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둘레길(완)

지리산 둘레길 1 (인월면소재지에서 함양 금계마을까지)

돗가비 2009. 11. 17. 14:40

091114. 맑음(쌀쌀한 날씨). 여행은 혼자 다니는 맛이 감칠맛난다. 인월에서 금계구간(19KM).

 

전라북도 남원시 인월면 인월리와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의탄리를 잇는 19km의 지리산길. 시범구간은 지리산북부의 전북 남원과 경남 함양을 잇는 옛 고갯길 등구재를 중심으로 지리산 주능선을 조망하고, 넓게 펼쳐진 다랑논과 6개의 산촌 마을을 지나 엄천강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구간별 주요 지명 : 인월면 - 중군마을 - 수성대 - 배너미재 - 장항마을 - 장항교 - 삼신암 삼거리 - 등구재 - 창원마을 - 금계마을의 제방길, 농로, 차도, 임도, 숲길 등이 전 구간에 골고루 섞여 있다. 또한 제방, 마을, 산과 계곡을 고루 즐길 수 있으며 2008년 기개통 구간이 포함되어 있어 이미 널리 알려진 구간이다.


인월마을:지리산길의 출발지는 안내센터가 있는 구인월마을이다. 인월마을의 유래는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 23대 우왕 6년(1380년) 삼도순찰사 이성계 장군이 이끄는 토벌군이 인월에 본거지를 둔 왜장 아지발도와 황산 대전투를 벌였다.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날이 어두워지자 적의 행동을 탐지하기 위해 이성계 장군이 하늘에 달 뜨기를 기원하니, 동쪽 하늘에 밝은 달이 휘영청 떠올라 적장 아지발도의 목을 쏘아 대승을 거뒀다고 전한다. 이 황산대첩에서 달을 끌어당겨 뜨게 했다는 유래로 마을 이름이 끌 인(引)자와 달 월(月)자를 써서 인월이 됐다고 한다. 또 인월역이 위치해 역말로 불리다가 그 후 마을이 분리됨에 따라 구인월로 정착했다. 

 

시골에서 30여년을 살다 서울살이를 하는 나로서는 시골길이란게 새삼스러울건 없는 노릇이다. 한민족 특유의 떼거리문화에 언제부터인지 젖어들어서일까 나도 모르게 남들이 하는건 해보고 싶어진다. 나이 50이 들어 주책없는 노릇이기는 하지만 사는게 다 그런거 아니겠는가. 남들이 모두 백두대간을 간다면 나도 따라 나서고 제주도 올레길이 생겼다하니 나도 없는 살림에 비행기를 타보기도 했는데 버스타고 가는 지리산인들 가지 못할소냐고...

아무튼 우리나라 사람들의 몰려다니는 떼거리문화는 알아줘야 한다. 이게 국력을 신장시키는 원천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우르르 몰려다니면서 남에게 폐가 되는 경우도 수없이 많다. 인터넷에서 된장녀이니 미녀들의 수다의 루저녀니 하면서 상대방의 인신공격을 일삼는 도구로 활용되기도 한다. 월드컵 응원전처럼 긍정적 측면에서만 일어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생각해본다. 등산이 좋다하면 전국민의 절반은 휴일에 산으로 올라간다. 서해 앞 바다에 유조선이 터졌다하면 전부다 서해로 몰려간다. 좋은일이건 나쁜일이건 따지지 않고 우선 달려가고 본다. 등산 붐이 일더니만 북악산에서 자전거가 좋다하고 메아리 한 번 울려퍼지니 이젠 너도나도 자전거를 사재기한다.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자전거를 사서 타고 다닌다. 난 자전거가 어려서 타던 등교용 자전거쯤으로 생각하고 살았는데 지금 자전거 탄다하는 사람들은 수 백에서 천만원대 자전거는 타야 그래도 자전거를 탄다고 동호회에 나서는 형편인가보다. 참 속이 씀쓰름하다. 산에가면 셔츠 하나에 수 십만원짜리 입어야 등산객 취급을 해주고 자전거를 타면 수 백은 넘겨야 자전거 대접을 받는다 하니 세상이 우습게 돌아간다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각설하고 나도 덩달아서 남원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게을러터져서 맨날 마누라한테 이쁨도 받지 못하는 주제에 새벽 5시에 일어나서 행장을 꾸려 나서니 마누라가 마중도 안하고 누워 있더라. 호남선 터미널에서 6시발 남원행 버스를 타고 간다. 정안휴게소에서 내려 화장실을 가는데 누가 날 부른다. 같이 버스를 타고 오던 앞 자리의 노인분이시다. 지리산을 가느냐면서 자기도 지리산을 간다면서 동행을 하자고 한다. 이런 추운 날씨에 지리산을 혼자 간다고 나서는 노인분의 용기가 부럽다. 난 지리산을 올라가진 않고 둘레길만 간다고 하면서 대화는 끊어지고 볼일을 보고 다시 버스에 탑승하니 내 옆자리에 앉으면서 얘기나 하면서 가잔다. 보통 사람들의 대부분이 그렇듯 나도 여행길에서 나이드신 노인분이 옆자리에 앉으면 기분이 별로 좋지는 않다. 젊은 아리따운 아가씨가 앉으면 아주 기분이 좋을것이며 그렇진 않더라도 아직은 젊어보이는 아줌마라도 앉아주면 기분이 나쁘진않은게 남자 아니겠는가.

