운 신부를 찾는 기분으로 산을 타요. 그리고 아주 어렵게 산을 대해요. 존중하고요. 가끔 산이 낮다고 무시하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러면 속으로 당신은 아직 산을 알려면 멀었다고 여기죠.”
그는 보통 일주일에 4~5일 산에 간다. 당연히 처음 가는 지방의 산이다. 연속산행은 10일 연속이 기록이란다.
“화요일은 지맥 전문산악회인 맥사랑, 수요일은 사당 산사랑산악회, 목요일은 갈 때도 있고 쉴 때도 있고, 금요일은 제가 회장으로 있는 뉴개척산악회, 일요일은 안내산악회에 많이 가니까 골라 가죠.”
하루 산행에서도 많은 봉우리를 가는 게 목표다 보니 그의 걸음은 나이에 비해 상당히 빠르다. 그래서 천천히 산을 음미하면서 가는 게 더 산을 제대로 타는 것 아니겠냐 물으니 그는 빨리 가나 천천히 가나 산을 즐기는 데는 아무 차이가 없다고 한다. “산을 즐기는 취향의 차이 아니겠느냐”며 “이런 스타일이 내 적성에 맞다”고 한다.
그가 가는 산은 대부분 등산로가 없는 알려지지 않은 산이다. 3800개의 산에 올랐으니 이제 갈 산은 그런 데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등산화는 1년이 안 돼서 다 떨어지고, 스틱과 배낭은 1년 반 정도면 다 망가진다. 매일 산에 가다시피 하는데 그래도 정상에 오르면 감흥이 있을까.
“항상 정상에 섰을 때가 제일 좋아요. 낮은 산도 전망 좋은 데가 많은데, 그런 데에서 보노라면, 내가 시인은 아니라 말은 잘 못하지만 진짜 우리나라는 금수강산이 맞습니다. 외국 산의 정상은 장쾌한 맛은 있지만 우리나라 산처럼 아름답지 않아요. 개인적으로는 육산보다 암릉이 있는 다이내믹한 산을 좋아하고 꼽으라면 북한산이 좋아요. 북한산만한 산도 없다고 봐요.”
외국 산은 일본 북알프스를 종주했으며 대만 옥산, 중국 옥룡설산, 키나발루, 미국 탈라크, 랑탕 히말라야 얄라피크(5732m)를 등정했다. 5732m가 최고 높이로 지난해 1월에 올랐다. 폐활량이 남들보다 좋아서 69세라는 나이에도 가능했단다. 하산할 때는 보통 뛰다시피 산을 내려온다. 그걸 보고 남들이 산 모르는 무식한 사람이 내리막에서 뛰어간다고 하지만, 그렇게 다녀도 무릎 아파본 적이 한 번도 없단다. “내 체력은 내가 안다”는 게 결론이다.
“등산 이외에 다른 일은 안 해요. 내 생명을 연장시켜준 게 산이고, 산이 내 모든 희망입니다. 딴 데 신경 안 쓰고 다른 욕심도 없으니까요. 어쩌다 이틀 연속 쉬면 산에 가야 된다는 강박관념이 들어요. 그러다 산에 들어서면 어머니 품에 왔구나, 고향에 왔구나 하며 마음이 편해져요.”
문씨의 부인은 최고의 후원자다. 새벽 5시에 그가 눈을 뜨면 산에서 먹을 도시락을 싸 준다.
▲ 산이 곧 어머니 품이요, 고향이라는 그는 산행할 때가 가장 편안하다고 한다.
“가난한 이에게도 기회는 온다”
그는 광신상고에서 28년을 근무했다. 당시 상고는 정말 가난한 애들이 다녔다고 한다. 교편을 잡을 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그는 학교에 장학금을 내고 있다. 28년 동안 촌지는 딱 두 번 받았다는 고백이다. 아주 가난한 지체장애인 어머니가 5,000원을 가져왔는데 그걸 거절하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받았다고 한다. 그 후에는 더 많은 돈으로 그 학생을 도와줬다.
“이렇게 얘기하니 내가 훌륭한 사람 같은데 사실 상고, 공고는 학부모들이 촌지 안 줘요. 줄 일이 없죠.”
교편을 잡을 수 있었던 건 수도여자사범대학(현 세종대) 김현실 교수 덕분이다. 충북 영동 황악산 기슭에서 태어나 가난 탓에 고등학교도 3년을 늦게 들어갔다. 졸업 후 상경해 벽돌공장에서 일하던 중 대학 서무과에서 근무하던 사촌형의 추천으로 대학 안의 논과 정원 관리를 맡았다.
쉬지도 않고 열심히 일하자 당시 최옥자 학장의 스승이었던 김현실 교수가 성실함을 인정해 야간대학에 보내주었다. 그렇게 4시에 퇴근해 한양대 화학과를 다녔고 화학 교사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제자들에게 ‘성실’을 가장 큰 덕목으로 가르쳤다. “누가 보든 말든 항상 성실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가난한 이에게도 기회가 온다”는 것이 그가 항상 입버릇처럼 제자들에게 하던 말이다.
“산은 만병통치의 최고 명의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건강이 허락된다면 1만 산을 다 채우고 싶어요. 그러나 그건 하느님 뜻에 달렸고……. 어쨌든 지도상의 산은 다 가고 싶어요.”
산 욕심으로 따지면 국가대표는 떼어 논 당상이다. “8000m 14개 봉우리를 다 가겠다”는 고산 등반가의 포부를 능가하는 “지구상의 산은 다 가겠다”는 절대 불가능한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결코 탐욕스럽지 않은 행복한 욕심으로 느껴지는 건 왜일까. 지금 이 시간에도 어느 외진 산 속에서 덤불을 헤치며 산행하고 있을 문정남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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