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둘레길(완)

지리산 둘레길 2 (인월 월평마을에서 주천 치안센터까지)

돗가비 2010. 4. 10. 20:33

100410. 흐리가 비가 조금내린 후 맑음. 혼자서.(둘레길의 자료는 (사) 숲길과 지리산 시인 이원규님의 글에서 가져온 것이다)

인월면 - 월평마을 - 흥부골자연휴양림 - 군화동 - 비전마을 - 신기마을 - 북천마을 - 서림공원 - 운봉읍 - 옛 양묘장 - 행정마을 - 서어나무숲 - 가장마을 - 질미재 - 덕산저수지 - 노치마을 - 회덕마을 - 구룡치 - 솔정자 - 내송마을 - 주천면
(24km구간, 걷은 시간은 휴식,식사시간 포함해서 06:30분)

 지리산 둘레길을 한 번 가보고나서는 별로 맘이 내키지 않아 시큰둥하고 지냈었다. 작년 11월이었으니 벌써 5개월이 지나버렸나보다. 내가 살던 시골 동네와 별반 다를게 없다싶어 미루다가 기왕 시작한거니 마무리는 지어야겠다싶어서 이번 주말을 지리산에서 보내기로 하고 길을 나섰다. 동서울에서 지리산을 가는 심야버스를 예약하는데 표가 2 장 남았다. 지리산을 가는 사람들이 그리도 많은갑다. 버스 시간에 맞추어서 집을 나서는데 배낭도 가볍게 하고 먹을거랑도 준비를 대충하고 나선다. 동네 길을 가는거라 큰 어려움을 없으리라. 동서울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타는데 예약하지 않고 나온 사람도 많은데 자리가 없으면 낭패를 볼 요량인데 지리산이 좋긴 좋은가보다. 버스를 타고 금산인삼랜드휴게소에소 휴식을 취하고 나서 옆사람이 말을 걸어와 잠을 못자고 말대꾸를 하면서 가게 되었다. 그 분의 아들이 지리산둘레길 중황마을 근처에 꼬부랑길 민박집을 한다고 자랑하신다. 지났던 길이 아니라면 그 민박집에 들러 볼만한데 난 방향이 다르니 어쩌랴.

인월에 하차하여 쉴 곳을 찾아 나서는데 마땅한데가 없다. 여관은 문이 닫혀 있고 다른 곳을 가니 터무니없는 가격을 불러대면서 방이 없단다. 터미널 근처의 패밀리마트에 들어가서 도시락을 하나 사 먹으면서 시간을 죽이려니 답답해 미칠지경이다. 그래도 어쩔수없으니 종업원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5시가 되어 지리산장에 가니 목욕탕 문을 열려고 준비하니 그나마 반갑다. 목욕탕에 들어가서 잠시 눈을 붙이고 나니 7시다. 샤워를 하고 나서니 훨씬 몸이 가볍다. 기온은 생각보다는 상당히 낮은듯하고 콧물이 나오는게 차에서 내려 길거리에서 서성거리면서 찬기운을 쎈게 벌써 몸에 영향을 주고 있나싶다. 이제 본격적인 걷기의 시작이다.

 07:30 구인월교에 도착하여 걷기를 시작한다. 다리를 건너면 시골동네치고는 아름답게 잘 다듬어진 월평마을이다. 마을이 끝날 무렵에 구인월로 가는 농로에 접어들어 가니 공사가 한창인데 흥부골휴양림이다. 둘레길 민박도 가능하다는 간판도 걸려 있다. 휴양림을 가는 비탈길을 올라서면 그때부터는 한없이 임도가 이어지는데 아침에 걷는 산길이 더없이 맑고 깨끗해서 좋다. 양옆으로는 잣나무가 숲을 이루고 오리나무가 빽빽하다. 그런 너른 길을 대덕리조트까지 걸어 간다. 혼자서 아무도 없는 산길을 걷는 기분을 느껴보시라. 발걸음이 빠른 사람을 보고 빨리 걸으면 산천 구경을 어찌하냐고 묻는다. 그러니 천천히 걸으면서 사방을 구경하라고. 그러나 빠른 사람은 빠른 속에서 볼걸 다본다. 느린 사람보다도 더 많은것을 볼 수도 있다. 내가 걷는 속도는 다른 사람보다는 약간 빠른듯하다. 그래도 볼건 보고 지나칠건 지나치면서 산천구경은 계속된다.