하지만 난 그날 옆자리에 일행만큼은 너무 부러웠다. 그 노인분은 자기가 84살이란다. 그 나이라면 걸어다니기도 힘들어야 할 나이인데 세상에 지리산을 혼자서 종주할거란다. 그것도 대피소에서 잠을 자는것도 아니고 텐트에 침낭을 메고 가서 비박하면서 사흘간을 보낼거란다. 배낭을 보니 크기도 엄청나다. 2인용텐트에 무거운 미군침낭을 사용한다고 하니 먹을 식량까지 계산하면 배낭무게도 엄청날것이다. 비박을 위해서 대비한 비닐과 잡다한 내용물까지 가득 담은 배낭을 난 보기만 해도 어깨가 축쳐진다. 이게 말이나 될법한 얘기인가? 나는 나이를 속이겠지 하고 외모 여기저기를 흩어봐도 나이가 만만치는 않아보인다. 속인다고 해도 한 두 살이지 그이상은 아닐듯싶다. 84살 먹은 지금도 매일 일어나서 4백미터 운동장 열바퀴를 돌고 팔굽혀펴기 50회를 한다고 자랑이다. 지리산을 다니기 위해서 매주 북한산을 3회이상은 오른다고 한다. 지리산과 설악산을 주로 다니는데 능선과 골짜기를 샅샅이 알고 있다. 비지정등산로는 단속이 심해졌다고 말해주니 설마 이렇게 나이든 노인네 단속이야 하겠냐며 걱정말란다. 그러면서 산에 다니면서 겪었던 에피소드를 여러가지 들려준다. 난 내가 지금까지 산에 다닌다면서 겪었던 일과 말들이 정말 그분의 경험에 의하면 불쏘시개도 되지 못할 하찮은 사연들이었다는걸 알게 되었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보니 어느덧 남원에 도착하여 그분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인월로 이동을 하였다.

 

 10:15 인월 구인월교에서 걷기 시작. 가을이라고 해야 할지 겨울이라고 해야 맞을지 모를 날씨에 바람은 세게 분다. 구인월교를 넘어서면서 둑방을 따라 걷자니 바람이 차가운게 느껴진다. 둑방길은 멀리까지 이어지는데 내가 살던 고향의 개천길과 다를게 없다. 냇가에는 갈대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고 원앙이도 한 쌍 보인다. 그리고 오리 몇 마리도 같이 어울려 놀고 있다. 내가 어려서 놀던 하천은 갯벌이었는데 이곳은 맑은 물이 흐르고 바위가 몇 개 있다는게 다른 풍경이다. 그렇게 시간개념없이 둑방을 걷다보니 월평마을 너른 들판을 애둘러서 지나게 된다. 그러면서 중군마을에 들어서게 된다. 중군마을 가운데를 지나면서 담벼락을 따라 걷다보니 한쪽으로 강이 흐르고 옆으로는 도로가 있어 차들이 쌩쌩 달린다. 빠름과 느림의 감각을 느껴보게 된다. 중군마을을 지나면서 산길로 접어든다.

