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331. 맑음. 부부 함께.
일년여만에 걷는 지리산둘레길.
둘레길에 이름 붙여진거로 하면 5구간이라고하고 내가 걸은 횟수도 다섯번째이다. 함양의 동강마을에서 산청 수철리까지의 약 12KM구간이다. 구간에 쌍재와 고동재가 있어 등산을 하는 기분이 드는 구간이기도 하다. 보통은 순서대로 동강마을에서 수철리 방향으로 가나 지리산 둘레길이 더 연장되어진 요즘은 많은 사람들이 좀 더 수월한 수철리 방면에서 시작하기도 한다.
남부터미널에서 8시30분 버스를 타고 산청에 도착하니 소요시간(3시간10분)대로 정확하게 도착한다. 읍내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시작할까 하던거를 휴게소에서 간식도 먹었고 걷다가 주막에서 요기를 하기로 하고 택시를 타고 수철리로 향한다. 택시요금은 미터기로 하는데 7천원 가량 나온다( 정확히는 7100원가량 나오는데 기사분이 7천원만 받는다). 수철리 마을회관앞에서 다리를 건너면 동강 방향으로 가는 둘레길이고 회관앞을 그냥 걸으면 산청 방향이다.
오늘도 고생해 준 나의 발. 주인 잘못 만나 고생이다. 이 발로 전국 산천을 다 누비고 다니니...
수철마을은 본래 산청군 금석면의 지역으로서 무쇠로 솥이나 농기구를 만들던 철점이 있어서 무쇠점 또는 수철동이라 불리었다. 가양왕국이 마지막으로 쇠를 구웠다는 전설이 있는 곳으로 지리산길의 또 다른 연결을 기다리는 마을이다.
수철마을 회관앞에 있는 수철가든인데 늘어진 프랑카드에 이수근이 1박2일에 나왔던 그 집이란다. 살던 집을 개조해서 민박을 하는가 보다. 걷다 보면 수철마을은 온통 민박에 팬션단지가 들어서 있다. 보기에도 고급스럽고 좋아보이는 집들이 계속 들어서고 있다. 주민들의 소득에 조금이나마 도움일거라고 하는 민박이 차츰 쇠퇴하지 않나 싶다. 도회지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기왕이면 편의시설 좋고 외관 깔끔한 집을 찾을건 당연하리라. 시골여행은 그래도 역시 마을에 할머니 민박집에서 자고 먹으면서 추억을 만들어가는 재미가 최고일게다. 수철마을에서 고동재까지는 콘크리트 길의 연속이다. 십여리길을 걸어야 한다. 그래도 즐거움이 있다면 고동재 조금 못 미쳐에 있는 주막이다. 90년대초에 이곳으로 벌을 키우러 왔다가 눌러 앉게 되었다는 주인장과의 즐거운 대화를 하면서 손두부와 막걸리 한 잔으로 허기를 채운다. 마가목차를 주는데 맛이 진하고 향기가 좋다. 이곳에서 살면서 약초도 캐고 해서 지금은 주변 땅도 많이 사고 자식들도 서울에서 잘 살고 있다고 한다. 막걸리는 오미자를 넣어서 만들었는데 막걸리 냄새도 나지 않고 향도 좋다. 그리고 막걸리 특유의 트림이 나오지 않아서 좋았다. 손두부 하나로는 양이 덜 차서 하나를 더 시켜 먹고 감말랭이 한 봉지를 더 사서 배낭에 넣고 다시 출발이다. 길을 조금 더 걸어 오르면 고동재에 도착하게 된다.
고동재로 가는 길에 새로 지은 멋있는 집. 할아버지에게 길을 묻는다. 동강가는 이 길이 맞는냐고... 친절히 답해 주신다. 이 집은 개인주택일까 팬션일까? 그리고 저 뒤로 아마 필봉산일지 모르겠다.
무슨 팬션이라했던데... 딱 2박 3일만 쉬었다가면 좋겠다.
필봉산(유두봉)과 왼쪽으로 왕산으로 이어진다.
왕산은 정상에서의 조망과 필봉산으로 이어지는 날등의 철쭉과 억새밭이 좋은 산이다. 산자락에는 가락국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릉이 있다.
필봉산(848M) 정상은 온통 바위투성이로서 사방이 날카로운 벼랑 이며 산림감시원 초소가 있으며 주변 조망이 일품이다. 멀리서 보면 여자의 젖가슴 같다하여 일명 유두봉(乳頭峰)이라고도 하는데 산청은 옛부터 선비의 고장이라 이름을 바꿔 부른다.