월평마을

운봉에서 박씨가 처음 입주하고 새마을 신촌으로 불리다가 후에 마을 형국이 반월형이라 월평(月坪)이라 불렀다. 또는 마을 터가 동쪽 팔랑치를 마주하고 있어 달이 뜨면 정면으로 달빛을 받는다. 월평(月坪)이란 마을 이름이 말하여 주듯이 ‘달이 뜨면 바로 보이는 언덕’이란 뜻으로 월평이라 하였다. 1800년대 후반 천석꾼이 운봉 박씨가 이곳에 터를 잡고 사람을 모아 살기 시작하였다.

 월평마을의 영월정. 달이 뜨면 바로 보이는 언덕마을에 있는 달을 맞이하는 정자라니 얼마나 운치가 있는가.

 지리산 태극종주가 시작되는 구인월마을입구와 인월마을의 유래.

 흥부골자연휴양림. 여기서부터는 흙길을 밣으면서 마냥 걸어간다.

 잣나무숲길이 이어지고...

 물오른 오리나무가 빽빽하다.

 똑딱이도 쓸만하고...

 한 켠으로 허브농장이 있는 저수지. 국가가 관리하는 곳이라서 관리가 잘 되고 있다.

 대덕리조트. 주말인데도 사람들이 없는지 썰렁하다.

 비전마을로 들어서는 입구의 탑.

비전마을

황산대첩비가 세워지고 이 비각을 관리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을 형성하였다. 마을이 비(碑) 앞에 있다 하여 마을 이름을 비전(碑前)으로 불리게 되었다. 또한 마을 5리 전에 하마정이 있어 말을 탄 관리가 황산 대첩비를 지날 때면 하마비(下馬碑)가 서 있는 이 곳에서 말을 내려 걸어와 비 앞에서 절을 하였다. 이곳에는 구한 말까지 2층 정자가 있어 주변의 주막과 기녀(기생)와 소리꾼, 가마꾼(轎軍)이 상주하던 곳이었다. 그래서 비전을 역촌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또한 조선말 동편제의 가왕(歌王)이라 일컫는 송흥록과 송만갑이 태어난 곳이고 명창 박초월이 성장한 곳으로 동편제의 고향으로 국악의성지가 있는 곳이다. 비전 마을이 동편제의 발상지가 된 것은 이곳 하마정과 무관하지 않다.

 비전마을에 있는 국악의 성지.

 비전마을의 당산나무.

 비전마을 휴식터. 람천옆에 있는데 여름이면 무지 시원하겠다. 이 앞에는 가왕 송흥록과 국창 박초월 선생이 살았다는 생가가 복원되어 있다.

 송흥록과 박초월선생의 생가.

비전마을에서 여기까지는 람천 둑방길을 따라 걷는다. 어려서 학교다닐때 하교길이면 집에 일찍 들어가기 싫어 이런 둑방길을 걸으면서 친구들과 여러가지 장난을 하며 보낸적이 많았는데...

 생가는 아주 잘 복원되어 있는데 살아계실때는 이러진않았을것이다. 주변의 민가 6채 인가를 헐고 다시 지었다고 한다.

송흥록 

송흥록(宋興祿, 1818년~?)은 조선 말기의 판소리 명창이다. 전라북도 남원군 운봉면 비전리에서 태어났다.

근세 8명창 가운데 한 사람이다. 판소리의 중시조 또는 가왕(歌王)으로 꼽히고 있다. 판소리에 우조, 계면조를 체계적으로 다루었고 진양조를 도입하는 등 고도로 예술화시킨 판소리의 중시조(中始祖)라 할 수 있다.