 

 둘레길의 이정표

 둘레길 내내 감나무들을 보며 걷게 된다

중군마을 표지석  

 중군마을:임진왜란 때 전군, 중군, 후군 중에 중군이 머물렀다고 해서 마을 이름이 중군리 또는 중군동이라 붙여졌다고 한다. 본업인 농사 외에도 잣과 송이 채취로 부수입을 올리고 있다. 이곳의 잣은 중부지방의 가평잣 외에 남부 지방에서 가장 유명하다고 한다.


중군마을을 끝나면서 숲길로 접어든다. 초입에 황매암과 삼신암으로 갈리는 삼거리에 도착한다. 두 갈래길은 잠시후에 만나게 되는데 황매암은 산속으로 들어서 숲속을 걷게 되고 삼신암은 임도를 따라 너른 길을 걷나보다. 황매암으로 방향을 잡고 잠시 오르막을 올라서면 자그마한 암자가 있다. 황매암 식수는 맑고 맛이 있다. 이 길은 옛날에 장항마을 사람들이 인월에 장을 보러 다니던 지름길이다. 주변엔 잣나무가 많이 있다. 주 소득원중에 하나는 잣이었을것이다. 이 산속길을 머리에 이고 지게에 지고 넘나들면서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살아왔을것이다. 내 어렸을적에 소달구지에 짐을 싣고 아버지를 따라 5일장을 20여리 길을 걷자면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그래도 장터에 가면 팥죽도 먹을수 있었고 엿이며 과자를 사주어서 좋았었는데 잠시 그시절이 생각난다. 황매암 구경을 하고 한 구비 돌아가면 수성대이다. 난 이름으로만 듣고는 수성대가 무슨 정자같은 건물이름인줄 알았는데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이었다. 수성대에는 과거엔 절이 있었다는 주민의 말인데 지금은 아무것도 없는 계곡이다. 주민 한 분이 막걸리를 팔고 있어 한 잔 사서 마셨다. 술을 좋아하거나 목이 말라서라기 보단 나그네가 걷는 길에 주막을 차려 놓고 손을 기다리는데 구색은 맞춰져야 하지 않겠는가. 지역을 찾아와서 쓰레기를 버리고 농작물을 걷어가고 피해를 준다면 오지 않는이만 못하리라. 시골에 계시는 분들을 생각해서라도 막걸리 한 잔이라도 아니 껌 한 통이라도 사주어야 옳다고 본다. 내가 가끔 산에 갈때 이용하는 몽블랑산악회 회장님의 지론이기도 하기에 그분에게서 나도 배웠다. 산에 다니면서 민폐만 주지말고 그 지역에 밥이라도 한 그릇 먹어줘야 보답을 하는거라고 하면서 그 산악회는 꼭 산아래 식당에서 밥을 사 먹어준다. 추운 날씨에 막걸리가 들어가니 요동을 친다. 큰 대접에 가득 담아주니 한여름이라면 몰라도 단번에 먹기에도 벅차다. 장사꾼다운 거래가 아니라 농사꾼다운 모습이다. 돈 계산도 서툰모습이다. 산길은 좁고 길다랗다. 얼마전까지만해도 사람구경하기 힘든 그런 산속이었을것이다. 오가는 사람없이 잣나무를 노리는 다람쥐랑 동물들의 낙원이었을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여기도 사람천지다. 길따라 이어지는 사람들의 행렬속에 들고양이만이 먹을것을 찾아 돌아다니고 있다. 사람이 버린 음식쓰레기를 찾느라 저리 바쁠것이다. 수성대를 지나고 임도에 다다른다. 여기에선 약초즙을 파는 사람이 있다. 여기서도 무슨 약즙을 한 봉 사서 마셔봤다. 입맛이 쓰다. 그래도 약초향이 한동안 오래간다. 다시 걷다 보면 멀리 도로와 강이 보이고 내려서면서 장항마을에 도착하게 된다.