보면 정말 여자의 젖가슴처럼 보인다ㅎㅎㅎ.
드디어 고동재에 도착한다. 고동형으로 생겼다해서 고동재라 한다는데 얼핏봐서는 여느 고개들과 다를바없다. 저 주막이 문을 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앉아서 쉬고 있는 저 처자와 막걸리 한 잔 술을 마시면 좋겠다. 무슨 사연인지 오늘따라 문을 열지 않았다. 잔치국수를 만들어 팔면 정말 장사 잘 되겠다고 하면서 지나친다. 고동재에서 쌍재까지는 산등성이를 타고 걷는다. 오늘따라 바람이 거세게 불어 걷기에 불편하다. 어제 많은 비가 내린 후로 추위가 오고 바람이 세차게 분다. 산길을 걸으면서 호젓한 분위기에 젖어 본다. 이 능선에서는 정말 전망이 좋은 포인트가 있다. 그곳에서는 가현마을이 발 아래 내려다 보이고 멀리 함양 남원이 시원스레 펼쳐지는 풍광이 원없이 볼 수 있다. 물론 지리산 자락은 덤으로 약간만 보여 준다. 천왕봉에는 아직도 정상에 눈이 하얗게 쌓인게 보인다. 그리고 중봉으로 이어지는 능선도 함께. 고동재에서 쌍재까지는 눈이 호사를 하면서 발도 편하게 걸을수 있어 좋다.
굴참나무를 베어 낸 자국.
바로 아래 가현마을과 더 아래로 방곡마을이 보인다.
쌍재. 이 고개가 옛날에는 함양과 산청을 이어주던 제법 큰 길이었고 주막과 마을이 있었다하나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고개만 남아 있다. 고갯마루에서는 왕산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있다.
상사폭포로 가는 길의 계곡. 아직 봄은 이른가보다.
상사폭포.
주 옛날 한 사내가 여인을 짝사랑하다 못해 상사병으로 죽고 말았다. 그 사내는 죽어서도 여인을 잊지 못해 뱀으로 환생해 그녀의 몸속으로 꼬리를 감추며 들어가려 했는데, 너무나 놀란 그녀가 뱀의 꼬리를 잡고 뿌리치는 바람에 즉사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자 그 자리에 뱀의 형상으로 계곡이 생겨났으며, 그 여인은 뒤늦게 상사폭포가 되어 지금까지 더불어 울부짖듯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전설이 다 그렇지만 이 또한 은근한 성적 상징체계로 이루어져 있다. 뱀은 남근(양물)을, 폭포는 여근(여궁)을 의미하므로 이 전설을 곱씹어보면 현실적으로 흔히 있을 법한 얘기이니 저절로 묘한 미소를 띠지 않을 수 없다.
쌍재에서 상사폭포로 내려오는 길엔 비닐하우스 쉼터가 있어 쉴수가 있는데 그냥 지나친다. 그리고 주변에 산양삼과 각종 약초 재배를 하는 사유지라는 안내판이 있다. 길을 걸으면서도 개인의 재산과 자존심 그리고 지역 주민들의 사생활은 절대 보호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추 하나라도 따 가져오는 일은 없어야겠다. 비가 와서 그런지 상사폭포는 제법 폭포다운 보기 좋은 모습을 보여 준다. 상사폭포에서 방곡마을까지 내려오는 길은 계곡으로 참 멋있다. 아주 큰 계곡은 아니면서도 운치있고 너른 바위가 있어 쉬어갈수도 있고 작은 소와 물길이 있어 더운 여름에는 발담그기에 그만이겠다. 고동재에서 쌍재로 그리고 상사폭포와 방곡마을로 이어지는 능선과 계곡을 걷노라면 힘든지를 모른다. 마음이 정화되는 그 기분이다. 그리고 방곡마을에 도착하게 되면서 기분은 180도 바뀌게 된다. 계곡에선 공사장 포크레인과 덤프트럭의 소음이 들린다. 그래도 먹고 살자고 하는걸 누가 뭐래겠는가.
산청함양사건역사교육관.
한국전쟁 당시인 1951년 2월 7일, 지리산 동부 왕산 인근의 빨치산 토벌 책임을 맡은 부대는 육군 11사단(사단장 최덕신) 9연대(연대장 오익경)였다. 산청군 수철리 쪽에서 왕산을 넘어 가현마을로 진입한 3대대장 한동석 부대는 주민들이 빨치산과 모두 한통속이라고 판단해 사람·집·가축·식량 모두를 제거하는 ‘견벽청야’ 작전으로 가현·방곡·점촌마을 주민들을 학살하는 사건을 일으켰다.