동편제 유파를 확립하였으며, 그의 가문에서는 송광록·송우룡·송만갑 등 쟁쟁한 명창이 잇따라 배출되었다. 판소리의 진양조를 창시한 김성옥은 그의 매부이다. 특장은 《춘향가》와 《적벽가》, 《변강쇠가》이다. 세도가인 김병기의 총애를 받고 ‘호풍환우(呼風喚雨) 송흥록’이란 별호로 불리었다. 그의 집에서 몇 년간 기거했으나, 1862년(철종 13년) 김병기의 비위에 거슬려 함경도로 추방되었다. 후에 흥선대원군이 그를 찾았으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그의 더늠은 《춘향가》의 〈옥중가〉 중에서 ‘귀곡성’(鬼哭聲)과 단가 〈천봉만학가〉(千峰萬壑歌)이다. 이것은 오늘날 〈고고천변〉(皐皐天邊)으로 고쳐 불리고 있다.

박초월

1934년 김정문(金正文)에게 소리를 배웠고, 1935년부터 10년간 송만갑(宋萬甲)에게 〈춘향가〉·〈심청가〉·〈수궁가〉·〈적벽가〉 등을 배웠다. 1930년 전주대사습놀이에서 장원을 해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17세에오케·포리돌·빅타레코드사와 계약하고, 〈흥보가〉·〈춘향가〉·〈심청가〉등을 취입하여큰 성공을 거두었다. 창제는 동편제(東便制)이고, 조통달(趙通達)·남해성(南海星)·김수연(金壽蓮)·김정민(金貞民)에게 〈수궁가〉를 가르쳤다. 1955년 박귀희와 함께 한국민속예술학원을 창립해 후진을 양성했고, 1962년 초대 한국국악협회 이사장을 맡았다. 1966년 국립창극단에 입단해 활동했고, 1971년 국악협회 상임고문, 1974년 판소리보존회 이사장을 지냈다. 1976년 독일에서 열린 세계민속음악제에 참가했다. 〈춘향가〉·〈심청가〉에 특히 뛰어났다.

 그리고 옆에는 황산대첩비가 있다.

황산대첩비

고려말 왜구의 침입 때 당대의 명장이며 도순찰사였던 이성계가 왜구를 크게 무찌른 전쟁터이며 벌판이다. 인월면소재지에서 운봉읍 방면으로 24번 국도를 타고 가다 보면 이 황산대첩비를 만날 수 있다. 전촌마을 버스정류장에서 우회전, 남천이라는 실개천을 건너면 양지 바른 곳에 황산대첩비가 모셔져 있다.
고려 우왕 6년 (1386) 9월, 금강 어귀에서 최무선 등의 공격을 받아 퇴로가 막힌 왜구들은 충청도를 거쳐 함양까지 들어갔다가 다시 지리산을 넘어 운봉 인월역에 주둔하면서 광주를 거쳐 도망치려 하였다. 이에 도순찰사로 임명된 이성계가 군대를 거느리고 퇴로를 막은 다음 신궁이었던 그의 활솜씨로 왜구 장군 아지발도의 투구를 쏘아 벗긴 후 이성계의 의동생 이지란이 벗겨진 이마를 향해 즉시 화살을 쏘아죽였다. 10대 1의 중과부적이었지만, 이성계는 날이 저물자 계책을 써서 밤새 달아나는 왜구 패잔병을 섬멸했다. 이듬해 다시 이곳을 방문한 이성계는 자신과 휘하 장수의 이름을 암벽에 새겼으니 이것이 어휘각이다. 2백년 뒤인 선조 10년 (1577)에는 전라도 관찰사 박계현의 상소에 의해 황산대첩을 기념하는 비석이 현재의 자리에 세워졌다. 그러나 지금 어휘각과 대첩비는 그 잔해만이 남아 있다. 패망을 앞둔 일제는 1943년 전국 경찰에 항일의식을 북돋는 반시국적 유물들을 파괴하라는 비밀지령을 내렸고 어휘각은 1945년 1월17일 새벽에 폭파됐다. 대첩비는 글자를 알아보지 못하게 정으로 쪼은 뒤 조각내 버렸다. 깨어진 대첩비는 현재 전각 안에 고이 모셔진 채 역사의 현장을 증언하고 있다.

 황산대첩비가 있는 앞 마당의 멋드러진 숲.

 비각으로 들어서는 정문.

 대첩비각.

 

 일본인들이 부숴버린 비 조각을 모아 놓은 파비각.