 

 수숫대

 황매암

 

 황매암 약수

 황매암 석탑

 황매암 지나고 수성대로 가는 오솔길

 

 

 

 수성대에서 막걸리를 파시는 모자 쓴 아저씨 

 

 

 장항마을 당산나무

장항마을 고목

장항마을: 마을 뒤 덕두산에 많은 사찰이 있었는데 1600년 경 수양하러 왔던 장성 이(李)씨가 처음 정착하여 개척을 하였다. 이후 각 성씨가 들어와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는데, 산세의 지형이 노루의 목과 같은 형국이라 하여 노루 장(障)자를 써 '장항'이라 했다. 중군마을에서 배너미재를 넘어 도착하는 장항마을은 수려한 풍모의 소나무 당산이 웅장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장항마을에서는 지금도 매년 신성하게 당산제를 지낼 만큼, 전통이 살아 숨 쉬는 마을이다.

장항마을에서 만나는 당산 소나무는 지금도 당산제를 지내고 있는 신성한 장소로 천왕봉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자태를 드리우고 있어 감탄을 자아내기 충분하다.


장항마을로 내려서는 주변엔 고사리밭이 많이 있다. 밭두룩엔 고사리를 꺽어가지 말라는 친절한 안내글도 물론 자리잡고 있다. 이게 현실이다. 지리산길은 그래서 시작한지가 오래되었건만 둘레를 돌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맴돌고만 있는것이다. 제발 남에게 피해를 주는 여행이나 산행일랑 하지말고 그럴거면 집에서 나서지 말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장항마을 내려서는 길엔 마을의 당산나무가 멋진 자태를 하고 늠름하게 서 있다. 항우장사보다도 더 힘차게 그리고 운장관우의 수염보다 더 멋진 가지를 늘어뜨리고 정말 정말 멋드러지게 서 있다. 백두대간 길의 수정봉 오르기전의 가재마을이던가의 다섯그루 소나무가 푸르름을 자랑하면서 멋지게 서 있는데 이건 한 그루 가지고도 다섯그루를 당해낼만 하다. 그런데 장항마을에서 멋지게 보인다는 지리산 천왕봉과 봉우리들은 흉물스런 일성콘도건물이 가로막고 있다. 시골구석에 저리 커다란 콘도 건물이 들어서야 할 이유를 도대체가 모르겠다. 하얀 건물이 상대적인 시각으로는 63빌딩보다 더 커 보인다. 건축물도 주변 자연경관에 맞게 들어섰으면 하는 바램을 해본다. 장항마을 쉼터를 지나면서 농로를 따라 걸어 인월과 마천간 도로에 도착하게 된다.

도로를 가로 질러 농로길로 접어든다. 이곳에선 도로를 따라 가다 나오는 매동마을을 거쳐 갈수도 있나보다. 내가 걷는 도중에는 마을이 나오지 않는데 조금 걷다보니 한 무리의 사람들이 올라오는데 매동마을에서 온다고 한다. 매동마을 지나면서는 푸른 소나무 숲길이 끝없이 이어지는 아주 맘에 드는 산책로이다.

 

 매동마을 : 고려 말과 조선 초, 중기에 걸쳐 네 개의 성씨(서, 김, 박, 오) 일가들이 들어와 일군 씨족마을이다. 마을 형국이 매화꽃을 닮은 명당이라서 매동(梅洞)이란 이름을 갖게 된 이 마을은, 각 성씨의 오래된 가문과 가력을 말해주듯 네 개의 재각과 각 문중 소유의 울창한 송림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다. 마을 앞을 흐르는 만수천변에는 조선 후기 공조참판을 지낸 매천(梅川) 박치기가 심신을 단련하기 위해 지은 퇴수정(退修亭)과 그 후손이 지은 밀양박씨 시제를 모시는 관선재(觀善齋)가 있는데, 우거진 소나무들을 뒤로 두르고 앞으로는 만수천이 흐르며 발밑에는 흰 너럭바위들이 어우러져 뛰어난 풍광을 자랑하고 있다. 박치기의 생존 당대에는 정기적으로 일년에 한 번씩 시인묵객들이 이 정자 밑 너럭바위, 세진대(洗塵臺)에 모여 풍유를 즐겼다고 하는데, 그 숫자가 족히 일백 명에 달했다고 한다. 불과 삼사십 년 전만해도 저녁이면 마을 사람들이 모두 이곳에 모여 맑은 물 위에 달이 떴다 지도록 놀았다고 한다. 지금은 시대가 바뀌어 산내면의 대표적인 생태농촌 시범마을로 지정돼 전통과 개발이라는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고 있는 마을이다.