양민을 모두 통비 분자로 간주한 것이다. 이 사건을 일으킨 부대는 나아가 함양군 유림면 서주마을 사람들을 죽이고 이틀 후 거창군 신원면의 주민들까지 죽이는 ‘거창사건’을 일으킨 바로 그 부대였다. 당시 마을 사람들의 증언과 기록 문서에 따르면, 한동석 부대의 한 소대 병력이 지시대로 임천강 주변의 문정·한남·동강·남호리 주민 모두를 학살하려 했으나 휴천면장이 이를 극구 반대하는 바람에 다행히도 임천강 주변의 주민들은 모두 살아남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방곡마을 아래인 기암터 마을에서 빨치산과 한동석 부대가 마주쳤는데, 피아 구분이 어렵자 머뭇거리며 “그쪽은 누구네 부대요?” “거긴 어느 부대 어느 소속이오?” “동무 뭐라 했소?” 하는 순간 뒤늦게 총격전이 벌어졌다는 일화는 이미 영화의 한 장면으로 재연될 정도로 유명하다.
산청함양사건역사교육관이 버티고 서 있다. 엄청나게 큰 건물이 맨 위에 자리하고 있고 주변에 넓은 터를 닦아서 교육관겸 추모의 장소를 만들어 놓았다. 억울하게 죽은 주민들의 넋을 기려본다. 하지만 개인적인 생각에 문제는 위치이다. 이 장소가 산청함양사건의 현장이기에 이곳에 교육관을 세웠을건데 왜 교육관은 저 멀리 높은곳에 세웠는가이다. 둘레길을 걷는 사람들 모두가 입구에서만 구경하고 전부 발길을 돌린다. 물론 그 안에 올 사람만 그러니까 해당되는 사람만 들렀다가라고 한다면 더 할 말이 있겠나마는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도로 가까운 곳에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젊은 대학생들이 발길을 돌리는 모습을 보니 서운함이 남는다. 많은 돈을 들여 세운 건물을 더 뜻 깊게 활용했으면 좋겠다.
방곡마을에서 동강마을까지는 포장길을 걷는 지루함을 참아야 한다. 꽤 긴 거리를 포장도로로 걷자면 짜증이 난다. 오늘따라 강바람이 거칠다. 밭에는 농사일에 바쁜 엄마들의 손길이 부지런하다. 일없이 걷는 우리 모습이 한심스러울게다. 드디어 동강마을에 도착한다. 마을에 있는 화장실이 아주아주 깨끗하다.
산청함양사건역사교육관과 솟대. 저 높은 곳에 많은 계단 위에 교육관을 세울 생각은 누가 했을까?
교육관 입구인 회양문.
수석대와 신틀바위.
예전의 그곳은 강변의 풍치가 빼어나서 水石亭이란 이름도 아름다운 정자가 있었던 장소랍니다.
그 비문뒤엔 터 흔적이 있고 바위 두개가 있습니다. 신틀바위입니다. 짚신을 만들때 사용하던 틀과 모양이 비슷하다고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네요.
동강마을에 있는 버스시간표. 택시요금표.
원기마을과 동강마을을 이어주는 다리위에서 한 컷.
동강(桐江)마을은 평촌과 점촌 그리고 기암(개암터) 등 3개의 자연 마을로 구성되어 동강이라 하였다. 조선 고종대는 엄천면이라 하여 엄천면사무소가 이 마을에 있어 공무와 지방행정을 수행하던 곳이다. 강과 산이 함께 흐르는 듯한 아름다운 마을이다.
썬모래투어라는 여행사의 가이드가 걷던 길에 몇 번을 앞서거니 뒷서거니했는데 실은 자기네 여행사에 온 회원인줄 알고 친절히 대해주었다. 하지만 회원이 아니어도 아주 친절하게 해줄 젊은 친구들이었다. 부탁해서 한 장 찍었다. 서울 오는 길은 동강마을에서 다리를 건너 원기마을버스정류장에서 16:37분 버스를 타야 하는데 이 여행사 가이드에게 부탁하여 여행사버스로 상경하였다. 하루 회비를 내야 한다기에 일인당 삼만원을 왔다. 그래도 군내버스로 함양까지 가서 6시나 7시 고속버스일지도 모르는데 많은 시간을 보내야하고 동서울터미널에서 집에 오는 것보다는 관광버스 타고 교대역에서 내리는게 훨씬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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