 황산대첩비가 있는 곳은 앞으로 람천이 흐르고 뒤로는 언덕이 형성되어 있는 오목한 곳에 자리잡고 있어 누가 봐도 참 좋은 자리에 있구나 하는 생각을 들게 한다. 대첩교를 지나서 둑방길을 따라 지금은 시들어 볼품없는 갈대우거진 둑방을 걷는다. 들판에서는 농사일에 한창인 농부들이 부지런히 움직인다. 개천에서는 원앙이와 키가 큰 이름모를 새가 종종 날아가고 그야말로 평화로운 시골마을의 풍경이다. 그렇게 잠시 걷다보니 사반교에 도착하게 된다. 다리를 건너면 신기마을이다.

 둑방길.

 사반교너머의 신기마을.

신기마을

선조 28년(1595) 임진왜란이 휴전상태에 접어들어 왜적이 잠시 철수하고, 영남이 아직은 안정을 찾지 못하고 혼란스런 때 이곳에 터를 잡은 입향조는 인동 장씨 장덕복(長德福)이었다. 영남의 전란에 고통을 받다가 지리산이 바라보이고 우뚝 솟은 운봉 고원이 마을을 보호하고 만복이 자손대대로 이어지는 명당터인지라 새 삶을 시작하는 터전이란 뜻으로 ‘새터(신기,新基)’라 하였다. 소(牛) 형국인 마을 북쪽 쇠잔등이가 잘려 마을의 쇠한 기운을 막고자 주민들이 직접 토성(土城)을 쌓았다.

 사반교에서는 신기마을을 들어가서 구경할 요량이 아니라면 그냥 다리를 건너지 않고 둑방길을 따라도 된다.

 신기마을을 지나 신기교. 여기에서 우측으로 신기마을로 가는 길이고 곧장가면 백두대간을 하면서 지나치게 되는 매요마을을 가게 된단다.

 남원땅의 산들이 공통적으로 소나무숲이 우거지다는것이다. 수년전에 풍덕봉이던가를 가서 이렇게 우거지 소나무숲이 있나했는데 남원땅 어디 산을 가나 소나무숲이 우거지다. 신기교아래에는 회오라기인지 두루미인지 모를 새와 원앙이가 어울려서 놀고 있다.

 신기교를 지나고 서림공원에 도착한다.

서림공원

비전마을~서림공원으로 이어지는 5km의 제방길은 너른 운봉 들녘을 적시는 젖줄인 람천을 따라 걷는 길로 천연기념물인 수달과 원앙 외에 여러 종류의 동식물을 볼 수 있다.

 서림공원의 비석들. 공덕비인듯한데 별 관심은 없다. 공덕비라는게 과거에 벼슬을 한 사람들의 공덕을 기리자고 만드는것인데 대부분이 훗날에 후손들이 조상의 공덕을 억지로 칭송하는게 많다고 들어서이다.

 할아버지대장군.

 

 할머니대장군.

 운봉읍내에 들어서자 이슬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이런 추세로가면 빗줄기가 굵어질수도 있겠다싶어 안달이난다. 시내를 가로질러 비도 피하면서 요기도 할겸 식당을 찾아들어간다. 금성식당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어 들어가 추어탕을 시켜놓고 다리도 풀고 잠시 휴식을 취한다. 추어탕이 나오는데 반찬이 무려 열 가지나 된다. 혼자 밥을 시켜 먹기엔 너무 과하다싶다. 추어탕 맛을 보니 이거다싶은 진국의 맛은 나지 않는다.

운봉읍

운봉은 1일과 6일로 끝나는 날에 장이 서는데, 주로 운봉과 주천에서 많이 오며 각종 잡화, 곡물, 옷 등이 주로 팔리며 과거에는 목기와 곶감으로 유명하였다. * 지리산북부권역장 : 1,6일 - 운봉장, 2,7일 - 함양장, 3,8일 - 인월장, 4,9일 - 남원장, 5,10일 - 마천장이 서고 각종 장꾼들이 이지역의 장터를 빙빙 돌아다니며 물건을 팔았다.

 운봉읍내 풍경.

  운봉읍 - 옛 양묘장 - 행정마을 - 서어나무숲 - 가장마을 - 질미재 - 덕산저수지 - 노치마을 -회덕마을 - 구룡치 - 솔정자 - 내송마을 - 주천면치안센터.