 

  매동마을 뒷산의 숲속에서 간단하게 김밥을 먹으면서 처음으로 다리를 풀어본다. 다시 배낭을 매고 출발하려는데 바람은 더욱 거세지고 빗방울까지 보이기 시작한다. 해질무렵이라면 포기하고 매동마을로 내려서면 좋으련만 아직도 해는 중천에 있으니 여기서 중도포기할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냥 숲속으로 들어간다. 숲길은 걷기에 너무 좋은 길로 만들어져 있다. (현신규 박사라는 분이 육종 개발한 한국의 대표적 수종 리기다 소나무라 한다. 월간 산에서 퍼옴)

아마도 화전민이나 살았을법한 집터도 보인다. 다시 숲을 나오면 논이 보이는데 지금은 공사가 한창이다. 하는 낌새를 봐서는 아마도 민박촌이나 팬션이 들어설 모양이다. 전국토를 공사판으로 만드는 사람들이 싫어진다. 전답을 가로지르면서 집이 드문드문 보이는 동네에 도착하는데 중기마을인가보다. 숲속에는 강병규라는 분의 사진전시관을 알려주는 표지판이 서 있는데 날씨도 예측불가능이고 바람이 거세게 불어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매동마을 소나무 숲길의 오솔길

 

 

 

 

 

중기마을 :  사방이 병풍을 둘러놓은 듯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한가운데 마을이 있다고 해서 가운데 중(中)자와 터 기(基)자를 써서 중기로 불렀다 한다. 다른 한편으로 마을 터가 중앙의 길지라 해서 중기라 했다는 설도 있다. 마을이 번창하고 세대수가 늘어나 상중기와 하중기, 2개 마을로 나눴다. 지금도 산내면에서 귀농가구가 가장 많이 들어와 사는 곳이다.

중기마을은 햇빛이 가장 잘 드는 곳에 자리 잡아 사계절 내내 다른 마을보다 훨씬 따뜻하다고 한다. 날이 맑을 땐 천왕봉과 반야봉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지역이다.

 

중기마을을 지나면서 상황소류지쉼터를 지나고 본격적인 다랑이논이 시작된다. 상황마을 다랑이논이다. 마을 위치에 따라 상황마을, 중황마을, 하황마을이라 불리는가 보다. 처음 하황마을로 가는 길에서 중황마을로 올라서다 상황마을로 올라서면 저 아래 다랑이논들과 마을 그리고 지리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다랑이논을 따라 이어진 농로를 따라 발품팔아 올라가다 보면 등구재에 다다른다.  남원 산내와 함양 마천을 이어주는 고갯길인 등구재는 옛 길의 정서를 지금도 간직하고 있었다. 이 고갯길을 넘나들던 과거의 많은 사람들의 삶은 얼마나 고달펐을까? 조상들의 피와 땀이 흠뻑 물든 다랑이논이 처량할 정도로 애처롭다.

 

다랑이논은 산골짜기의 비탈진 곳에 층층으로 자리 잡은 좁고 긴 논이란 뜻이다. 다랑논, 다랭이논, 논다랑이, 다락배미 등 부르는 이름도 다양하다. 비탈진 층층의 논을 개간하기 위해 얼마나 공과 시간을 들였으며, 얼마나 많은 정성을 쏟았겠나. 어떤 다랑논은 삿갓만큼이나 작아서 ‘삿갓배미’라 부르기도 한다. 다랑논이 많았던 시절 전해오는 이야기 한 토막. 농부가 논을 갈고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아무리 세어 봐도 논이 하나 부족했다. 결국은 포기하고 삿갓을 들었더니 그 밑에 논 한 배미가 있더란다. 그렇게 작은 땅에도 농사를 지을 만큼 옛 사람들의 삶은 부지런했지만 궁핍하기도 했다.

