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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째 문화재 발굴..상인도, 주민도 떠나는 풍납동

돗가비 2018. 6. 28. 16:44


“풍납토성 복원 사업으로 많은 고객들이 떠나 상인들 매출액이 50% 이상 감소하고….”

지난 20일 서울 송파구 풍납동 풍납시장 골목길에는 건물주들에게 임대료를 깎아 달라는 호소문을 써놓은 현수막이 내걸렸다. 지상 2~3층짜리 상가 건물이 줄지어 있는 시장 골목에는 곳곳에 빈 점포가 눈에 띄었다. 이곳에서 만난 한 상인은 “손님도 줄고, 상인도 하나 둘 떠나면서 동네가 좀 어수선하다”고 했다.

시장 옆 주택가 주민들 입에서도 좋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주민 윤모(63)씨는 “20년 전쯤 문화재가 쏟아져 나오는 바람에 이 동네는 폭삭 망했다”며 “옆 동네는 맨날 집값이 올랐는데 우리는 건물도 못 고치고 남들 다하는 재개발, 재건축도 못한다”고 푸념했다.

풍납시장 골목에는 유동인구가 감소하고 손님이 급감하자, 임대료라도 내려달라는 상인들의 호소문이 걸려있다. /이상빈 기자
풍납시장 골목에는 유동인구가 감소하고 손님이 급감하자, 임대료라도 내려달라는 상인들의 호소문이 걸려있다. /이상빈 기자

풍납동은 서울 강남3구 중 한곳인 송파구 동쪽에 있다. 강남3구인데다 서울 부촌(富村)의 요건 중 하나인 한강변에 있고, 지하철 4정거장이면 잠실역에 닿을 수 있다. 지하철도 5호선과 8호선이 겹치는 이른바 ‘더블 역세권’이다.

입지로만 따지면 빠지는 게 없지만 주택시장에서 풍납동은 존재감이 없다. KB국민은행에 따르면 풍납동 아파트 평균 가격은 3.3㎡(1평)당 2050만원 정도다. 4000만원이 넘는 잠실의 절반에 불과하다. 서울 가장 외곽 동네인 강동구 고덕동(2679만원)보다 싸다.

풍납동이 이렇게 된 것은 20년이 넘었다. 1997년 아파트 재건축 공사장에서 옛 하남위례성의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 유물들이 나오면서 문화재 보존지역으로 묶여버린 것이다. 이때부터 풍납동은 개발행위가 제한됐다.

풍납동은 말 그대로 땅만 파면 문화재가 나오는 동네다. 수도 한가운데에 유물이 쏟아져 나오니 학계 뿐만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축복’이라고 할 만하다. 하지만 문화재가 나왔다는 이유로 개발행위 자체가 금지되면서 주민들에게는 ‘재앙’이 됐다.

엄청난 유물이 나왔다면 이 지역에 사는 주민들에게 적절한 보상을 해주고 이주시킨 뒤 본격적으로 문화재 발굴과 보전 사업을 하면 되지만 문제는 돈이다. 정부가 예산 부족을 이유로 보상을 늦추고 주민 이주도 적극 추진하지 않으면서 20년 넘게 재산권만 묶였다. 그 사이 주민들 불만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 풍납동 주민 김모(57)씨는 “20년이면 강산이 두번 바뀐다는데, 그 동안 꼼짝없이 묶인 바람에 주민들 손해가 극심하다”고 했다.

■문화재 지정 20년, 땅만 파면 백제 문화재 나와

풍납토성 발굴 및 복원 공사 현장. /송파구청 제공
풍납토성 발굴 및 복원 공사 현장. /송파구청 제공


풍납동에선 백제 시대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1997년 1월 아파트 재건축 현장에서 한 학자가 몰래 지표 조사를 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백제 유물들이 나왔다. 원래 한성백제의 도읍인 몽촌토성보다 더 많은 유물이 쏟아지면서 정부는 국립문화재연구소 중심으로 긴급조사를 했다. 이 동네에서 나온 유물 덕에 한성백제의 도읍이 풍납토성이라는 설이 유력해졌다. 신희권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는 “2011년부터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백제 위례성이라고 실려 있는 곳이 풍납토성으로, 백제의 옛 도성으로서의 역사적·학술적 중요성을 충분히 인정받고 있다”고 말했다.

풍납토성 유적이서 발굴된 도기. 풍납토성에 살았던 백제 왕도 사람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유물로 평가받는다. /한신대학교 박물관 제공
풍납토성 유적이서 발굴된 도기. 풍납토성에 살았던 백제 왕도 사람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유물로 평가받는다. /한신대학교 박물관 제공


■20년 넘게 재산권 묶여…2034년 돼야 보상 완료

유물이 나오면서 풍납동은 개발이 원천적으로 제한됐다. 그 사이 주변 집값은 급등했고, 풍납동은 송파구에서 가장 낙후된 동네로 전락했다. 서울시와 문화재청은 2009년 토성 내부를 보존 우선순위에 따라 6개 권역으로 나누고 단계별로 유물 보전·발굴 작업을 진행하고, 권역별로 보상과 규제를 적용했다.