10:30 운봉읍내에서 이슬비에 잠시 머뭇거리면서 시간을 보내다 날이 훤해지는듯하여 다시 발길을 재촉한다. 운봉시내를 벗어나자마자 있는 양묘장안으로 들어선다. 양묘장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봄에 심을 나무들을 정리하느라고 분주하다. 작은 이름표가 붙은 나무들이 아주 많다. 종류도 다양해서 나무에 상당한 조예가 있어야 알 듯하다. 양묘장을 가로질러 둑방으로 들어서고 다시 개천을 따라 걷는다. 둑방길을 따라 걷다보니 수없이 봐 온 숲이 보인다. 행정마을의 서어나무 숲인갑다.

 지리산댐 반대 프랑카드. 지리산댐을 만들어서 부산사람들의 식수원으로 사용할거란다. 댐을 만들어 이곳 사람들을 윤택하게 한다면 누가 반대하겠는가. 부산사람들의 식수를 위해서 이곳 사람들은 고향을 버리고 다른곳으로 떠나게 되니 반대하지 않나싶다. 얼마되지 않는 보상금을 주고 내몰아버리면 그 사람들은 어디가서 터전을 잡겠는가. 이곳 사람들은 도회지 사람들이 아니고 수 십년 아니 수 십대에 걸쳐서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아 온 사람들인데.

 행정마을 서어나무숲. 나무는 가까이서 보고 숲은 멀리서 봐야 한다.

행정마을에 있는 서어나무 숲은 ‘제1회 아름다운 숲’ 대상을 받은 곳으로, 수백년된 서어나무들이 아름드리 줄지어 서서 마을을 지켜주는 곳이다.

 행정마을의 소나무.도로가에 서 있는 소나무들이 하나같이 명품들이다. 서울에 돈많은 거지들이 탐낼만한데 다행스럽게 잘 버티고 서 있다.

 

 

 

 행정마을을 지나면서 보는 지리산. 아직도 지리산에는 날씨가 흐린듯하다. 구름이 몰려가는게 비라도 한 줄기 뿌리겠다.

 선유정건립비. 가장마을 입구에는 선유정이라는 정자가 서 있는데 지금은 유리문에 모기장까지 둘러쳐져서 현대화되어 있다. 이번 여행에서 겪은 것중의 하나가 남원 마을마다에는 정자가 서 있는데 하나같이 모두 유리문에 모기장까지 둘러쳐져서 사람들이 들어갈수가 없다는것이다. 아무리 주민들을 위한것이라하지만 지나는 나그네도 조금 쉬어가면 얼마나 좋으련만. 유리문으로 둘러쳐진 정자가 볼쌍사나워 사진에 담지 않았다.

가장마을

풍수지리에 의하면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가 화장을 하고 있는 형국이라 하여 가장리(佳粧里)라 불렀다 한다. 지금은 들녘에 농사짓는 움막터를 뜻하는 농막장(庄) 자를 써 가장리(佳庄里)로 쓰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옥녀봉 아래에 옥녀가 베를 짜는 옥녀직금의 천하명당이 있다고 믿고 있다. 300여 년 전 이곳에 처음 들어온 사람은 동복 오(吳)씨와 강릉 유(劉)씨라고 하며 그 후 창녕 조씨와 김씨, 박씨 등이 입주하게 되었다. 마을이 뱀 형국으로 마을 앞에 입석을 세워 뱀의 기를 눌러 마을의 액 막음을 하고 있다.

 가장마을과 무인가판대.

가장마을로 접어들면서 산길로 접어들게 되고 약간의 오르막에 무인가판대가 서 있다. 둘레길이 생기면서 누군가 만들어 놓은듯한데 등구재를 넘어서면서 보던 가판대와는 사뭇 딴판이다. 조금은 장삿속이 보인다고 해야 할까. 가장마을 입구에서 자판기커피를 마시고 지나던 청년과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쉬고 올라오던 참이라 그냥 지나친다. 산길로 접어들라치면 아주 멋지게 다듬어진 동복오씨 선산이 나온다.

 동복오씨 선산. 조상님을 모시는 정성이 지극한 집안인지 이날도 후손이 둘러보며 잡초제거를 하고 있다. 흩어져 있던 문중의 묘지를 이곳에 모아서 모시는것으로 보인다. 자주 찾아보지 못하는 선산을 이리하면 후손들도 서로 볼 기회가 생기면서 관리하는데도 편리하리라본다.