 

 

 

 

 

 

 걷다 보면 이런 간이 쉼터가 많다. 토산품을 파는 할머니들도 많아 팔아주면 좋으련만 무게를 생각해서 포기하게 된다.

 등구재 올라가는 길의 토종벌통들

등구재를 올라서면 시원스레 뻗은 낙엽송들이 많이 있다. 등구재는 고갯길이 거북이 등을 닮았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이 고개는 과거에 인월장을 오가기 위해 넘나들던 길이었다. 농부는 지게에 짐을 지고 넘었을것이고 시집가는 색시는 꽃가마를 타고 넘었을것이다. 하지만 위치상으로 창원마을 사람들이나 넘었을듯한게 바로 옆으로 강을 따라 금계마을로 지나면 편하게 지나지 않았을까 싶다. 고개를 넘어서자마자 작은 연못이 나타난다. 물은 시꺼멓게 탁하며 지저분하게 방치되어 있다. 전에는 논에 물을 대기 위해 물을 갇어두는 구실을 했다고 한다. 지금도 수문을 열기 위한 기다란 쇠막대가 놓여 있다. 산을 벗어나면서 무인판매대가 있다. 몇 가지 음료수와 커피를 놓아두었다. 먹고 돈은 직접 통에 넣으면된다. 사람들이 신기해서 구경을 하면서도 사먹는 사람은 없다. 사람들이 보지 않으면 사먹으려나 모르겠다. 다랑이논을 따라가면 창원마을에 도착하게 된다. 마을 첫 집에 아저씨가 인사를 한다. 지금은 별로 볼게 없지만 시기를 잘 맞춰오면 보기가 좋은 마을이라고 자랑이다. 마을 앞에 있는 천 미터가 넘는다는 삼봉산에 눈이 내린 날에 봉우리에 햇살이 들면 그리 멋지다고 하신다. 그리고 등구재에서 능선을 따라 가는 산봉우리에서 보는 지리산 능선과 천왕봉은 정말 일품이란다. 천왕봉이 가장 잘 보이는 곳이기도 하다면서 다음에 다시 한번 더 오라면서 감을 하나 주신다.

 

 등구재의 낙엽송

 

 

 등구재 넘어서면서 나오는 작은 연못

 

 무인판매대

 

 

 

 

 

 

  창원마을 : 넉넉한 곳간 마을. 창원. 조선시대 마천면내의 각종 세로 거둔 물품들을 보관한 창고가 있었다는 유래에서 ‘창말(창고 마을)’이었다가 이웃 원정마을과 합쳐져 현재 창원이 되었다. 창고마을이었던 유래처럼 현재도 경제적 자립도가 높은 농산촌마을이다. 다랑이 논과 장작 담, 마을 골목, 집집마다 호두나무와 감나무가 줄지어 있고 아직도 닥종이 뜨는 집이 있다. 함양으로 가는 오도재 길목마을로 마을 어귀 당산에는 300여 년 수령의 너덧 그루의 느티나무와 참나무가 둥그렇고 널찍한 당산 터를 이루어 재 넘어가는 길손들의 안녕을 빌고 쉼터를 제공하는 풍요롭고 넉넉한 농심의 지리산촌마을이다.

 창원마을은 노무현대통령께서 퇴임후에 들렀던 마을이다. 창원마을에서 금계마을까지 걸었다고 한다.

