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한시대(馬韓時代)의 영광(靈光)
기원전 3세기전에 쓴 「위지(魏志)」가 우리나라에 관한 기록으로서는 최고의 책이다. 그 문헌의 동이전한전조(東夷傳韓傳條)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 한재대방지남 동서이해위한 남여왜방가사천리 유삼종 일일마한 이일진한 삼일변한진한자 고지진국야"
" (韓在帶方之南 東西以海爲限 南與倭方可四千里 有三種 一日馬韓 二日辰韓 三日弁韓辰韓者 古之辰國也)"
이는 한(韓)이라는 나라는 대방(帶方)의 남(南)쪽에 있는데 동과 서는 바다이며 남쪽은 왜국(倭國)과 접하고 있다. 모서리가 사천리(四千里)나 되는 이 땅에는 세나라가 있는데 그 하나는 마한(馬韓)이오 그 둘은 진한(辰韓)이오 그 셋은 변한(弁韓)이라고 한다. 이들은 모두 옛 진나라의 땅이라는 말이다.
또한 동이전(東夷傳)이라는 후한서(後漢書) 가운데 전한조(傳韓條)에 나타나는 「개고지진국(皆古之辰國)」이라는 대목으로 보아 삼한(三韓)은 모두 진국(辰國)의 후신(後身)인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진(辰)이라는 나라가 어떻게 해체되었으며 삼한(三韓)은 어떻게 성립되었는지는 불분명(不分明)하다. 여하간 진국(辰國)의 북방에 위치하였던 위씨조선(衛氏朝鮮)이 한무제(漢武帝)에게 BC108년에 멸망 당하자 그곳에 한사군(漢四郡)이 설치되어 중원문화(中原文化)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 중에서도 대방(帶方)과 국경을 접하고 있던 마한(馬韓)은 중원(中原)의 거대한 정치세력과 선진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었다. 또한 마한(馬韓)은 한강유역으로부터 충청(忠淸), 전라(全羅)의 서도(西道)에 뻗쳐 영토가 가장 광활하였기 때문에 목지(目支), 백제(百濟) 등 54개(個)의 소국(小國)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그들 小國은 부족연합체(部族聯合體)였다. 그중에서도 목지국(目支國)은 옛날 진국(辰國)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삼한시대(三韓時代)에 이르러 그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이때 이 고장은 마한(馬韓) 54개(個) 소국중(小國中) 막노국(莫盧國)에 속하였는데 그 정확한 한계나 중심지 등에 관하여는 기록이 전무하니 알길이 없다. 단지 이웃 장성지방(長城地方)은 구사도단국(臼斯島旦國) 고창지방(高敞地方)에는 모노비이국(牟蘆卑離國) 나주지방(羅州地方)에는 불미(不彌)라고하는 소국(小國)이 있었다는 사실은 기록에 의해 분명히 알 수가 있다.
마한시대(馬韓時代)의 생활상(生活相)
삼한시대(三韓時代)의 유일한 기본사료인 위지(魏志)가 일종의 풍토기(風土記)요 단순한 견문기(見聞記)에 불과하므로 국가의 정확한 생멸년대(生滅年代)마저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중국의 역사에 기준하여 본다면 한(漢)나라가 우리 반도(半島)의 북방(北方)에 있던 위씨조선(衛氏朝鮮)을 수륙(水陸)으로 내침(來侵)한 것이 BC109年이요 그후 사군(四郡)이 설치된 것이 BC108年이니 지금으로부터 약(約) 2100年前의 사실이다.
이때는 시대구분상(時代區分上)으로도 이미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를 지나 철기시대(鐵器時代)에 접어들었으나 아직도 일부(一部)에서는 금석(金石)을 병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부족공동체(部族共同體)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고 제정(祭政)만 분리된 단계에 머물렀다.
위지(魏志)에 의하면 군장(君長)의 칭호는 신지(臣智) 험측(險側) 번예(樊濊) 살해(殺奚) 읍차(邑借) 등이 있었고 제주(祭主)는 천군(天君) 혹은 제사장(祭祀長)이라고 하였다. 각국 邑마다 一人의 天君이 소도(蘇塗)라고 하는 제사지역(祭祀地域)을 관할하였는데 그 신성지역(神聖地域)은 범죄자가 들어가도 잡아가지 못하는 불가침의 지역이었다.
의식생활(衣食生活)은 이미 원시형태에서 벗어나 농경(農耕)을 대단위화하는 수준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물을 가두어 농사에 이용하기도 하였고 철(鐵)을 녹여 농구(農具)를 만들기까지 하였다. 뿐만 아니라 천충(天蟲)인 누에를 길러 천을 짜기 시작하였는가 하면 우마(牛馬)를 길러 농사(農事)를 활용하였고 해안지대에서는 바다에 발을 쳐 고기를 가두어 잡기까지 하였다. 특산물로서는 꼬리가 긴 세미계(細尾鷄)와 배만큼이나 큰 밤이 유명하였다. 집은 대개 평지에서는 움집, 산지(山地0에서는 귀틀집을 지어 살았는데 의복은 나무껍질을 이용한 삼베와 모시베 명주등으로 지어 입었다.
남자는 머리에 상투를 틀고 여자는 가래머리를 얹었다. 신발은 집이나 가죽으로 만들었고 구슬은 재보이외(財寶以外)에 장신구(裝身具)로도 썼다. 이러한 사실들은 당시의 고분부장품(古墳副葬品)에서 알 수가 있다. 풍속은 매우 온순하여 길가는 사람끼리 서로 앞을 사양할 정도로 예절이 밝았고 형벌(刑罰)은 엄하였다. 또 마한인(馬韓人)들은 본래 성품이 낙천적이어서 춤추고 노래 부르며 술 마시기를 좋아하였다.
연중행사로는 5월과 10월에 크게 천신(天神)(태양신(太陽神))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이때 모든 부족원(部族員)들은 주야(晝夜)로 모여 놀며 즐겼다. 많은 사람들이 손발로 장단을 맞추며 춤과 노래를 불렀다. 이러한 것들이 지금도 남아 성행중인 전라도(全羅道) 지방(地方)의 강강술래나 경상도(慶尙道) 지방(地方)의 칭칭나래의 원류(原流)인 것이다. 이와 같이 성대하게 치루어지는 두 번의 큰 행사는 5월에 풍년(豊年)을 기원하는 기년제(祈年祭)와 10월에 추수감사제적(秋收感謝祭的) 성격으로 보면 될 것이다. 사후(死後)의 장사(葬事)는 일반적으로 후(厚)하게 지냈는데 우마(牛馬)를 순장(殉葬)하는 풍습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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