 덕산저수지.

 노치마을.

선산을 옆으로 지나치면서 덕산저수지를 보게 된다. 소나무숲이 이어지는 길이다. 이곳부터는 진달래도 종종 보게 된다. 덕산저수지를 돌아서 들판을 가로지르면 노치마을이 눈에 들어 온다. 노치마을하면 백두대간이 떠오른다. 백두대간길에 마을이 대간중에 있는 곳은 노치마을이 유일하다. 예전에 대간을 하면서 걸었던 기억이 새롭다. 마을뒤로 대간길의 커다란 일품송들이 보인다. 대간기념표지석도 구경하고 노치샘에 가서 시원한 물도 한 바가지 마셔 본다. 노치샘은 항상 물이 넘쳐나나보다. 노치샘 앞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잔치라도 벌이는지 돼지를 잡고 있다. 고기를 다듬고 순대를 만들고 있는 손들이 분주하다.

노치마을

조선초에 경주 정(鄭)씨가 머물러 살고 이어 경주 이(李)씨가 들어와 살게 되어 지금의 마을이 형성되었다. 노치마을은 해발 500m의 고랭지로서 서쪽에는 구룡폭포와 구룡치가 있으며 뒤에는 덕음산이 있고 지리산의 관문이라고 말하는 고리봉과 만복대를 바라보고 있으며 구룡치를 끼고 있다. 마을에서는 마을 이름을 “갈재”라고 부르는데 이는 산줄기의 높은 곳이 갈대로 덮인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현재는 백두대간이 관통하는 마을로 널리 알려져 있다. 노치마을은 고리봉에서 수정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위에 있어, 비가 내려 빗물이 왼쪽으로 흐르면 섬진강이 되고 오른쪽으로 흐르면 낙동강이 되는 마을이다.

 백두대간 기념표지석과 정자와 당산나무. 이곳 정자도 유리문과 모기장으로 둘러쳐져 있는데 아마도 주민관리차원에서 관공서에서 마을마다 모두 만들어주지 않았나싶다.

 노치샘. 해발 550미터이니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실은 어지간한 산꼭데기에 살고 있는셈이다.

 회덕마을 샛집.   

샛집은 억새풀로 이엉을 이어 두텁게 지붕을 올린 집을 말한다. 예전에는 샛집이 부잣집이었고, 초가집은 가난한 집이었다. 고원지대인 운봉에는 폭설이 자주 내리니 용마루를 높이고 지붕을 경사지게(물매) 만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임진왜란 당시 숨어든 왜군 패잔병들이 처음 샛집을 짓고 살았다고 하는데, 그래서인 일본의 전통 가옥(합장집) 같은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사무락다무락. 고갯길을 오르던중에 아들, 딸과 함께 하는 일가족을 만났다. 보기에 참 좋다.

길을 걷다보면 돌들로 답을 쌓아놓은 ‘사무락다무락’을 만난다. 사무락다무락은 사망(事望)다무락(담벼락의 남원말)이 운율에 맞춰 변천된 것으로 보이는데, 길을 지나는 사람들이 무사함을 빌고 액운을 막아 화를 없애고자 지날 때 마다 돌을 쌓아 올렸다고 한다.

 사무락다무락 고갯길.

 사무락다무락 고갯길 아래의 웅덩이. 이 정도라면 과거에 이 고갯길을 넘나들던 사람들의 목을 축였을법하다.

 장흥고씨묘동. 九龍弄珠    前後九龍弄眞珠    來往貴客疏眞珠... 장흥고씨 묘역인가본데 무슨 내용인지는 궁금하다. 

 진달래 색이 곱디곱다.

  구룡치 고갯길.

 수 백의 산을 다니면서 많은 숲길을 걸어보았지만 오늘 이 길만큼 제대로 된 소나무숲길을 보지 못했다. 회덕마을에서 내송마을까지 이어지는 십 여리 길이 이리도 소나무숲이 우거지고 청정하단말인가. 잡목 하나 없이 아름드리 소나무부터 손목만한 나무까지 모여 소나무향이 그윽하다. 내 글로는 표현하기 어렵더라.