  (((그날. 당신은 지리산길 벽송사 송대 구간의 아픈 이야기를 전하자, 이렇게 얘기하셨죠.
길을 걷다, 뼈아픈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되면..\'전율하지요\'라고.
창원 마을 어귀에서 저 멀리 지리산 동북 능선을 바라보는 당신의 주름진 옆 모습이 생생합니다. 다시 오셔서 못다 걸은 길을 걸으마 하셨는데, 이렇게 가실 줄이야.
안녕히 가십시오.
명복을 빕니다. 이 글은 지리산길홈페이지에 다신 반달곰님의 댓글입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농로를 따라 내려오니 여기도 공사판이 벌어져 있다. 여긴 무슨 자연학습장인지를 짓는다고 야단들이다. 왜들 짓고 부수고를 해야 먹고산다고들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사람들은 콘크리트 다리 하나가 없어도 4차선 도로가 아니어도 걸어다니는데 조금은 불편할지몰라도 살아가는데 고통을 느끼지는 않는다. 오히려 큰 도로와 다리가 사람들을 서울로 서울로 불러모으고 있는지도 모를일이다. 전국민의 절반이 수도권에서 바글거리면 살아간다는게 말이나 될법인가. 세상 어느 나라에 이런 인구 집중이 이루어 지고 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지금도 사람과 돈은 서울로만 몰려들고 있으니 이런 시골에는 나이든 노인들만 살아가고 있는것아니겠는가. 조금은 불편해도 고향을 지키며 살아갈수 있는 방도를 찾아줘야 하는게 나랏님이 할 일이 아닌가싶다. 자기들 돈 들인다면 저리 허물고 야단칠수 있을까? 창원마을로 내려섰다가 다시 산속으로 접어들면서 금계마을로 향한다. 지금부터는 조금 피곤하다. 바람이 너무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어놓았다. 비는 그쳣지만 바람은 거세다. 많은 사람들이 가다 서다하며 숲속에서 쉬어 간다. 산행을 많이 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오는 트레킹이라서 그런지 다들 힘들어 하는 모습이다. 지금은 지리산둘레길도 사람들로 북적인다. 금계마을 뒷산에 올라서면 아래로 엄천강이 보이고 건너에 추성마을과 의탄교가 보인다. 추성마을은 칠선계곡을 가는 길목의 마을이다.

16:00 금계마을에 도착. 마을길을 따라 내려서면서 오늘의 종점인 금계마을 버스 정류소에 도착한다. 정류소옆 폐교된 학교 운동장에는 관광버스가 여러 대 서 있다.

 

금계마을 : 금계(金鷄)마을로 개명되기 전 마을 이름은 ‘노디목’이었다. 노디는 징검다리라는 이 지방 사투리로 칠선계곡에 있는 마을(추성, 의중, 의탄, 의평)사람들이 엄천강 징검다리(노디)를 건너는 물목마을이라 부른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산촌사람들의 정을 징검징검 날랐을 노디가 세월에 씻겨 나가고 지금은 그 위에 의탄교가 들어서 있다.

 

금계마을의 폐가

16:20분 함양에서 인월을 오가는 버스를 타고 인월로 왔다. 인월에서 모텔을 잡아 놓고 저녁을 먹었다. 지리산흑돼지를 파는 집인데 고기가 정말 맛있다. 사장님이 직접 돼지농장을 하시면서 고기를 조달한다고 한다. 조금 아쉽다면 여기도 시골의 식당들처럼 조금 친절도가 낮다는것과 정갈하지 못하다는것이다. 반찬에서 머리카락이 나온다면 고기가 맛있어도 점수가 깍이는것이다. 잠을 잔 모텔은 넓직하고 깨끗하면서 조용하니 맘에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인월장터 근처의 식당에 들어가 아침으로 청국장을 시켜 먹고 오늘 코스를 걷기 위해 구인월교로 갔다. 오늘 날씨는 어제보다 더 하다. 진눈깨비가 내리고 바람이 세차게 부는게 여간아니다. 혼자 재미없이 걷기에는 별로 기분이 내키지 않아 냅다 걷기를 포기해버리고 인월터미널로 오니 서울행 버스가 곧바로 없어 남원으로 군내버스를 타고 이동하여 남원에서 서울로 버스를 타고 집에 왔다.

하루 일정을 포기하고 왔지만 후회스럽지는 않다. 요즘 한창 유행하는 신종플루라는것도 무섭고 감기라도 걸리면 신종플루로 오인받아서 격리치료 받아야 할 형편이기에 우선은 포기했다. 그리고 지리산 둘레길이라는게 내가 태어나서 살고 자라던 고향의 마을길과 별반 다를게 없어서다. 앞으로도 남은 구간을 계속해야 할지 여기서 포기해야 할지는 두고볼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