토성 내 1권역은 토지 매입과 복원작업이 끝났다. 2권역은 구간별로 매입해 발굴을 진행해 개발행위가 제한된다. 3권역은 문화층이 있을 것으로 판단돼 지상 21m까지만 건물을 지을 수 있고, 지하 2m까지만 터파기 공사가 허용된다. 공사 중 유물이 나오면 중지된다. 4권역은 아파트 지역, 5권역은 성과 관련된 해자·백제유적 확인 가능성이 있는 지역, 6권역은 백제유적이 확인될 가능성이 있는 도성 권역이다.

정부는 풍납토성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한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예산 확보가 늦어지면서 현재 토성 내부 면적의 63%만 보상이 진행됐고 나머지는 22년째 재산권 행사가 묶여 있다. 실제로 정부는 2034년이 돼야 보상이 완료될 것으로 본다. 지금부터 따져봐도 기약이 없는 셈이다.

주민 불만이 가장 많은 곳은 2·3권역이다. 이 지역 주민들은 “예전엔 우리 동네 집값이나 옆 동네 집값이나 별 차이가 없었다”며 “20년째 보상이 늦어져 이제는 정부에서 나오는 보상금으로 아파트 한 채 마련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풍납토성 구획도. 1권역(빨간색)은 이미 매입이 완료돼 복원된 토지, 2권역(녹색)은 발굴 예정 토지, 3권역(하늘색)은 문화층이 있을 것으로 판단되는 토지다. 4권역(회색)은 아파트 단지로 이미 유실이 진행됐다고 평가 받고 있다. 5권역과 6권역은 성벽 밖이지만 유물이 남아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권역이다. /송파구청 제공
풍납토성 구획도. 1권역(빨간색)은 이미 매입이 완료돼 복원된 토지, 2권역(녹색)은 발굴 예정 토지, 3권역(하늘색)은 문화층이 있을 것으로 판단되는 토지다. 4권역(회색)은 아파트 단지로 이미 유실이 진행됐다고 평가 받고 있다. 5권역과 6권역은 성벽 밖이지만 유물이 남아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권역이다. /송파구청 제공
풍납동에선 '백제'라는 이야기도 꺼내면 안됐던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사진은 풍납토성 간판. /송파구청 제공
풍납동에선 '백제'라는 이야기도 꺼내면 안됐던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사진은 풍납토성 간판. /송파구청 제공


예산이 부족해 보상받고 이주하고 싶어도 기다려야 한다. 보상은 2·3권역 용지에만 해당되며 3권역 중에서도 2015년 3월 이전 사적 신청이 들어간 경우만 보상 대상이다. 보상 신청을 해도 대기표를 뽑고 돈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상권도 몰락하고 있다. 곳곳에 철거를 기다리는 빈집이 생기면서 상권에 구멍이 뚫렸다. 풍납동 M공인중개사무소 관계자는 “집이 듬성듬성 사라지고, 빈집도 늘어나면서 장사가 안되고, 권리금이 수천만원씩 붙었던 상가도 이제는 무(無)권리금으로 대부분 바뀌었다”고 말했다.

풍납토성 안쪽엔 보상을 받아 영업을 종료한 가게들이 속속 눈에 띈다. /이상빈 기자
풍납토성 안쪽엔 보상을 받아 영업을 종료한 가게들이 속속 눈에 띈다. /이상빈 기자
풍납토성 보존지역엔 삼표산업이 레미콘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삼표 풍납공장은 사적으로 진행돼 보상 및 수용이 진행될 예정이었으나 삼표 측은 소송을 걸었다. 현재 대법원 판결이 진행 중이다. 사진은 인근 아파트에 삼표산업 이전을 촉구하는 현수막. /이상빈 기자
풍납토성 보존지역엔 삼표산업이 레미콘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삼표 풍납공장은 사적으로 진행돼 보상 및 수용이 진행될 예정이었으나 삼표 측은 소송을 걸었다. 현재 대법원 판결이 진행 중이다. 사진은 인근 아파트에 삼표산업 이전을 촉구하는 현수막. /이상빈 기자


■문화재 보존도 좋지만, 기약 없는 재산권 제한은 문제

풍납동 주민들이 문화재 발굴에 무조건 반대하거나 보상비를 더 달라고 떼를 쓰는 것은 아니다. 주민들도 문화재 발굴의 중요성에 공감한다. 송파구청도 중앙 정부가 풍납토성을 어떻게 발굴하고 보존해 지역 주민과 공생하는 공간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없이 일방적으로 주민들 재산권을 제한하고, 이주 계획을 명확하게 하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풍납토성 내 보상이 완료된 토지는 철거 후 주차장 등으로 사용되거나 일반인의 출입을 막는 공용용지로 유지된다. 송파구청 관계자는 "건물을 남겨놓으면 지역 슬럼화가 진행될 수 있고, 지역 내 공용 주차장을 제공한다는 차원에서 그렇게 진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상빈 기자
풍납토성 내 보상이 완료된 토지는 철거 후 주차장 등으로 사용되거나 일반인의 출입을 막는 공용용지로 유지된다. 송파구청 관계자는 "건물을 남겨놓으면 지역 슬럼화가 진행될 수 있고, 지역 내 공용 주차장을 제공한다는 차원에서 그렇게 진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상빈 기자


주민 김모(53)씨는 “풍납토성 문화재를 잘 발굴해 전시 공간도 만들고 시민과 관광객이 많이 찾아오면, 주민들도 살던 곳을 무조건 떠날 이유는 없다고 본다”며 “이주비 줄 돈도 없이 일방적으로 주민들 희생만 강요하고 몰아낼 궁리만 하는 것이 실망스럽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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