 

돌다리를 건너 산길로 접어들면 거기서부터 주천면 안솔치마을까지 주욱 이어지는 환상적인 소나무 숲길이 나온다. (사)숲길에서 새 개통구간 중 가장 자랑하고픈 곳이라고 힘주어 말하는 이유를 금방 알 수 있었다. 내심 구룡폭포에서 구룡계곡을 따라 육모정으로 내려가는 멋진 길을 두고 왜 이 산길을 고집했을까 의아하기도 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내 동의하고 말았다.

 솔정자를 지나 오르락내리락 이어지는 소나무 숲길은 끝끝내 감추어두고픈 길이었다. 솔잎 갈비가 푹신한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이내 보랏빛 붓꽃 군락지 등 온갖 야생화들이 피어 있고, 꾀꼬리 울고 춘정을 못 이기는 수꿩들이 “꿔엉 꿩” 제 이름을 부르며 푸드득 날아올랐다.  

 

문득 상사폭포 위에서 만났던 초식동물처럼 눈빛이 맑은 그 사내가 생각났다. 그리고 안솔치마을로 내려가는 길에 육모정의 춘향이 가묘 쪽에서 검은등뻐꾸기가 울었다. 어찌 들으면 ‘홀딱 벗~고 홀딱 벗~고’ 나를 놀리는 듯했고, 또 어찌 들으면 지나는 길손에 따라 ‘쪽박 차~고 쪽박 차~고’ ‘빡빡 깍~어 빡빡 깎~어’ ‘술값 갚~어 술값 갚~어’ ‘너 똑똑~해 너 똑똑~해’ 마치 다 안다는 듯 울고 있었다. (시인 이원규님의 글)

 구룡치. 구룡치를 반대편 내송마을에서 올라오기는 엄청 힘들겠다.

구룡치는 주천면의 여러 마을과 멀리 달궁마을에서 남원 장을 가기 위해 지나야 하는 길목이었다. 달궁마을 주민들은 거리가 멀어 남원 장에 가려면 2박 3일에 걸쳐 다녀와야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구룡치를 장길로 이용하는 마을 주민들은 해마다 백중 (음력 7월 15일) 이 지나고 마을별로 구간을 나누어서 길을 보수해서 이용해 왔는데 지금도 예전의 보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있다.

 구룡치의 진달래.

구룡치를 내려서는 길은 급경사에 좁은 길로 반대편에서 오는 사람들은 모두가 한숨짓는다. 구룡치의 멋진 풍광과 소나무숲을 보기 전이니 그러리라. 엇갈리는 사람들과 인사를 하면서 마구 내려서니 내송마을에 도착하게 되고 아스팔트 도로를 더 걷다가 주천면 소재지에 들어선다. 주천면치안센터가 보이는 곳에 둘레길 표지판이 있고 냉면집이 보인다. 길을 건너는 분에게 남원행 버스를 물으니 자기를 따라오란다. 그러면서 자기차에 타고 가면된다고 친절하게 대한다. 난 냉면집에 가서 냉면을 먹고 나서 서울로 올라갈 요량이었는데 자긴 냉면을 먹고 나오면서 나를 데리고 가니 뭐라 말도 못하고 얼씨구나하고 따라서 남원시내로 왔다. 시골 인심이 아직도 살아 구나 하는 생각이다 일부이지만.

 

솔정자

솔정자는 20여년 전만 해도 나무하러 지게를 지고 가다가 고개를 오르기 전에 땀을 식히고 주천 들녘과 멀리 숙성치와 밤재를 바라보던 아름드리 소나무가 있던 곳이다. 전설에 따르면 정유재란 당시 숙성치를 넘어 남원성을 향하는 왜군을 향해 조경남 장군이 활시위를 당겼던 곳이라고도 한다. (솔정자를 마을 분들은 ‘솔정지’라고 한다.)

 

내송마을

지금으로부터 약 600여 년 전 한양 조(趙)씨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하여 그 후로 경주 김(金)씨, 서산 류(柳)씨 등 여러 성씨들이 차례로 들어와 30여 호 마을을 이루면서 주위의 비옥한 농토와 산림을 토대로 부유한 마을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임진왜란 때에는 이곳 출신 조경남(趙慶南) 장군이 의병을 일으켜 많은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